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1)


"그의 작품들이 음악가들에게 받는 존경이나, 많은 청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점을 보면, 그는 아마도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일 것이다." 1980년판의 뉴그로브 음악사전은 이와 같은 칭찬과 더불어 베토벤에 대한 글을 위엄있게 시작한다. 이 문장은 10여년 후 독일 골리앗 (역주: 베토벤을 지칭)에게 보다는 모차르트라는 다윗에게 들어 맞게 되었다. 이 해 (1991년)가 모차르트의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고전적인 이미지가 베토벤의 더 외향적인 표현보다 선호되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라디오 채널을 휴 다운즈나 피터 우스티노프가 모차르트 스페셜을 진행하는 PBS로 돌려보라. 또 채널을 상업방송들 중의 하나로 돌려보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K.466과 "작은" G단조 교향곡 K. 183/173dB가 맥킨토시 컴퓨터를 팔고 있고, 돈지오반니는 Cheer 세탁세제를 선전하고, 피가로의 결혼은 Sirocco 자동차를 팔고 있고, 레퀴엠의 라크리모사는 Lee 청바지를 칭찬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또 다른 피아노협주곡 (K.482)는 맥스웰하우스 커피광고를 장식하고 있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에 쓴 교향곡의 발견은 뉴욕타임즈의 일면을 장식한다. 딜러와 수집가들은 작은 기록 조각이라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모차르트의 서명은 명화들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언젠가 딜러들은 "Andretter" 세레나데 K.185를 조각내어 각각 따로 팔아 엄청난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 피가로의 결혼과 돈지오반니는 현재 라보엠과 나비부인과 박스오피스에서 티켓판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모차르트의 대중화는 이로 인하여 가장 많이 이익을 얻고 있는 오페라하우스나 콘서트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며, 무대와 영화로부터 온 것이다.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1980년대의 모차르트 열풍은 피터 샤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연극과, 이어서 밀로스 포먼이 감독한 동명의 영화는 다른 어떤 것들이 작곡가 사후 200년 동안 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모차르트를 위하여 한 셈이다. '아마데우스'는 런던, 워싱턴, 뉴욕에서 상연되었고, 비엔나의 부르크극장 (Burgtheater)과 부다페스트의 넴제티 신하즈 (Nemzeti Szinhaz)에서 상연될 때에는 독일어, 헝가리어로 번역되었다. 샤퍼은 무대 버전을 계속적으로 수정했는데, 그는, "분명함, 구조적인 질서 그리고 드라마에의 거의 강박에 가까운 추구..... 런던 버전에서 잘못된 점의 하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몰락과 거의 관계가 없게 보였다는 것이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샤퍼와 포먼은 다시 원고를 수정하였는데, 단지 새로운 미디어를 위한 변경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더 순진한 관객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은 객관적인 "볼프강 모차르트의 삶"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이 점은 아무리 강하게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분명히, 무대에서의 아마데우스는 작곡가의 전기 다큐멘터리로 의도되지는 않았고 영화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주제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그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장식하는 월권 - 그 중에서도 특히 청중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주제를 강조할 목적으로 - 을 했다고 본다.

영화는 무대에서 보다 훨씬 더 그러한데,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럴법한 드라마를 역사 속의 시간, 장소, 실존인물들로 바꾸어 인식 시켰다. 무대공연에서 경고할 수 있었던 부분은 셀룰로이드 필름에는 넣을 수가 없었고, 픽션은 진실과 분리되지 않았다.

아마데우스는 궁정 작곡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의 작곡가로서의 신적인 재능에 대한 깊은 질투심에 중점을 둔다. 모차르트의 세련되지 못한 태도와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이 그의 인격으로 내려와서 만든 것과 같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었다. 그는 그의 이름대로 진실로 "아마데우스"의 축복으로 신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연극과 영화 둘 다 작곡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10년, 즉 1781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의해 해고된 후로부터 사망 시까지의 10년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비엔나에 거주하였고, 궁정 작곡가로서의 일상업무로부터 자유로운 작곡가가 되었으나, 재정적인 안정성을 위협받게 되었다. 이 10년동안 모차르트는 많은 곡들을 작곡하였는데, 모두 놀랄만큼 우수한 곡들이었다.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에 대한 경쟁관계에 촛점을 맞추기 위하여 비엔나 궁정의 장면들을 많이 설정한다. 몇몇 상황들이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들은 궁정 생활에 대한,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삶에 대한 비현실적인 왜곡이다.

영화가 개봉한지 7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음악학자들은 여전히 볼프강, 콘스탄체 그리고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요세프 2세 황제, 그리고 안토니오 살리에리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 그들은 정말 그러했었는가? 1991년 '모차르트의 해'는 이런 문화 아이콘의 초상을 검토하여 기록 바로 세우기를 시작할 시기이다.

'장식으로의 픽션' (역주: 사실이 아닌 내용을 극에 삽입하여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말함)은 작가들에 의한 창조와 역사적인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과소평가하게 한다. 샤퍼와 포만 둘 다 모차르트의 전기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역사적인 논란거리들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모차르트의 삶을 변형시킨 것은 다폰테가 보마르셰의 연극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 대본으로 바꾼 것과 유사했다. 길이는 매체의 형식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도록 만들어졌고, 등장인물의 수는 감소되었으며, 상황은 재정비되고 결합되어졌다.

그러나, (극에서의)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동기는 18세기 삶의 재창조일 수도 있다. 만약 샤퍼와 포먼이 그렇게 했다면, 또 그것을 의도했었다면, 그들의 영화의 힘이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동기, 목표 그리고 감정 또는 적어도 모차르트 시대의 사람들이 표현하고 유지했던 방식은 확실히 우리와는 달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강과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6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생존하여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둘 뿐이었는데, 이러한 비율은 그 당시에는 통상적인 것이었다. 만약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1990년대에 볼 수 있는 반응과 같은 크기였다면, 그들은 결혼생활 내내 거의 계속적으로 슬퍼만 하고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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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2007년 12월 27일 목요일

그냥 끄적... 그리고 건강검진

고작 크리스마스 이브 하루 휴가를 내고 쉬었을 뿐인데 - 물론 그래서 연 4일을 놀긴 했지만... - 계속 몸도 찌뿌둥하고 피곤하고 영 회사에 나오는 것이 괴롭다. 오늘 아침에도 간신히 일어나서 출근을 했다. 꽤 오래 전부터 계속된 '회사가기시러'병이 절정에 달한 것인가?

내 이력서에는 남들 보다 두서너배는 많은 직장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나는 내가 직장을 자주 옮겼던 이유가 결코 진득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모두 외부적인 사정에 의해서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가만히 있어도 회사가 합병이 되었던 적도 있었고..... 하지만 꼭 외부사정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직장이 내 앞날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뭔가 좀 더 나은 오퍼가 오는 쪽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변화는 항상 흥분과 긴장감을 주니 인생도 더 즐겁고....ㅡㅡ;; 결국 나는 철새였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별다른 대안이 없다. 대안이 없는 한 무턱대고 움직일 수는 없으니 내 철새 생활은 이제 종언을 고할 때가 된 것도 같다. 하지만, 근본이 철새였던 탓에 텃새인 척하는 생활은 별로 입맛에 맞지가 않는다. 그래서 올해 내내 '회사가기시러'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계속 "병마"와 싸우며 출근을 할 수 밖에...ㅡㅜ

어제 오후에는 건강검진을 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건강검진 전문 병원이었는데, 이 병원 직원들은 'sympathy 기반 친절'을 모토로 삼고 있는 듯했다. 사실 절차적인 면이나 효율성은 엉망이었다. 예약과정부터 삐그덕거렸는데, 같이 검진받고자 했던 남편은 받기로 했던 약을 못받아 결국 검진도 못받았고, 대통령선거일도 예약을 받았다가 나중에 바꾸느라 일정이 엉망이 되는 등 문제가 많았다. 어제도 수검자가 많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대기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또 작년의 모 병원에서는 혈관 주사를 한번만 놓아서 채혈도 하고 나중에 주사도 맞게 했지만 여기서는 두번이나 혈관에 주사바늘을 꽂아야 했었다. 구강검진이 오후에는 없다는 사실도 미리 이야기 해주지 않았었고.... 그런데, 거기 직원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들 있었다.

"많이 힘드시죠? (사실은 하나도 안 힘들었다)"
"너무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ㅠㅠ (엄청 기다리긴 했었다)"
"어지러우시죠?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어지럽다)"
"너무 시끄러우셨죠? (견딜만 했었다)"
"제가 안내해 드릴께요 (그러고는 옆의 직원에게 떠 맡긴다....)"

상대방의 감정을 오버하여 짐작하고는 호들갑을 떠는 류의 친절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그 웃는 얼굴과 걱정하는 듯한 표정에다가는 불평 불만을 늘어 놓기가 힘들다는 점. 그래서 결국은 나도 웃으면서 나왔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병원이라는 곳의 특성상 이런 식의 sympathy기반 친절 정책은 일반적으로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은 같다. 몸이 아프면 누군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느낌만으로도 많이 나아지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업무의 효율성이 받쳐 주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요 근래 여기저기 가끔씩 아파왔기 때문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일단 당일의 결과는 말짱했다. 며칠 후에 결과지를 받아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시력은 1.0, 1.5에 안압도 정상이고 청력도 매우 좋으며 혈압도 정상... 내시경 및 초음파도 멀쩡하다. 음.... 그럼 그간에 아팠던 것은 다 꾀병이었던가...; 직원들의 태도는 매우 sympathetic했으나, 검진 결과는 상당히 apathetic하다고나 할까...

수면 내시경을 했었기 때문에 좀 졸렸으나, 대충 밥을 챙겨먹고 레슨을 갔다. 내가 생각해도 어찌나 음정이 안맞고 손가락이 몰리는지... 정말 안습이다. 올해의 마지막 레슨인데...  연습부족이 여실히 들어나는 레슨이었다..ㅡㅜ

2007년 12월 24일 월요일

[공연] 뮤지컬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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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보여줄 공연을 찾다가 애니를 발견했다. 클럽발코니에서 회원할인을 해준다기에 2층 제일 앞쪽 자리를 예매했다.

평소 정도의 교통량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연 4-50분전에 집에서 출발했는데... 1호터널 중간부터 꽉막혀버린 도로는 뚫릴 생각을 하질 않고 있었다. 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어느새 6시가 훌쩍 넘고...ㅡㅜ 공연을 아예 포기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중간부터라도 보고 싶다는 지윤이 말에 계속 갔다. 시청 주변과 청계천 주변으로 접어 드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크리스마스 이브도 아니고, 이브의 이브지만 일요일인 탓에 사람들이 모두들 시내로 몰려든 모양이다. 일요일 저녁에 시내가 이렇게 밀릴 줄은 몰랐다...

전반부 공연을 포기하고 인터미션에 들어가서 후반부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뮤지컬이라서 그런지 중간입장을 시켜 주었다. 애니가 워벅스씨네 집으로 가서 환영을 받게 되는 장면부터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단순한 미국적인 줄거리였지만, 애니역을 맡은 꼬마와 고아원 소녀들을 연기한 아이들이 너무나 노래도 무용도 잘해서 신기하고 귀여웠다. 지윤이와 도윤이도 생각보다 훨씬 즐겁게 보고 있었다.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어도 줄거리가 워낙 단순한 덕에 별 어려움없이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고.

공연이 끝나고, 근처의 일품당에서 샤브샤브를 먹고, 종로빈대떡에서 부침개를 사고, 오다가 군밤도 사고... 아이들은 구세군 냄비에 돈도 넣어 보고.... 반짝반짝 꾸며놓은 서울 시내를 구경하면서 집으로 왔다. 크리스마스 서울 시내의 모습은 뉴욕 보다도 화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렇게 차가 밀렸던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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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는 원래 1924년 헤럴드 그레이가 쓴 Little Orphan Annie라는 한 페이지 짜리 연재 만화라고 한다. 만화의 내용은 고아소녀 애니가 샌디라는 개와 함께하는 모험담. 워벅스씨는 애니의 조력자로 중요한 역할을 하면 매우 이상적인 자본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만화나 오리지널 뮤지컬에서의 워벅스는 대머리인데, 어제의 뮤지컬에서는 머리숱이 많은 젊은 배우가 워벅스 역을 해서 원작의 느낌이 잘 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애니는 뮤지컬에서 나오는 것보더 훨씬 더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게 된다. 만화의 공식 웹사이트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있다.

Little Orphan Annie did not sing "The sun will come out tomorrow." She had no time to sing or hang out with the other orphans. She was too busy ducking bullets, dodging hit-and-run vehicles, and blowing up Nazi submarines!
만화는 작가인 그레이가 68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되었던 것 같고 그 이후에도 다른 작가들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뮤지컬 애니는 1976년에 초연되고, 1977년 브로드웨이에 등장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Charles Strouse이 곡을 맡고 Martin Charnin이 가사 그리고 Thomas Meehan의 대본이었다. "Tomorrow"는 뮤지컬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까지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곡이 되었고, 서정적인 "Maybe"와 "It's the Hard Knock Life"도 대중적인 곡이 되었다. 뮤지컬은 브로드웨이 뿐만 아니라, 런던, 그리고 미국 전역을 돌며 순연을 했고 이제는 세계각지에서 Tour공연도 하고 이번에 내가 본 것처럼 각 나라 말로 번역되어 공연이 되기도 한다.

어제 공연에서는 영어자막이 같이 나왔는데, 한국말 가사 보다는 원래의 영어가사가 훨씬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구체적인 표현들을 너무 추상적인 말로 번역되어 단지 예쁘고 아름답기만 한 대사나 가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영어로 공연을 해도 전부 다 이해하고 느낄 수도 없지만 말이다... 쩝..;

뮤지컬에서는 대공황과 세계대전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애니가 백악관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오고, 애니가 부르는 Tomorrow를 통해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에 대한 영감을 얻는 과정은 약간의 과장스럽기도 하지만, 일면으로는 리더가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비전과 희망이라는 점 (환상과 기만이던가...;;;)을 생각하게도 하고.. 최근의 대선도 생각나고 해서 흥미로왔다.

뮤지컬 애니의 캐스팅, 지난 공연 동영상들이 있는 공식 사이트:
http://www.annieorphans.com/ (물론 미국공연들이다...)

유튜브에는 애니와 관련된 동영상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 중의 몇 개만 뽑아 봤다.

오리지널 캐스팅이라고 볼 수 있는 Andrea McArdle의 Tomorrow. 그리고 애니로 일약 스타가 된 그녀의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웹페이지:
http://www.myspace.com/andreamcardle


Tomorrow, sung by Alicia Morton in the 1999 Disney Version


"It's the hard-knock life", sung by the Original Broadway Cast of 1977


지각한 우리가 들어가서 보기 시작한 장면의 노래인 I Think I'm Gonna Like It Here 와 NYC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노래들...


사라 제시카 파커가 노래한 I Don't Need Anything But You... 1982년 영상~


'ANNIE' orig 1977 broadway show excerpts


Aileen Quinn이 부르는 Maybe 1982

레슨일지 2007. 12. 22 (토)

지난 주 출장으로 레슨에 못갔었는데, 출장에 다녀온 후 선생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인사 못하고 그만두게 되어 미안하다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바친기에 올라왔던 레슨실 광고가 떠올랐다. 레슨실을 따로 하나 하시는 것 같더니 아예 이제 그쪽으로 전념하려고 이 쪽 레슨을 그만두시나 보다.

그리하여, 이번 토요일에는 다른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다. 사실 이 선생님은 내가 제일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던 분인데... 2년여만에 배우게 되는 셈이다. 선생님이 바뀌면 자세부터 다시 교정하기 때문에 진도도 거슬러 가기 마련일 듯 했다. 일단 호만2권의 중간 부분을 해보라고 하셨고... 세브직이랑 스즈키를 다시 해보자고 하셨다.

자세에 관하여 몇가지 지적을 받았는데... 3번 손가락이 비스듬하게 짚이지 않고, 지판과 직각에 가깝게 운지가 되어서 음정이 조금 낮게 들린다고 지적을 해주셨다. 왼손 검지의 뿌리 부분이 지판에 닿은 채로 나머지 손가락이 짚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나의 경우에는 그 부분이 붙어 있지 않아서 각 손가락간의 간격이 일정하게 짚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음.. 상당히 근본적인 문제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뭐 어떻든 고쳐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하나는 활 끝까지 쓰려면 악기를 몸 앞쪽으로 돌려서 잡으라는 것이었다. 활을 똑바로 쓰기 위하여 악기를 오히려 뒤로 더 빼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터라 이 코멘트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지 난감했다. 활끝을 쓰기 위하여 악기를 앞으로 돌려야 하는 것인지, 활을 비뚤어 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뒤로 빼야 할지....

또 하나는 손목. 보잉 시에 손목이 계속 유연하게 구부러졌다 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일단 그런 보잉보다는 손목을 고정시키고 더 힘있게 보잉을 하라는 것. 확실히 소리는 더 커지고 힘있게 들려왔다. 팔에 힘을 빼는 것을 의식적으로 노력해왔던 터라... 좀 어색했지만, 다양한 소리를 내는 것에는 다양한 방식의 보잉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들 지판에 다시 스티커를 붙이게 되었다. 이분은 지판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을 선호하시는 쪽이신 듯 하다. 나는 다행히도 스티커 붙임을 당하지 않고 넘어가긴 했는데... 앞으로도 음정이 틀리면 스티커가 붙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시달릴 지도 모르겠다..ㅡㅜ

문제는.... 이제 레슨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가라는 점이다. 원래 그룹레슨을 받으면서 문제점을 느껴서 개인레슨을 시작했었지만, 여러가지 곡들을 배우는 그룹레슨을 그만두기도 힘들어 두 가지를 병행해 왔던 것인데... 최근들어 이렇게 계속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효율적이지도 않고 또 일주일에 두번이나 레슨 받을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느껴오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둘 중의 하나는 그만두는 것이 맞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떤 레슨을 계속해야 하고 어떤 것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룹레슨은 선생님이나 교재와는 관계없이 개인레슨에 비하면 단점이 많다. 한 사람당 레슨시간이 적은 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주의가 분산되어 학생 한 명에게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그러하다. 또 하나는 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다는 점. 같은 곡을 다 같이 연주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음정이 틀려서 음이 어긋나는 것인지 내가 틀려서 음이 어긋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결국 음정이 헷갈리고, 각기 다른 곡을 연주할 때에도 시끄러워서 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레슨을 받는 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같이 연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만...;; 그에 비하면 개인레슨은... 더 비싸다는 명백한 단점 이외에는 그다지 큰 문제점은 없다. 선생님이나, 레슨 스케쥴은 그룹이냐 개인레슨이냐의 문제는 아닌 것이고.... 그래서 결론은?

아마 그룹레슨을 그만두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 문제는... 레슨 자체보다 연습시간을 더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그룹레슨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더 받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이제 그쪽팀과 같이 합주를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남은 레슨비는 다음에 혹시라도 레슨을 다시 시작할 경우를 대비해서 남겨 달라고 부탁드리고 당분간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씀을 드려야 겠다.

1월에는 오케스트라 연습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아직 아주머니가 편찮으셔서 걱정이다. 오케스트라에서 할 슈만 교향곡 1번을 생각하면... 흠흠... 빨리 연주연습으로 복귀하고 싶은데... 회사일만 좀 덜 바쁘면 그럭저럭 매니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렇게 무리하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찌 될지... ㅜㅜ

2007년 12월 17일 월요일

뉴욕 출장

출장이 계획되어 있는 것은 몇달 전부터 였는데, 도무지 일정이 나오질 않았다. 일정이 나와야 비행기표도 확정하고 호텔도 잡고 출장 승인도 받을 텐데 말이다. 이번 conference의 준비과정을 (그런게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가만히 지켜 보니, 이번 conference는 도무지 갈 이유가 없어 보였다. 지구 반대편까지 열 몇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데, 이렇게 이유도 없이 가야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보스가 가라는 걸 안갈 수도 없는 노릇. 제대로 된 agenda도 없는 상황에서 누굴 대상으로 어떤 미팅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채로 비행기를 탔다. 이렇게 organize가 안되어 있는 미팅은 정말 난생 처음이다..;;;

월요일 낮에 도착하고 조금 졸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Carmine's라는 곳으로 나름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패밀리 레스토랑같은 분위기에 엄청난 양의 음식이 잔뜩 나온다. 맛은 뭐... 그저 그렇다. 사람이 많아서 한참을 기다려서야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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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채요리라고 나온 오징어 (또는 쭈꾸미?) 튀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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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디쉬 중 하나였던 립. 고기 맛은 괜찮았다... 좀 짠 것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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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뉴욕에서 상당히 유명한 곳으로 저녁이면 유명인들이 약속장소로 삼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누가 유명한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묵는 내내 그다지 인상적인 사람들을 보지는 못했다.

방에서 바라본 호텔 옆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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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호텔에서 그 다음날의 미팅의 내용을 모모씨들과 다시 쭉 훑어 보고... 늦은 오후에 사람들과 같이 나가서 잠깐 쇼핑을 했다. 쇼핑이라고 해봐야... 장난감 몇 개 사는 정도. 뉴욕이 처음도 아니고... 신발이 불편해서 발도 아프고, 곧 비가 오기 시작해서 얼른 저녁을 먹고는 돌아왔다.

2004년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작년 초에 한 이틀정도 Fairfield에 갔다 오고, 작년 여름엔 Orlando에 다녀왔었는데.... 모두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었고.... 최근에는 가끔 미국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출장이 아니라 지윤이랑 같이 예전에 살던 필라델피아랑 뉴저지를 둘러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번 출장이 계획되었을 때, 앞 뒤로 시간을 좀 내어서 필리에 가볼까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윤이를 데리고 가면 미팅을 하는 동안 방에 혼자 둘 수도 없고... 더구나 아줌마도 편찮은 상황이어서 출장기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더 낫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미국에서의 생활이 쭉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자려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기억이 갑자기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라서 스스로도 당혹스러워 졌었다. 아파트의 모습, 주차장, 차, 매일 지나던 길들, 가끔 탔던 버스, 지윤이가 다니던 유치원, 아파트 근처의 수퍼....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살았을까. 혼자서 외로왔던 기억, 겨울에 히터가 고장나서 떨며 잤던 기억까지... 역시 그다지 즐거운 기억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덕분에 잠은 완전히 달아났고 13시간동안 한잠도 자지 못했다.

수요일, 미팅은 30 Rock에서 있었다. 뉴욕에 NBC Universal의 사무실이 있어서 그 곳에서 미팅을 하거나, 아니면 호텔에서 미팅을 할 것이라고 들었었는데, 결국 NBC가 있는 30 Rock에서 하기로 한 모양이다. 바로 앞에 크리스마스 즈음 뉴욕의 명물이 된다는 트리가 있으니, 이번엔 그 유명한 Rockefeller Center의 트리도 볼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 즈음에 뉴욕을 가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911 이후로 강화되었다는 까다로운 방문절차를 밟아 30 Rock의 25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오전 미팅은 나름 괜찮게 진행되었는데, 오후에는 우리 "조직"의 No.2인 아저씨가 예상과는 달리 불참하는 바람에.... 간략 버전으로 진행되었다. 준비해간 피치를 그냥 쭉 넘기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찍 미팅이 끝나고 회의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에 불이 들어 올 즈음 사진을 찍었다. 회의실 유리창을 통해 찍은 것 치고는 그림이 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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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 후에도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호텔로 돌아왔고 곧 저녁을 먹으러 갔다. Broadway 32번가의 한국식당에 갔는데 (왜 하필...;;) 짜기만하고 별 맛없는 양념갈비와 어색한 인테리어에... 서비스도 엉망이었다. 그나마 가격은 서울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했는데... 대략 어느 지방 소도시의 80년대식 식당의 느낌이랄까...;;

다음날이자, 마지막날에는 Stamford에서 미팅을 하기로 했었는데, 일기예보에서는 눈이 온다고 했다. 미국 동부에서 눈이 오면 얼마나 황당해질 수 있는지는 잘 알고 있긴 하지만... 이 조심성이 과다하게 많은 사람들은... 결국 그날 미팅을 모두 취소하고는 call로 대체하기로 결정을 해버렸다. 모두들 그날 아침에 또는 전날 저녁에 Stamford로 돌아가 버렸고, 우리들만 City에 남았다. 그 날 오후까지 미팅스케줄을 잡았던 나는 새벽까지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결정을 못해서 맘고생을 좀 했다. 갔다가 눈 때문에 못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항공사에 다음날 좌석이 있는지도 체크해보고.... 어쨌거나, 결국은 호텔방에서 call을 했다. (결국 맨하튼에서는 눈이 아닌 비가 주륵주륵 내렸다.. 아마 Stamford에 갔다가도 충분히 제 시간에 돌아 올 수 있었을 듯 하다. 하긴 점심때쯤 통화에서는 그 윗동네에는 3인치쯤 눈이 왔다고는 하더만.. )

2-3시까지 밥도 못먹고 진 빠지게 call을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는 잠시 쉬고 있었는데... MSN에 접속을 해보니 바로 어제 뉴욕에 도착한 옛 동료가 온라인이었다. 그는 이제 1년-1년반의 뉴욕 생활을 막 시작했으니, 오늘 보지 않으면 한동안은 얼굴 보기가 어려울 듯... 저녁에 잠시 보기로 했다.

로비에서 만나서, 다시 30 Rock으로 갔다.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가까운 곳을 찾고 싶었고 32번가의 한국골목은 별로 땡기질 않았으며... 어제 미팅 후에 자세히 보려고 했던 트리를 이런 저런 이유로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찍은 GE Buildng과 크리스마스 트리. Saks Fifth Avenue앞에서 길 건너편을 찍었다. Saks Fifth에서는 귀여운 장난감 인형들이 전시중이었는데 사람도 많고 귀차니즘도 발동하여 사진은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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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나팔부는 모양의 장식물들. 사진찍기 좋은 스팟이었는데... 역시 대충 찍었더니 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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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 앞의 아이스링크. 비가 조금씩 오고 있어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후에 밥먹고 나오니 꽤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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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센터의 지하에서 대충 저녁을 먹고 (늦은 점심을 먹었으니 배가 고플리가 없다...) 호텔과 30 Rock 중간에 있는 Au Bon Pain에서 커피를 마셨다. 헌츠만홀에서 늘 먹었던 프렌치로스트다.  오봉뺑에 들어서자 죽 늘어서 있는 커피포트들이 옛날 헌츠만홀의 오봉뺑을 연상시켰다. 서울에 있는 오봉뺑도 이런 시스템인가? 안가봐서 모르겠다...

거기 앉아서 약간 수다를 떨고... 그에게 뉴욕생활 잘 하라고 이야기 하고는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우리 팀 사람들은 모두 저녁을 먹으러 나간 듯, 연락이 되질 않았고... 이메일 한 통 써놓고는 체크아웃.

액체류가 반입금지였던 것을 까먹어서 공항 검색대에서 치약을 압수당하고... JFK 라운지로 갔더니... 헐...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다. 유학생들이 방학이 되어서 귀국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애들이 다 비즈니스를...;;; 이코노미에 열 몇시간을 시달리며 다녔던 내 고달픈 유학시절이 또 생각난다...ㅡㅜ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출장이었는데.... 워낙 별로 가고싶지 않아서 그런지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Corporate쪽 사람들과 Business쪽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가서도 이렇게 하는 일 없이 Manhattan에 죽치고 있으면 안될 것 같고... Stamford에 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마구 들었었는데, 눈온다고 오지도 말라고 하고...;;; 돈은 많이 썼는데, 얻은 것도 없고, 즐겁지고 않고... 마음도 편하지 않은 출장이다. 게다가 당장 다음주에 돌아가서는 할 일도 산더미....;;

이번 출장은 이렇게 마무리... 담에 비행기 타는 일은 즐거운 목적이길...
(그나저나.. 고작 며칠 갔다왔는데 시간감각이 망가지다니... 새벽 3시에 잠도 안오고... 큰일이다... ㅜㅜ)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그녀, 파트리샤 쁘띠봉

아마존 프랑스에 주문했던 하모니아문디 50주년 기념 박스가 도착했다. 배송비를 생각하여 이런 저런 프랑스 음반들도 같이 주문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쁘띠봉의 음반이다. 쁘띠봉의 음반은 국내에서도 그럭저럭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이제 실컷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 50주년 기념 박스만큼이나 맘에 든다^^

그녀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이 여자 뭐하는 거지? 성악가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를 듣고는 더 충격을 받았다. 애니메이션이나 아이들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외모인데, 목소리는 파워풀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왔다. 인지 부조화라고나 할까... 하지만 계속 보고 들으니, 정말 매력적인 가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쁘띠봉은 나보다 이틀 먼저 태어났다. 1970년 2월27일생. 물론 프랑스 출신. 많아야 삼십대 초반일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나이는 많다. 주로 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녹음한 음반을 내고 있지만, 모차르트, 하이든의 오페라 작업도 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영상도 너무 좋다) 원래는 플라스틱 아트를 공부하다가 음악을 했는데, 그런 미술적인 백그라운드가 그녀의 독특한 꾸밈새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작곡가 남편과 아들 하나가 있다고 한다.

유튜브에는 나름 다양한 그녀의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좀 충격적인 것은 오펜바흐의 호프만이야기에서 올림피아로 나온 영상 두 개이다. 하나는 아래에 스크랩되어 있고, 나머지 하나는 누드씬인 것 처럼 꾸며놓은 의상을 입고 노래하는 것이다. 올림피아라는 캐릭터가 그녀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유니버설뮤직에서 만들어준 그녀의 홈페이지는 다 불어라서 이해가 쉽지 않다.
http://patriciapetibon.artistes.universalmusic.fr/

쁘띠봉이라는 재미있는 이름과, 특이한 헤어스타일, 멋진 연기력과 귀여운 마스크.... 그리고 무엇보다 부드럽고 강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목소리!! 언젠가는 멋진 그녀를 만날 수 있으려나...














2007년 11월 30일 금요일

2007년 11월 마지막날의 잡생각들

11월의 마지막날이다. 2000년대로 넘어 오며서, 한 해가 다 가도록 여전히 연도가 익숙해 지지 않는 증상이 심해지고 있다. 사실 난 아직도 2006년을 살고 있는 것 같은데 2007년도 끝나가고 있다니 참 새삼스럽다.

이런 증상은 내가 치매에 가까운 정신상태로 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사실 어느 정도는 직업병이기도 한데.... 늘 지난 기간의 회계기록들을 보면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회계법인에 있을 때에는 3월이 지나고 4월이 되어야 다음해가 된 것 같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3월까지 12월말 법인들의 감사와 세무조정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해가 바뀌었다는 느낌이 전혀 안드는 것이다. 그래서 일하면서 "올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작년도였었다..ㅡㅡ;; 아.. 이제 해가 바뀌었구나라고 느낄 즈음에는 벚꽃도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지기 시작하는 시기이고... 개나리 진달래는 이미 온데간데 없어지는 계절이었다.

다시 학생으로 돌아간 유학시절에는 나름 제 시간을 찾아 간 듯 했었고, 그 이후에 planning일을 했을 때에도 제 날짜에 살고 있는 듯 했다. sales/income을 매주, 매달 분석하고, 남은 기간의 forecast도 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다시 tax의 세계로 돌아 온 후에는 늘 과거 5년의 시간에 묻혀서 산다... 일반적으로 tax liability의 소멸시효는 5년이기 때문.... 그래서 작년, 아니 올해 3월까지도 2001년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다.

물론 내가 늘 과거의 쓰레기(?)처리만 하는 것은 아니긴 하다. 여러가지 deal에서 alternative structures를 가지고 tax관련된 panning을 하기도 하고..... 과거가 아니라 현재 당장 처리해야 하는 문제들도 산더미처럼 있기는 하다. 더구나, 이맘때 즈음이면 쏟아져 나오는... 그리고 사실은 연중 나오는 각종 법률 개정안들은 모두 미래의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회계세무쟁이라는 인간들은 과거의 기록에 매달린다. 이 직종의 인간들은 숫자, 그것도 estimation이나 forecasting이 아닌 real number에 집착한다. 세무쟁이들이 회계쪽 보다 더 그러하다. 회계는 발생주의지만 세무는 권리의무확정주의가 아닌가.

각설하고.... 어쨌건 이제 2007년은 달랑 한달이 남아 있다. 2008년이 되면 대부분의 내 친구들 동기들은 마흔이 된다. 생일이 빠른 관계로 나는 아직 삼십대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을 1년 벌기는 했지만...(쓰고 보니 마치 무슨 집행유예기간 같은 느낌...?) 심리적으로는 이제 나도 마흔줄이구나 라는 느낌에 더 가깝게 가게 될 것 같다. 김광석의 서른즈음에가 나온 때는 내가 아직 20대였을 때였는데... 그래서 서른 즈음이 되었을 때 그 노래를 불렀었던 것 같은데... 또 10년이 지나가다니... 김광석은 마흔즈음에를 만들지 못하고, 부르지도 못하고 갔는데... 말이다...

한동안 상당히 즐겁게 지내왔던 것 같은데, 몇 달 전부터 이런 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대부분이 회사와 관련된 것들이라 뚜렷하게 방향전환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방향전환이 안되면 기분전환이라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해도 바뀌는데...... 남은 휴가 몽땅 써서 여행이나 갈까?

2007년 11월 26일 월요일

레슨일지 2007. 11. 24 (토)

2주를 건너뛰고 받은 레슨. 내가 참여하지 못했던 유스트링 연주회가 있었고, 그 다음주에는 이유는 잘 모르지만 레슨을 하지 않았었다. 사실 그 전 10월에도 레슨을 2-3주나 빠져서.... 사실 10월 11월 두 달 동안 받은 레슨이 한 두번 밖에 안된 것 같다... 여하튼 전의 레슨에서 바흐 더블 콘첼토 2악장까지 끝내고 나서 일단 바흐 무반주 악보를 사두기는 했는데, 어떤 곡으로 진도를 나가게 될지 잘 모르는 채로 갔다.

나도 버릇이 되었는지... 또 한 30분 쯤 늦었는데, 가보니 선생님 말고 한 명만 와 있었다. 내가 들어가고 나자 조금 후에 한 명이 더 왔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결석인가 보다.

늘 하는 시라디크, A현 연습, D현 연습, A,D현 번갈아 가며 하는 연습, 슬러연습
흐리말리 g minor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1번 4악장 프.레.스.토......를 안단테처럼 하기....ㅡㅡ;;


한시간 반 정도 손가락을 풀고... 흐리말리 F major 2옥타브 연습을 하고 있었더니, 내 차례가 되었다. 어떤 곡을 나갈 지 잠시 고민하시던 선생님... BWV 1001의 프레스토 페이지를 펼치고는 그걸 하겠다고 하시고는 같은 조인 g minor스케일을 먼저 해보라고 하신다. b 플랫의 음정에 유의하여 연습할 것.

그리고는 프레스토를 천천히 연습했다. 천천히 하니 초견에도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원곡과는 비슷하지도 않았다...;; 그 곡을 천천히 하면 이런 멜로디가 되는 거였구나.. 새삼 신기해 하며 악보를 몇 번 읽어봤다. 프레스토의 빠르기로 과연 할 수나 있을까... 심히 의심이 된다. 이 곡을 선택하신 이유가... 아마 더블스탑 또는 트리플, 쿼드러플 스탑이 거의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인 듯 한데... 내게는 여기 끝 부분에 나오는 3음코드들을 잡는 것도 연습이 필요할 듯하다.

평소에는 악기가 작아서 지판 간격이 너무 좁은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다가도, 운지가 까다로운 코드나 멜로디가 나오면 내 손이 작은 것이 역시 원망스럽다..ㅡㅜ 하지만... 작고 큰 것보다는 유연성과 필요한 근육의 단련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이건 역시 연습만이 해결책이다.

2007년 11월 24일 토요일

[책]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
앨버트 칸 (Albert E.Kahn) 지음, 김병화 옮김, 파블로 카잘스 구술, 한길아트

80-90년대에 한 번 국내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던 책이 2003년 한길아트에서 다시 나왔다. 책값은 당연히 비싸졌고.... 예전에 나왔던 책을 읽어 보진 못했지만, 그 책이 인용되어 있는 글들을 간혹 보면, 당시의 번역보다는 현재 이 책의 번역이 더 부드럽고 실제로 카잘스가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별다른 기대없이 일반적인 음악가들의 자서전 또는 전기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책은 마치 잠언을 읽는 것처럼 구절구절 메모하고 기억하고 싶은 카잘스의 명언들로 가득 차 있었다. 1969년 정도에 앨버트 칸이 카잘스를 인터뷰했던 글을 바탕으로 쓰여져 있기는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기까지의 일들이 시대순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아무래도 좀 더 최근의 일들과 최근의 그의 생각들 - 2차대전과 그 후의 활동들 - 이 더 많이 반영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책의 내용이 모두 카잘스의 구술이라면, 그의 기억력은 아흔세살이라는 나이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생생하다.

그는 긴 삶을 살았지만, 그의 삶은 다른 음악가들과는 다르게 음악 이외의 것들과도 많이 얽혀 있었다. 그가 에스파냐의 카턀루냐 출신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가 20세기 초를 살아야 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따뜻한 마음과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용기있는 삶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러했었다. 단지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에 대한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는 카탈루냐의 한 꼬마였던 카잘스는.... 처음에는 첼로로 사람들을 감동시켰지만, 훗날에는 그가 보여준 신념과 의지로 조국의 동포들에게 힘이 되고, 유럽과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거인이 된다.

참혹했던 에스파냐 내전과 2차대전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은 평탄한 음악가의 길이 되었을 지도 모르고, 그는 고향을 죽을 때까지 돌아가 보지 못하는 운명이 되지 않았을런지도 모르지만, 그랬기 때문에... 지금 21세기에도, 또 훗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신념을 기억하고 그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명확하게 보이는 것을 가끔씩 잊고 산다. 어떠한 이념이나 생각이 옳다고 믿게 되었을 때에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형제들과 친구들을 위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왜 그러했는지를 잊고 결과만을 받아 들이곤 한다. 또 어쩌면 애써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면서 조금 더 안락한 삶을 살고 싶어 하기도 한다.

죽기 불과 몇 달전까지 연주회를 가졌던 첼리스트. 매일 아침, 바흐로 온 집안을 축복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던 경건한 사람. 사람들을 좋아했던 다정다감한 연주자. 그리고 전쟁들 속에서 살아 오면서 더욱 간절히 평화를 바라게 되었던 휴머니스트.

한 세기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노첼리스트, 카잘스는 책에서 강한 어조로 세상에 이야기 한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들 하나하나가 놀랍고 유일한 기적과도 같은 존재임을 알려 주어야 하고, 모든 다른 사람도 다 똑같은 기적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그래서 똑같은 기적인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고 서로서로를 소중히 여기도록 하자고. 그래서 이 세상을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만들도록 노력하자고....

2007년 11월 23일 금요일

감동적인 연주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음악을 듣고 느끼는 감동은 완벽한 연주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정말 빈틈없는 연주이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경우도 있고, 간혹 실수도 있지만 눈물나게 아름다운 경우도 있다. 악기의 소리보다 지지직거리는 잡음이 더 많이 들리는 음반에서도 가슴아픈 감동이 전해져 오는 경우도 있고, 깔끔하고 세련된 자켓과 흠 하나 없는 녹음에서도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Marshall C. St. John이 모아 놓은 카잘스에 대한
스크랩북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It is not technique on a particular instrument that makes a man or woman a great musician, but love of music and people. In Casal's old age his technique slipped quite a bit, and even in his prime he probably did not have the technical abilities of Starker, Rostropovich or Ma. But he played his music from a heart full of love, dignity and respect. He truly cared about people, and freedom and justice; and so he moved those who heard him, and he had a great impact on the musical world, and the world at large. Students hoping to be professional artists should give time to developing their souls and minds, and humanity, along with their fingers and bow arms.

음악은, 분석을 하기에도, 공부를 하기에도 좋은 소재이고, 역사와 뒷배경을 알아 보는 것도 모두 모두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가슴 떨리는 감동은 정말 알 수 없는 곳에서 오곤 한다. 음표들은 연주자의 머리로, 가슴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악기를 통하여 나의 머리로 그리고 가슴으로 들어 온다. 그리고 모두가 다른 음악이 되는 것이다....

아무런 기교도, 화려한 무대도 없이 깨끗하지도 않은 음질의 CD에서 들려지는 카잘스의 바흐가 그토록 따뜻하고 감동적일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일까.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책] 일타쌍피를 노리다 - '클래식광, 그림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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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장현
196p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도 꽤 되었다. 아마 고클래식에서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비록 독자층이 두껍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색다르고 흥미있는 주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있는 오래된 도이치그라모폰의 LP세트에는 재미없게도 연주자들의 사진이나 작곡가들의 얼굴들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새로 나온 음반들일 수록 회화작품들이 커버에 실려 있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갈수록 음반디자인에 세련되어 지는 듯하다. 그 그림들이 명화인지는 워낙 그림에 아는 바가 없어 잘 모르긴 했지만, 재미없는 음악가들의 사진들 보다는 (물론 연주자가 훈남일 경우는 제외...) 커버에 이쁜 그림들이 들어 있는 것이 좋긴 했었고... 음반회사가 음반디자이너를 고용한 보람이 있을만큼이나, 더 손이 갔었다. 

책은 아주 쉽게 읽혀진다. 작가는 인터넷에 실렸을 법한 투의 문체로 (실제로 고클래식에서 연재된 글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글을 써 나가서 편안하게 앉아 친구에게서 이야기를 들으며 그림감상을 하는 기분이었다. 책에 나와 있는 음반들을 같이 들으며 읽으면 좋았겠지만... 자기 전에 조금씩 읽었기 때문에 음악을 같이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림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음악을 상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 음반구입 시에 참고가 될 만한 음반도 꽤 있었다.

그림과 음악, 그에 얽힌 이야기들이 함께 어우러져,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책. 음악과 그림을 함께 배울 수 있는 일석이조, 일거양득, 일타쌍피의 책이 되리라고 예상했었는데, 상당히 그 의도에 걸맞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작가가 글을 쓰면서 이것 저것 찾아보고 알아 보았을 과정이 더욱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은 넓고 음반은 많으니, 다음에 그림이 있는 음반을 만나면 스스로 리서치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2007년 11월 12일 월요일

가을 정기 연주회를 마치고....

생각해보니 지난 4월말, 5월부터 6개월이 넘게 연주회를 준비해온 셈이다. 일주일에 고작 2시간 연습을 했다고 하더라도... 뮤캠 등을 합치면 6-70시간을 연습한 것이니.... 정말 긴 시간이었다. 난 여전히 빠른 패시지를 얼버무리면서 연주를 했지만, 다행히 빵빵한 관들의 소리- 동원된 객원 금관들 포함 - 에 적절히 파묻혀서 무난히 (?) 넘어갔다.

연주회 전 연습들.

목요일 정기연습 이후에, 금요일 특별연습이 있었다. 회사에 또 누가와서 금요일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무사히 도망나왔다... 사실 그 지겨운 저녁식사를 하는 것보다는 오케연습이 100배는 재미있다. 금요일 밤 서울대입구역의 낯선 연습실에서 알 수 없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연습을 마쳤다. 저녁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동네는 10년전과는 도무지 같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많이 변해 있었다. 공룡같은 빌딩들이 어찌나 많이 들어서 있던지...

연습실에는 금관들이 가득 차 있었고, 팀파니와 심벌즈 하시는 분들도 와계셨다. 이거 사운드가 장난 아니겠는걸... 했는데... 브루흐의 로망스를 시작하고 나자... 갑자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소리가 퍼지고 흡수되어서 그런건지... 영 작고 자신없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이런.. 내일이 연주회인데 어쩌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나아져 가긴 했고... 밤 시간이라 다들 지쳐 보이긴 했지만, 내일은 잘 되겠지 생각하면서 연습을 마쳤다. 10시반. 집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다음날 연주회 당일은 다행이 놀토라.. 지윤이가 학교를 안가니 늦잠을 잘 수 있었다. 2시에 장천아트홀에 도착. 3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리허설을 시작했다. 나는 여전히 평소처럼 옷을 입고 화장도 안하고 갔는데...;; 다들 예쁘게 무대의상을 차려입고 왔다. 난 관객에 대한 예의가 없는 인간이던가... 리허설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그냥 한 번씩 곡을 쭉쭉 연주하고 끝이 났다. 사실 그 상황에서 뭘 더 연습해 볼 수 있을까 싶기도... 파트별로 사진을 찍고 준비해 놓은 김밥과 과자로 배를 채웠다. 조금 수다를 떨다가 무대위의 내 자리로 돌아와 안되는 부분을 조금씩 연습했다. (결국 본 연주에선 안되는 부분은 계속 안되더라...ㅠㅠ)

관객들 입장을 위해서 무대 뒤로 들어갔고, 세컨파트만 모여서 튜닝을 했다. 모두 같게 한다고 한 분이 튜닝을 다 해 주셨는데...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 튜닝을 하는데 내 바욜의 e현 스트링에 작은 튜브가 끼워져 있는 걸 보고 튜닝을 해주던 분이 그거 없어도 된다고 얘길 한다. 헉.. 그거 없어서 브릿지 파였었는데 무슨 말을...;; 그냥 있어서 해놨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바이올린 실력이 모자라면 악기에 대한 상식도 모자란다고 선입견을 가지는 것 같아서 살짝 맘이 안좋아졌다 (어찌 소심한지...).

연주회.

6시가 되길 기다리다가 드디어 입장. 그리고는 연주.. 핀란디아는 그런대로 했는데, 브루흐는 몸이 좀 굳어 버렸다. 박자에 신경을 써서 그런가... 관객들이 앞에 앉아 있고, 가족들 아는 사람들이 저 앞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자꾸 잡념이 든다. 정신을 차리고 곡에 몰입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 인터미션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고. 심포니가 시작되었다. 어떻게 4악장까지 했는지 잘 기억이 안나지만 즐겁게 연주했던 것 같다. 전반부에서도 그랬지만.. 트레몰로 부분들에서 사람들이 너무 크게 연주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고...  군데 군데 리허설때 지휘자샘이 작게 연주하라고 했는데 너무 큰게 아닌가 싶은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연습할 때는 전혀 틀리지 않던 객원 트럼펫이 4악장 팡파레의 첫음에 멋지게 (!) 삑사리를 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으니 나는 갑자기 긴장이 풀려서 4악장을 나름 즐겁게 연주할 수 있었다..ㅎㅎ 그리고 준비했던 슬라브 무곡을 앵콜로 연주. 그것도 나쁘진 않았다. 관객들의 박수가 이어지자 지휘자님이 갑자기 핀란디아를 다시 하겠다고 하신다. 연주가 끝났다고 생각했서 긴장을 풀었다가 다시 연주하려니... 처음에 했을 때 보다는 잘 되질 않았다. 역시 적당한 긴장감이 있어야 연주가 잘 되는 모양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마지막 부분을 연주하고.... 드디어 연주회가 끝났다. 잘했는지 못했는지 감이 안왔는데... 지휘자님의 표정을 보니 그런대로 잘 한 것 같다.

연주회를 마치고.

서로 수고 많이 했다고 격려의 인사를 하고, 1층으로 올라오니 알파님, 웰백님, 도우님과 정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꽃다발을 준비해 주신 알파님과 맛있는 쿠키를 가져다 주신 도우님... 와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ㅠㅠ 조금 서서 이야기 하다가 가족들을 만나러 나갔더니, 벌써 집에 가버렸다. 흑.. 이야기가 길어지는데다가, 날이 추워서 먼저 가버린 모양이었다. 오늘은 그간 연습 때 참석하지 못했던 뒷풀이를 꼭 가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간 식구들을 따라갈 수도 없고... 뒷풀이는 가야겠는데, 뒷풀이 장소도 잘 모르겠고 (내가 일찍 집에 간 날 안내문을 나눠 줬던 모양이다), 어찌 어찌 기다리다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뒷풀이 장소로 향했다.

뒷풀이 장소에는 제일 첫 팀으로 도착했다. 자리에 앉고 보니 잘 모르는 사람들과 같이 앉게 되었는데, 정말 어색했다. 6개월이 넘게 같이 연습을 했는데, 이름도 잘 모르고... 한쪽 편엔 일본인 단원들이 (국제적인 오케스트라다...) 앉았는데, 영어로 얘길 하면 끼어들기라도 하겠는데, 일본어로 얘기하고 간혹 한국말로 이야기 하니 역시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음식도 거의 1시간이 다되어서야 나오고. 저쪽은 모두들 시끌벅적 재미있는 분위기인데... 음.. 역시 평소에 뒷풀이를 안갔더니 적응이 어렵다. 그나마 얼굴을 아는 세컨바이올린 사람들도 어디 있는지 잘 안보이고... 차라리 식구들과 저녁이나 먹으러 가거나, 멀리서 오신 알파님들에게 식사나 대접하러 갈껄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때마침, 삼일 OB들이 전화를 해서 오라고 한다. 낼 모레 미국을 가는 동료가 있어서 가보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이러저런 소감발표와 부상 수여가 끝나자 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풀이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이런 연주회를 준비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단원들의 도움도 별로 없이 혼자 여기저기 뛰면서 연주회를 준비했던 기획님, 총무님이 정말 수고를 많이 했다. 힘들었을 텐데 별로 내색도 안하고... 대단하다... 뒷풀이에서 소감으로, "오늘 지휘대로 연주해 주어서 감동했다"고 말씀하시던 지휘자님... 항상 참을성있게 (?) 밝은 얼굴로 이끌어 주시고... 정말 좋은 분이다...

Baby blues, postnatal blues 혹은 post performance blues

오랜 기간 준비했던 연주회도 끝나고 뭔가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어야 하는데... 집으로 돌아와서 한참 동안 정리가 안된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렸다. 일요일까지도 정리되지 않은 기분에 아무 것도 안하고 종일 있었다. "포미니츠"라는 독일영화를 한 편 봤는데, 머리가 정리가 안되어서 그런지... 영화가 이해가 안되어 굉장히 졸렸다...ㅡㅡ; 오늘 아침에 회사로 출근을 하면서 조금씩 머리 속이 개이기 시작한다.

아마 연주회가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뒷풀이에서, 왜 내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왜 오케스트라활동을 하고 싶었는지에 대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답과 다른 생각들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머리가 어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나는 나름대로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했었던 일인데 (일주일에 하룻저녁 시간을 꼬박 투자하는 일이 애가 둘인 직장인 아줌마에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연주에서나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느낄 수가 없어서 내심 괴로왔을 지도 모르겠다.

바이올린을 시작한지 2년 반. 그 중에서도 최근 한 1년반 정도는 바이올린과 합주활동이 생활에서 우선 순위에 있었다. 회사일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고... 뭐.. 늘 그렇고... 저녁이나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도 많이 희생했다.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즐기고자 했던 음악이 혹시나 너무 많은 자리를 차지하여 짐이 되버리는 것은 아닐까... 사실 계속 던져왔던 질문인데... 연주회가 끝나면서부터 내 머리 속을 떠나질 않는다.

일단, 11월은 휴식이니까... 쉬는 시간들을 즐겨 보자. 다른 일들도 하고, 밀린 일들도 처리하고... 그리고는 다시 나에게 즐거운 음악시간이 돌아 오길 조용히 기다려 보자. Back to the beginning....

2007년 11월 7일 수요일

악보들과 현들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악보를 구입했다. 가격이 무려 36,000원.... 갈라미안판으로 사라고 하셔서 ㅜㅜ 당분간 예당쪽으로 발걸음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인터넷으로 주문했는데, 대한음악사는 5만원이 넘어야 무료배송이라는 말에 혹하여 필요도 없는 악보를 두 개나 더 주문했다. 아끼겠다는 것인지 쓰겠다는 것인지... 참...

갈라미안판에는 바흐의 오리지날 악보의 복사본이 들어 있는데, 옛날 같으면 와~ 했겠지만... 이미 이 자필 악보들은 인터넷에 널려 있는 지라... 저것 때문에 가격이 더 비싼 거라면 살짝 억울하기도 하다.

칼플레쉬는.... 흐리말리와 카이저에서 헤매고 있고, 세브치크도 사놓고 할 시간이 없는 나로서는 역시 그저 "지름"일 뿐인데... 그래도 일단은 가지고 있고 싶다. 가운데에 있는 악보는 퀴즈를 좋아하는 분들을 위해 노코멘트로 남겨놓고...

사진에 같이 들어 있는 현들은 한 열흘 전에 주문한 것이 어제 악보들과 같이 도착한 것들이다. 사실 내가 쓸 목적이라기 보다는 필요한 분들에게 원가에 공급할 목적으로 산 것. 원래 가지고 있었던 에바피라찌현을 악장님께 넘기고 났더니 손단장님이 한 세트 구입해 달라고 하셨다. 주문하는 김에... 에바는 한 세트 더, 그간 계속 사려고 했으나 까먹어서 또는 실수로 사두질 못했던 찌간느도 한 세트, 그리고 a현만 유독 빨리 닳아서 인펠트 a현도 같이 주문했다. 관세없이 통관할 수 있는 가격인 15만원을 채우려는 쓸데없는 목적도 있었다. 아끼려다가 돈을 더 쓰는 케이스 2.

사실 연습을 많이 안하는 나로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오블리가토와 배달되어져 온 저 현들을 혼자 다 쓰려면 앞으로 몇 년은 더 걸릴 듯... 게다가 예비로 사놓은 e현들도 아직도 몇 개 남아 있는데... 얼른 넘겨야지...

악보에 현들을 주욱 꺼내어 놓으니 라라가 그 위에 어김없이 올라간다. 그거 니꺼 아니거든...ㅡㅡ;; 라라야~ 부르니 고개를 들어 나를 본다. 그 때 찰칵. 아침햇살에 라라의 눈동자가 샐쭉해져 있는데, 고양이 눈을 무서워 하는 분들에겐 좀 무서운 사진이 될 지도? ^^;;

도착한 악보 및 현들과 라라

2007년 11월 5일 월요일

연주회를 5일 앞두고....

지난 토요일 오후에 파트연습과 전체 연습이 있었는데, 못가고 말았다. 연주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인데다가 나는 지진아그룹이라서..ㅠㅠ 가능하면 모든 연습을 참가했어야 했는데..

오늘 아침에 날짜를 곰곰히 생각해 보다가 연주회가 이번 주라는 걸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레슨 받고 있는 곡들만 연습해도 시간이 모자라서 연주회 곡은 사실 집에서 거의 연습을 하지 못했었고... 더구나 그간 갑자기 공연들이 많아서 저녁에 연습할 시간도 많이 없었고... 이래저래 (물론 다 핑계지만) 연습시간이 많이 부족했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 당일치기에 돌입해야 할 시간이 돌아 온 것 같다...;;; 이번 주는 퇴근 후에 무조건 연습모드로 돌입해야 겠다.

지난 주 토요일 오전 레슨 이야기.

2주를 땡땡이 친 후 3주만에 가는 레슨이었다. 3주동안 더블 콘첼토 2악장을 한번이나 해봤을까...ㅡㅡ;; 배째라는 기분으로 레슨에 갔는데... 역시... 포지션이 홱홱 바뀌는데 어떻게 바뀌는지도 기억이 안나서 헤맸다.. 그나마 느린 곡이라 조금 나았지만...

선생님은 이 곡을 계속할 생각이 없으신 듯 다음에 무슨 곡을 하고 싶으냐고 물으셨다. 이 곡은 다음에도 또 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하시면서...  일단 스즈키 5권에서 몇 곡을 하고,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악보를 사두라고 하셨다. 헉... 스즈키 5권과 바흐 무반주곡들... 이건 수준이 너무 차이가 나는 것 아니던가..;;; 모차르트 협주곡을 할 생각도 조금 있으신 것 같고.. 비오티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아 해볼만 할 거라고 하시고... 이런 저런 곡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기대가 생겨서 좋긴 하지만... 좀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재미 있을 듯^^;;

2007년 11월 2일 금요일

[공연] 타펠무지크와 엠마커크비 2007. 10. 30

화요일. 나에게는 이 공연이 이번 바흐 페스티벌의 마지막 공연이다. 다음날 표를 취소해야 했기 때문에... 자리도 정말 좋았는데 말이다.

회사에서 공연 시간에 알맞게 퇴근해서 세종체임버홀로 향했다. 마지막 공연이라 여기서 구입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비록 언제 다 읽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신간인 크리스토퍼 볼프의 바흐전기도 구입했다. 일요일 엠마커크비의 공연에서 이미 그녀의 진수를 본 듯하여... 오늘, 나의 촛점은 캐나다의 타펠무지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였다.

단원들이 등장했고, 쟝라몽도 같이 등장했다. 조금 늦게 나오거나 할 줄 알았는데... 그리고 막바로 시작한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BWV 1066.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약간 빠르게 곡이 진행되었고 바로크 바이올린과 바로크 오보의 투명한 음색이 아름다웠다.

이어 등장한 엠마 커크비는 칸타타 "나의 행복에 만족하나이다"를 불렀다. 처음에는 목이 안풀려서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성량이 작게 느껴졌다. 이번 공연에는 가사의 번역문이 프로그램에 실려 있기는 했으나... 원문이 실리지 않은 것이 또 아쉬웠다... (왜 나는 가사를 찾아서 프린트해 갈 생각도 안하고는 계속 불평만 하는 걸까..)

인터미션이 지나고 BWV 1043이 시작되었다. 쟝라몽이 퍼스트 바이올린을 맡은 것은 프로그램에 나와 있어서 알고 있고 또 충분히 예상했던 바였는데, 전반부에 내심 궁금해 했었던 세컨 바이올린은 뜻밖에 세컨파트 맨 앞 인풀트에 앉아 있던 빨간머리 여자분이었다. 머리색과 마른 흰얼굴이 대조되어 마치 펑크족처럼 보였던 그녀는 쟝라몽과 더불어 앞에 나와 서 있었다. 아이슬린 노스키. 기량은 아무래도 쟝라몽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했는데, 외모에서 보여주는 느낌과 거의 비슷한 연주를 보여 주었다. 씩씩한 연주라고나 할까..;;;  특히 3악장은 몰아치는 듯한 열정적인 느낌으로 끝내어 관객들의 환호를 얻어 냈다. 살짝 과감한 연주라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재미 있었다. 바흐를 이런 식으로 연주한다면 초등학생도 지루해 하지 않을 듯... 내일의 사계도 이렇게 연주한다면 베니스 바로크의 연주만큼이나 신나는 사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어서 다시 엠마커크비가 나와, 웨딩칸타타인 "물렀거라 슬픔의 그림자여"를 불렀다. 나에게는 전반부보다 더 좋았다. 곡도 아름답고 흥미로왔다. 각 솔로악기들이 엠마커크비의 노래와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선율들을 엮어 내고 나는 잠시 황홀경에 빠져 들었다.

앵콜곡은 모두 3곡이 나왔다. 첫 곡은 커크비여사와 함께 커피칸타타.. 두번째와 세번째는 끝내려다가 관객들의 박수가 멈추지 않자 다시 나와서 연주를 했는데, 마지막곡은 전반부에 했던 칸타타의 곡을 다시 잠시 불러주었다. 엠마커크비는 노래를 계속해서 부를 수록 더 잘 부르는 것 같다... 끝으로 갈수록 더 좋다... (사실 일요일의 공연에서도 앵콜곡들이 더 좋았었다..)

나오면서... 엠마커크비가 나오는 공연을 둘 다 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니 다음날 공연을 못보게 된 것이 이 공연을 놓치게 된 것보다는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들기도 했다. (물론 다 볼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리고 사실 내가 소규모 오케스트라 합주를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흠흠..) 나에게는 멋진 폐막 공연이 된 셈이다.

Program

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更新 - 갱신과 경신

요즘 유가는 계속 오르고, 환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주가는 무슨 이유인지 또 계속 오르고 있다. 그래서 경제뉴스에서는 경신, 또는 갱신이라는 말이 연일 나오고 있는데, 이걸 경신으로 읽어야 하는지 갱신으로 읽어야 하는지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옛날옛날 학교에서 배웠는데 말이다...ㅡㅜ

그래서 네이버 국어 사전의 도움을 받아봤다.

갱신



경신


즉, 주가, 유가, 환율 등의 경제지표에는 갱신이 아니라 경신을 써야 하고, 운전면허증이나, 임대차계약을 바꿀 때에는 갱신을 써야 한다는 것... 그런데 왜 같은 한자를 두 가지로 읽어야 하는 걸까?

[공연] 엠마 커크비, 야콥 린드베리 2007.10.28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어찌하여 마지막에 표를 한 장 더 구할 수 있었다. 도윤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지윤이와 같이 공연을 보면 가능할 것 같았다. 비록 자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공연이 시작되고 전반부가 끝날 때까지 나는 뒷쪽 자리에 지윤이는 내가 원래 예매했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인터미션에 지윤이 뒷자리의 여자분이 오더니 자리를 양보해 주시겠다고 한다. 정말 괜찮다고 했지만, 아이가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영 마음에 걸리시나 보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는데... 거절하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그 분 덕에 후반부는 지윤이와 바로 앞뒤에 앉아서 공연을 볼 수 있었고, 무대에서 보다 가까운 좋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사람이 무척 많았다. 거의 매진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크로스오버 성악을 하는 임형주던가.. 그런 사람도 보였고... 몇 시간 전에 영산아트홀에서 연주했던 존 버트도 보였다. 시간이 되자 커크비와 린드베리가 나왔다. 10현류트인 것으로 보이는 류트를 들고 나온 린드베리와 커크비가 잠깐 마주보더니 바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올페우스 - 다울랜드와 퍼셀. 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연주회. 그들은 전반부에 다울랜드의 서정적인 곡들을 연주했다. 한 두곡을 빼고는 모두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곡들인 것 같았다. 제목과 간략한 곡 해설이 프로그램 책자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성악 연주회에 가사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중간에 류트 솔로가 두 곡 정도 들어가 있었다. 엠마 커크비는 음반에서 듣던 것처럼 바로 그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했고, 중간의 몇 곡은 일어서서 마치 오페라를 하는 것 처럼 제스처를 쓰며 노래했다. 후반부는 퍼셀의 곡들. 다울랜드의 곡들 보다 더 귀에 익은 곡들이었다.

정말 넋을 잃고 듣고 있노라니 순식간에 공연이 끝났다. 류트도 매력적이었지만, 커크비의 목소리가 주는 흡인력이 대단했다. 정말 고음악에 맞는 목소리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창법도 일반적인 오페라나 성악가수들과는 달리 단순했다. 그것이 그녀의 음악을 청아하게 들리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은 열광했고, 류트와 소프라노의 듀오는 앵콜을 3곡 들려주었다. An Evening Hymn을 부르겠다고 이야기했을 때에는 관객석에서는 기쁨의 탄성이 나왔었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연주에 집중하고... 이어지는 Farewell unkind, farewell은 본 연주보다 앵콜이 더 좋았다^^

30일에도 엠마 커크비를 만날 수 있다. 타펠무지크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커크비를 다시 만나는 것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긴 했지만.... 그녀의 공연이 무척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다..  (불행히도 31일 공연은 오늘 티켓링크에 전화해서 취소해야만 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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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7/10/29/0200000000AKR20071029143800005.HTML

[공연] 존 버트 오르간 독주회 2007.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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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바흐페스티벌의 일환이었던 연주회. 1960년생이라는 존 버트는 무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무슨 이야길 하는가 했더니, 오늘 연주할 곡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영국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렉쳐를 할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했던 지라 상당히 놀랐었다. 내용은, 프로그램 책자에 쓰여 있던, 버트 본인이 작성한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버트는, learner, teacher, performer, composer로서의 바흐의 모습을 발견해 보라는 말로 설명을 마치고는 오르간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영산아트홀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것은 보았지만, 그 오르간이 연주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파이프오르간은 교회 이외의 장소에선 직접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교회가 아니어서 그런지, 울림은 덜한 듯 했다. 지금까지 바흐페스티벌의 고음악 공연에서 상대적으로 음량이 적은 악기들만 듣다가 갑자기 큰 오르간 소릴 들으니... 오르간이 매우 현대적인 악기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버트는 다양한 오르간의 음색을 보여줬다. 곡마다, 또 악장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오르간의 음색은 오르간이라는 악길 잘 모르는 내게는 마치 신기한 전자악기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바흐의 오르간 곡들은... 오르간이야 말로 바흐가 그가 가진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줄 수 있었던 악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도 만들었다. 내가 앉은 2층 윗쪽 좌석에서는 버트의 손가락과 건반이 너무나 잘 보였는데, 오른손과 왼손 그리고 발로 연주되는 부분들이 각기 다른 3개의 악기가 연주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거이상 화려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곡부터 매우 성스럽게 느껴지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곡들까지... 약 1시간 반동안의 연주회에 불과했지만, 버트는 바흐의 오르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연주될 수 있는지,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어지는 박수와 환호에 버트는 두 곡의 앵콜을 더 연주했는데, 역시 어떤 곡인지 설명을 해주었다. 첫 곡은 프렐류디엄과 푸가. 작품번호까지 또박또박 불러 주었다. 두번째 곡은.. the piece I am able to play is the 1st movement of 5th sonata, C major again이라고 말해 주었다. 두번째 곡이 더 좋았다.

악기 탓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버트가 BWV594의 카덴차부분을 연주할 때 손가락이 건반을 건드리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었다. 내가 너무 악기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버트가 발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버트의 구두는 어떤 것일까도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였다^^ 또,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매우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일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친절한 설명들도 그랬지만, 페이저터너가 악보를 넘길 때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하거나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하는 모습도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

원래 연주회 티켓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예매를 취소하려고 했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가 끝나고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세종 체임버홀에서의 저녁연주회엘 갔었는데, 그 곳에 버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첫번째 열의 끝쪽에 앉아 진지하게 엠마커크비와 린드벨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싸인을 받을 걸 그랬나.. 살짝 후회가 들기도 한다^^


Program

2007년 10월 28일 일요일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다녀온 뮤직캠프

원래 2박 3일의 일정으로 계획되어 있던 뮤직캠프이지만, 금요일 퇴근 후 출발해서 일요일 낮에야 돌아오는 그 일정은 나에게는 아무래도 무리여서, 나는 토요일 아침 일찍 떠나서 밤에 연습이 끝나면 돌아오는 편을 선택했다.

토요일 아침이라 길에 차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7시50분에 다른 단원 두 분을 같이 태우고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길이 많이 막혔다. 알고 보니 이번 주에 단풍 놀이객이 엄청났다고 한다. 그 많은 단풍차량 덕에 우리는 예정된 연습시간 보다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10시 경부터 시작하여... 브루흐 연습 약 1시간 가량. 드보르작 1, 2 악장을 점심 전까지. 점심먹고 조금 쉰 후, 파트연습 2시간 - 역시 드보르작. 4시부터 다시 드보르작 3, 4악장. 6시에 저녁을 먹고 또 약 1시간 쉰 후, 단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앙상블의 작은 연주회. 8시부터 다시 드보르작 전악장을 연주. 앵콜곡으로 예정된 슬라브 무곡 악보를 받고 약 9시반까지 연습.

11시정도까지 연습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관 파트분들의 입술이 부르터서 더이상 연습이 곤란하다고 하여 생각보다 일찍 연습을 종료했다. 프로그램 곡 중 하나인 핀란디아는 아예 해보지도 못했는데, 아마 다음날 아침에 연습을 했을 것 같다.

드보르작에 집중한 하루... 결론적으로는... 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 것인가는 부분은 그동안의 연습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설명도 되고 이해도 되었으나... 개인적인 테크닉도 부족하고, 연습도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혼자 연습할 시간도 부족하고, 집중도 잘 안되는데 이렇게 모여서 같이 연습하니 도움이 많이 된다... (연주회날까지 안까먹어야 할텐데..)

뮤직캠프 장소인 베어스타운에는 처음 가봤는데, 오래된 콘도라 시설은 별로 좋진 않았지만, 손님들이 많지 않아 오케스트라 뮤직캠프 장소로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여러가지 준비한 기획님이 고생을 많이 했을 듯... 음악을 사랑하고,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싱글이었다면 전 일정동안 같이 지내면서 사람들과도 좀 가까와지면 좋았을 텐데... 조금은 아쉬웠다.

아빠의 사진기와 트랜지스터 라디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큰오빠가 언제인지 찍어놓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진을 보니 옛날 아빠가 가지고 계시던 것이 생각났다. 물론 가운데 있는 니콘은 아빠 것은 아니고... 작은 오빠 카메라던가..?

[공연] 피에르 앙타이 쳄발로 독주회 2007. 10. 26

바흐 페스티벌 공연 중 두번째 관람. 뛰어난 하프시코드 연주자 피에르 앙타이가 온다는 소식에 예매를 안할 수가 없었다. 원래는 27일 공연을 보려고 했으나, 뮤직캠프 때문에 26일 표를 예매했던 어느 분과 표를 교환했다. 사실 프로그램 자체는 26일 것에 더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잘 된 일이었다. 바흐까지 건반악기의 역사적 흐름을 훑는 듯한 곡들로 구성되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하프시코드 연주는 종종 봤지만, 늘 오케스트라 또는 실내악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되는 것이 었기 때무네, 하프시코드만의 독주회는 처음이었다. 작은 홀, 가까이에서 하프시코드의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악기는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고, 홀이 작았슴에도 불구하고 악기의 소리가 별로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프시코드는 소리도 작고, 역시 강약의 구별이 두드러지지 않는... 그리고 단조로운 음색을 가지고 있는 악기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 악기가 독주악기로 쓰이는 음악들보다는 오케스트라와 어우러 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세상에는 하프시코드가 들어가면 100배쯤 아름답게 들리는 관현악곡들이 잔뜩있다. 그러나, 역시 독주만으로는 지나치게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앙타이는 이 악기가 매우 흥미로운 연주를 들려 줄 수 있는 악기라는 생각이 드는 연주들을 들려 주었다. 그의 연주는 영국의 오래된 작곡가들의 곡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오래된 음악들은 화려한 장식음들이 고풍스러운 선율과 어우러지면서 그의 손가락을 통해 신선한 느낌을 주는 현대의 연주로 바뀌어 지고 있었다. 쿠퍼랭의 곡은 얼마 전 타로의 연주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프랑스 사람인데, 앙타이의 쿠퍼랭은 몰랑했던 타로의 쿠퍼랭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음악이었다.

그가 쉬지 않고 8곡이나 연주한 스카를라띠의 소나타는 (물론 단악장으로 구성된 짧은 곡들이긴 하지만) 음반을 구입하고, 악보를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흥미로운 연주였다. 빠르고 화려한 곡들이 나오는가 하면 느리고 서정적인 곡이 나왔고, 특히 마지막 소나타는 불협화음이 놀랄만큼 많이 쓰여서 굉장히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이어지는 이탈리안 콘체르토도 생동감이 넘치는 연주였다.

앙타이는 예정된 프로그램의 전반부에 바흐의 푸가와 프렐류드를 더했고, 후반부엔 5개를 연주하기로 했던 스카를라띠는 8곡을 연주했으며, 이어지는 박수에 앵콜을 3곡이나 연주했다. 7시반에 시작된 연주회를 마치고 나오니 10시. 독주회로는 이례적으로 긴 연주회였다.

앙타이는 의자에 상당히 어정쩡하게 앉아서 연주했고, 무대에서 인사를 할 때에는 약간 삐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7시반 연주회인데 5분전에서야 관객들을 홀로 입장시켰고, 들어가서는 방송멘트 뿐 아니라 직접 관계자가 나와서 전화기 등 소음을 내지 말라고 부탁을 여러번 했었으며, 연주는 관객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후에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조명기사가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앙타이의 요구가 까다로왔는지 모르겠지만, 홀의 조명은 전반부 내내 왔다갔다 했고, 프로그램에 바흐가 추가되었는데도 불을 환하게 켜 버려서 앙타이가 바로 연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무엇때문에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주를 듣는 동안 앙타이가 까칠한 것인지 아니면 공연장 측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주 궁금했었다.

인터미션 때 무대로 가까이 가서 악기를 좀 봐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나는 인터미션이 시작되자마자 홀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나왔다가 다시 제정신이 들어 다시 홀로 들어갔는데, 앙타이는 도로 무대로 나와 열심히 튜닝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가져온 악기인지, 국내에 있는 악기를 빌린 것인지... 한 음 한음 튜닝을 하고 있는데, 그 쪽으로 다가가서 악기 구경을 하기는 좀 민망해서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인터미션에 자리에 남아 있던 관객들은 그의 튜닝하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사진을 찍어 대기 시작했다.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는 한 두장 쯤은 이해를 할 수 있겠는데... 플래쉬가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하자... 정말 짜증이 났다. 어떻게 튜닝하는데 저렇게 할 수가 있나 싶은 생각에 공연장 관리자에게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던 차에... 입구에 서있던 아가씨가 들어와 제지를 하기 시작했다.

앙타이는 스카를라띠 소나타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전에 잠깐 한 두 음을 다시 튜닝했다. 보고 있노라니.. 하프시코드 튜닝에 대해 좀 알아 보고 싶어졌다....

또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앙타이의 악보.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암보로 연주하고, 일부는 악보를 가지고 나와서 연주를 하기도 하지만, 소위 '클리어 파일'이라고 불리우는 비닐로 된 파일에 악보를 넣어서 들고 나오는 연주자는 처음 봤다. 사실 나는 종종 악보를 인쇄하거나 복사해서 클리어파일에 넣어 놓고 쓴다. 하지만 무대에 그런 악보를 들고 나가면 조명 때문에 상당히 보기가 어렵게 될 것 같다.. (앗... 그러고 보니, 그래서 홀 조명이 그렇게 왔다갔다 했던 걸까? 앙타이는 악기에 별도의 조명도 부착했던데...;;;) 또 보통 연주자들은 인쇄되어 나온 책을 쓰기 때문에 그런 파일을 이용하는 것인 좀 특이해 보이기도 했다.  특별히 최근에 출판되어진 악보를 쓰는 것이 아닌 이상에는 저작권에 문제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하여간 특이했다.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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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nico Scarlatti (1685-1757), Sonatas K535 and K371
<-- 동영상을 가장한 음악파일

(유튜브에는 앙타이의 유명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가 올라와 있기도 하다. )

관련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0/29/2007102900025.html (다음날이었던 세종체임버홀에서의 공연에 관한 기사와 사진)

2007년 10월 26일 금요일

[번역] 예외들의 초상: 난넬 모차르트, 파니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

Portraits of Anomaly:
Nannerl Mozart, Fanny Mendelssohn, Clara Schumann

Connie Sunday © 2006
(Women's Studies essay on the lives of three eminent women in music)
"여성의 교육은 항상 남성에 상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즐겁게하고, 우리에게 유용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만들어야 하고, 어린시절에 우리를 교육해야 하고, 성장했을 때는 우리를 돌보아야 하며, 충고하고, 위로하고,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것 -- 이것이 전 시대를 통틀어 여성의 의무인 것이고 그들이 유년기에 배워야 할 것들이다" 루소

"100명의 훌륭한 여성 작곡가들 중에서, 합리적이고 좋은 아내, 세심하고 유능한 주부, 그리고 사려깊은 어머니로서의 모든 의무를 동시에 만족시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요한 캠페 (Johann Campe)


우리들의 문화를 점검하고 성 정체성에 대하여 비교 문명적인 비교를 하면, 우리는 이제, 약 10년전까지는 남성의 편견이 거의 모든 질서의 문헌들을 "특징지우고" 있었슴을 알 수 있다. 특정한 극도로 비정상적인 예외들을 제외하고는, 여성은 가족 구성원을 생산해낸다는 기능으로 말미암아, 핵가족 안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온실" 그리고 집안의 영역의 존재로 격하되어 왔었다. 남성들은 문화의 지배자들이었고, 남성적인 세계관이 압도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주변의 인물로 보여졌으며, 남성들이 대표하고 있는 체제에는 위협이었다. 권력은 남성의 손에 있었고 여성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 글에서, 나는 3명의 예술가들이 어떻게 그들의 인생 궤도를 통하여 사회적인 편견이라는 쉽지 않은 바다에서 어떻게 항해했었나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것이다.

여성들은 중세시대부터 작곡을 해왔으나,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언론의 인정과 더 많은 청중과 더불어 여성음악가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남성과 관련이 있었던 영역에서 여성이 가장 많은 참여도를 보여 준것은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인 조류가 가져다 준 결과이며 특히 피아노의 발명의 결과이기도 하다. 솔로와 실내악 작품 (특히, 가곡 또는 노래)의 분위기는 여성들이 연주자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집안이라는 공간과 편안하게잘 맞았다. 이는 큰 규모의 작품이 연주되던 공공장소의 경우와 대조적인데, 그 곳에서 오페라, 종교음악, 관현악 음악들은 점잖은 여성들에게는 금지되어졌었다. 19세기의 여성의 창조적인 성취 - 주로 가곡에서 - 는 남성 작곡가들과 비교하여도 우수한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몇몇의 작품들은 이 시기 최고의 작곡가들에 필적할 만하다.

여성들은 직업적으로 자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여성도 바흐가 했던 역할을,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작품을 작곡해야 하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성 바흐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의 음악학에서는 전통적인 주류에서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것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학의 본성이 문헌들 (여성들의 음악에 대한 문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나, 가장 진보적이고 음악 유형의 변화를 이끌어갔던 예술가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그 곳에서 (금세기까지) 여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적인 편견은 1750년 -1900년까지 여성음악천재가 결핍되어 있었던 이유의 중심적인 요소이다. 18세기에는, 여성들은 배울 수 있는 지적, 감정적인 역량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여성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며 여성으로서의 진실한 직업인 아내와 엄마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믿어졌었다. 모세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은 그 시대에 계몽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생각되어졌지만, 그의 약혼녀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적당히 배우는 것은 숙녀를 만들지만, 학자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눈이 충혈될 정도로 독서를 하는 소녀는 웃음거리가 되어 마땅하지요."

여성들은 에스코트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허락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주회를 여는 것은 어린 소녀의 품행이나, 성격에 위해가 된다고 생각되어졌다. 이는 소녀들이, 명성을 얻기 위하여 필수적인, 도움을 줄 수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파니 멘델스존은 19세기초에 가장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재능이 있는 가문들 중의 하나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32세가 될 때까지 대중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작곡은 출판되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여성들은 그들의 작곡을 과소평가하였고, 계속하기 위하여는 과도할 만큼 칭찬을 받아야만 했다.

여성들의 활동범위와 성취가 집안일로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업적인 교육은 부족했다. 여성이 교육을 받을 때에는, 높은 수준의 교육과 부정적인 사회의 태도 사이에 날카로운 불일치가 있었다. 여성의 일은 전문가의 눈에는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여성이라는 것은 아마추어라는 것을 뜻했고, 딜레땅띠즘의 분위기가 여성들의 작품에 대한 토론에는 항상 함께했다. 여성들은 그들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보조하는 것이나 집안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순화시켜야만 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매력적인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양보해야만 했던 것이 전체 여성들에게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스스로를 부양하려는 필요는 여성의 일에 대한 권리와 직업을 가질 권리의 문제를 경제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변화되었다.
 
19세기 중에는 충분히 교육받은 소녀들이 여성스러운 부분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희곡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그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와 18세기의 새로운 운동 중의 하나는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여성 음악학도들은 집에서 개인교습을 받거나 또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수녀가 되곤 했다.) 여성들은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거장음악기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같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여성들은, 주로 가수들인데, 하층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었다.

Nannerl Mozart모차르트에 대한 기록에서는 어떤 것도 그의 능력있는 누이인, 난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난넬은 어린 천재 남동생과 그들의 부모와 같이 3번의 유럽 순회연주에 동반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기록에서는 항상 재능있는 누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소녀 난넬의 재능은 보통은 기록되어져 있다. 그녀가 부모와 남동생과 함께 했던, 런던과 파리를 포함했던 3번째 서유럽 여행에서 (1766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리드리히 마이콰이어 그림(Friedrich Meichoir Grimm) 남작은 그녀가 피아노를 뛰어나게 연주하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작품들을 놀랍게 정확하게 연주한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남동생에 결코 못지 않은 초기의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로브 음악사전의 다음의 비극적 문장은 사람들의 감적을 자극한다: "1769년부터, 난넬은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오로지 집에서만 보여주도록 허락받았다." 그녀는 18세였다. 그녀의 남동생이 작곡가와 연주의 거장으로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와 같이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33세였을때 그녀는 성 길간 (St. Gilgan)의 판사와 결혼했다. 세 아이를 낳고, 남편이 사망한 후에, 그녀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피아노 선생으로서 단순하고 평온한 인생을 살았다. 사람들은 위대한 모차르트의 누이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했다. 1839년, 그녀가 사망하던 해에 그녀는 가난과 외로움으로 눈이 멀고, 기운이 없었고, 지쳤으며, 약해져서 거의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작곡에 손을 대었고 그 작품들은 남동생이 인정할 만한 것들이었으나, 그녀의 작품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역 그녀가 진실로 그녀의 유명한 남동생만큼 능력이 있었다면 난넬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 아마 모든 시대를 통틀어 뛰어난 음악천재가 되었을까? 남매는 각자 결혼을 할 때까지 가깝게 지냈고 그녀의 일기와 편지는 모차르트 가족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문헌들인데, (이러한 난넬의 삶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니 멘델스존은 이러한 Fanny Mendelssohn궤도에서 좀 더 발전된 예인데, 그의 남동생에 필적할 만한 음악적 재능을 일찌기 보여 주었고, 동생처럼 베르거(Berger)와 젤터(Zelter)에게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는데, 그 때 그녀는 남동생과 동등한 수준이었다고 알려진다. 옥스포드 사전은 그녀를 두 번 모욕했는데, 한 번은 그녀가 "거의 그녀의 남동생만큼이나 훌륭한 피아니스트"라고 언급했었고, 또 그녀를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라고 칭했었다.

파니 멘델스존은 직업적인 음악가가 되는데 반대하는 그녀의 아버지의 완고한 훈계와 그녀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집안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작곡을 계속했다. 펠릭스는 그녀를 작곡가로서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었으나,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의 남동생이라는 것을 그는 자랑스러워 했으나, 전반적으로 지지하지 않게 되면서 더이상 자랑스러워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진지한 작품의 출판만을 고려해요... 그리고 인생 전부를 작가로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파니는.... 작가를 하고 싶어하지고 않고, 천직으로 삼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런 면에서 너무나 여성적인데, 그것은 적절한 것이지요. 그녀는 가정을 돌보고 있으며, 우선적인 주부로서의 일을 하고 나서가 아니면 대중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음악세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출판을 한다는 것은 그녀가 이러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고, 저는 이런 점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만약 그녀가 스스로 출판하기로 결정하거나, 또는 헨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말했듯이, 저는 가능한한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떤 것을 하도록 그녀를 격려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파니는 포괄적인 교육을 통하여 세상에 대한 깊이 있고 통찰력있는 이해를 가질 수 있었으나, 그리고 나서는 교육받은 것을 실행하고 바로 그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인당했다.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에게 음악은 장식일 뿐이고 그래야만 한다. 너는 진정한 너의 천직 - 젊은 여성들에게는 유일한 천직 -을 위하여 성실히 열심히 준비해야만 한단다.  그것은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란다." 펠릭스의 승인과 지지로 그녀는 작곡한 200곡이 훨씬 넘는 의 리트를 출판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반복적으로 그녀가 직업적인 작곡가가 되는 것이나 그녀의 작품을 출판하는 것을 반대했다. 여성 리트 작곡가들 대부분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1775년에서 1850년까지 이루어 낸 업적은 훌륭하고 존경받을만 하며 진지한 학구적인 연구, 출판 그리고 연주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녀가 24세에 화가인 헨젤과 결혼했을 때, 펠릭스는 이미 작곡가와 지휘자로서의 길을 전도양양하게 시작한 후 였다. 그녀는 남동생의 성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지만 그녀의 삶은 "집에서의" 음악에 바쳐져야만 했다. 일요일에 베를린에서 가족들과 음악회를 하는 것이 고립되어 음악을 하던 그녀에게 단 하나의 출구였고, 그녀는 스스로의 작품들을 작곡하고 지휘할 수 있었다. 빌헬름 헨젤은 그녀를 격려하였으나, 펠릭스는 작품이 출판되어 알려지기를 바라는 누이의 희망과, 제한적으로 대중들을 접하는 것이 그녀의 작품과 자존심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창작품에 대하여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거나 아주 조금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작품들에 대한 모든 기쁨 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의 가치를 판단할 힘까지도 잃게 된다."
파니의 초기 작품들 중 3곡은 펠릭스의 Op.8과 9에 포함되어서 출판되어졌는데, 그녀가 작곡한 이중창은 그 모음곡 중에서 최고의 것이었다("An des lust-gen Brunnes Rand"). 이 초기 작품들은 남동생의 작품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개성적인 특징과 표현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녀는 하나의 서곡과 5개의 오케스트라 부분을 포함하는 성악곡도 작곡하였다. 그녀의 작품 대다수는, 대규모의 칸타타들과 오라토리오를 포함하여, 출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은 감상적인 살롱음악과 요점없는 기교만 있는 음악의 양극단을 피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 이런 노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두 명이 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이었다.

Clara Schumann클라라 비이크 슈만은 그 세기에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가졌던 사람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 그녀에게 일어났었을 지도 모르는 일들은 먼저 일어났던 위의 두 이야기들로 이미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클라라 슈만이 그들과 가지는 공통점은 위대한 예술가와의 관계 또는 교육이다. 모차르트가의 아이들에게는 레오폴드가 있었고, 파니는 주변의 환경이 모두 훌륭했었으며, 클라라에게는 교육자로서의 재능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의 아버지가 있었다.

비록 그녀의 남편 로베르트에 뮤즈의 역할을 한 것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클라라 슈만은, 당시 유럽 사회가 일반적으로 여성의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두드러지는 성공을 얻었고, 그 시대의 음악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 세기의 천재적으로 위대한 음악가와 교육자의 한사람으로서 그녀는 개인적인 그리고 음악적인 영역에서 많은 혁신을 가져왔다. 그녀가 집을 떠나 모험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심한 과소평가이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하였을 때,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그녀는 더 많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녀는 7명의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그녀가 9살 때 시작했었던 전문 연주가로서의 삶을 택했다.

그녀는 앞에 악보를 두지 않고 리사이틀을 했고, 보조해주는 음악가들 없이 연주를 했던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즉, 현대의 연주처럼) 그녀의 선곡과 수준은 솔로 피아노 리사이틀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녀는 파가니니, 리스트, 탈베르그 그리고 루빈스타인의 동료였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 그리고 그녀의 남편의 작품과 그녀를 사모했던 젊은 브람스의 작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홍보자였다. 그녀는 세련된 연주를 통하여 당시에 거슬리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베토벤의 음악을 대중화시켰다. 그녀의 연주회들은 매진되었었고, 그녀는 어디에서나 열렬한 환호, 따뜻한 리뷰, 선물들 그리고 존경 속에서 맞아들여졌다. 여전히 그녀는 작곡가로서의 역할을 우선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이미 로베르트가 나에게 적어준 Ruchert의 시로 (곡을 쓰려고) 몇 번 시도를 했다. 그러나 잘 되질 않았다 - 나는 작곡에는 전혀 재능이 없다."
그녀의 국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전기들에서 그녀는 자주 종속적인 - 또는 수치스러운 -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 본격적인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존엄성을 얻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삶에 대한 많은 세부사항들은 얼버무려져 있고 생략되어 있으며 서신들은 요약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다른 어떤 연주자도, 남자건 여자건 간에 그 만한 시간동안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유지해 온 사람은 없었는데, 그녀는 영국과 유럽에서 1,300회가 넘는 연주회에서 연주했다. 그녀의 동시대 여성들 대다수는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반짝이는 데뷔와 빛나는 외모로 시작하곤 하지만, 결혼할 무렵 또는 압력이 너무 강해진다고 생각될 즈음에는 연주생활을 포기하곤 하였다. 클라라는 그녀 자신의 연주들을 관리하는 일도 떠맡았었다. 피아노들을 빌리고, 이동시키고 조율하게 했으며 홀, 조명, 난방들을 준비시켰고, 티켓을 인쇄하고 신문과 포스터에 광고를 실었으며 스스로의 의상을 준비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했고, 그녀의 특별한 재능을 교육의 덕으로 돌렸다. 1816년에, 그는 잘 알려져 있고 성공한 플루티스트의 손녀인 마리안느와 결혼했다. 그는 클라라의 어머니가 딸의 재능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으나, 그녀는 비범한 가수이자 피아니스트였다. 비이크 부부가 이혼했을 때, 클라라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분이 좋을 때에만 아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아이들은 아버지의 소유라는 색슨 법률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성공적으로 그녀를 신동으로 훈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작품, 물리적인 훈련, 연주회 관람 그리고 훌륭한 음악가들과의 만남이라는 그의 교육프로그램은 클라라의 여동생에게도 역시 사용되어졌다), 그는 그녀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매우 심하게 대응했다. 그녀와 로베르트 슈만은 이 문제를 법정에까지 끌고 가야했다. 그들이 승소하여 결혼을 허락받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수입으로 된 저금을 모두 앗아가고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해야하는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둘 다 그녀가 그 주변의 일상적인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녀의 일기에서: "나의 역할은 로베르트가 작곡을 하고 있을때 항상 그렇듯이 밀려있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하루에 한 시간도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녀 자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7명의 아이들과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던 남편 때문에, 그녀는 35세에 그녀의 연주활동을 재개했다. (로버트: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 냈소. 당신은 동료를 데리고 갔고, 나는 아이들과 나의 작업으로 돌아갔소.") 그녀는 그녀 자신을 먼저 예술가로 여겼고, 부모의 역할은 두번째였다. 여행 중에, 아이들은 가족의 친구들, 조부모들 또는 기숙학교에 맡겨졌다. 그녀는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썼다. 맏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후 그는 가족들의 만남(종종 여름내내)이나, 연주 여행을 주선하고, 교습약속을 잡는 일을 도맡았다. 그들의 14년간의 결혼생활동안, 그리고 8명의 아이들 (하나는 아주 어려서 죽었고, 유산이 한 번 있었다)을 낳는 동안, 서로가 화내고 싸웠다는 이야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사회적인 편견이 이들 세 명의 천재 여성들에게 가하여 져서 그들을 예외적인 위치에 놓이게 했던 각각의 상황의 종류를 이 간략한 전기글이 설명해 주었기를 바란다. 그들의 노력에는 희망적인 것이 있다. 이 삼부작에서 각각의 사람들은 그 이전의 사람들보다는 성공적이었다. 확실히 미래의 여성들은 이러한 추세를 계속해 나갈 것이고, 여성들이 사회에서 예술가로서 덜 예외적인 존재로, 더 많이 받아 들여지게 됨에 따라, 더 평등한 교육적이고 음악적인 기회의 배분으로 부터 혜택을 받을 것이다.  

주석 및 전기, 대표작품은 다음의 링크 참고:
원문 출처
또다른 출처 - pdf 다운로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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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찾아 보고 번역하려는 생각은 파니 멘델스존에 대한 DVD - Requiem for Fanny - 를 보고 나서 들었다. 20세기.. 아니 거의 20세기 후반에 이를 때까지 여성 음악가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연주가들은 종종 있었으나, 여성 작곡가는 정말 찾아 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 중에서 알려진 세 명의 인물이 바로 위의 난넬 모차르트, 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이었고, 나는 이 들 세명, 그리고 더 나아가 알려지지 않은 이전 시대의 여성 음악가들에 대해 알아 보고 싶어 졌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윗 글은 정말 "개론"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더 많은 연구들이 존재하고 진행 중인 것 같다. 클라라나 파니의 경우에는 곡이 남아 있어서 그녀들의 작품이 어떠했는지 알아 볼 수도 있다. (난넬의 경우에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심지어 위키피디아에만 가도 위의 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정보들이 있다... 나중에 한 명씩 집중탐구를 해보면 재미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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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5일 목요일

테헤란밸리 오케스트라 2007 가을 정기 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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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 2007년 11월 10일 (토요일), 늦은 6시

2. 장소 : 강남구 압구정동 광림교회 옆, 장천아트홀

3. 곡명 : Jean Sibelius Finlandia, Op. 26
             Max Bruch, Romance in F major for Viola and Orchestra, O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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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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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vorak, Symphony No. 8 in G Major Op. 88

2007년 10월 22일 월요일

[공연] 나이젤 노스 류트 독주회 2007.10.19

 John Dowland "Earl of Derby, his Galliard"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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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바흐페스티벌의 개막공연격으로 준비되어진 공연이었다. 18일에는 바흐의 곡으로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었으나, 목요일은 오케스트라 연습을 가야하기 때문에 예매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결국 오케스트라 연습도 못하고 해외에서 온 두 아줌마들과 더불어 저녁을 먹어야 했었다...ㅠㅠ

금요일.. 역시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압력에도 배째라고 하고는... 금호아트홀로 향했다. 몸살 덕분에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면서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단순하고 청아한 류트의 소리가 약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공연장으로 차를 몰았다.

노스는 처음에는 르네상스 류트를 들고 나왔다. 현의 숫자는 10현보다 많아 보였는데 15현 (8 course?)인지 잘 모르겠다. 존다울랜드와 발레, 로버트 존슨의 곡들이 류트를 타고 흘러 나왔다. 류트의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무척 아름다왔다. 인터미션에 몸살약을 사러 나갈까 했는데, 바람이 너무 차서 그냥 다시 들어왔다. 노스는 이번엔 현이 더 많이 달린 바로크 류트 (위 사진에 있는 것과 동일한 류트)를 들고 나왔다. 아마 24현 류트 (13 course)인 것 같았다. 2부의 두번째 곡인 로지 백작을 위한 똥보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처음 듣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류트라는 악기가 그토록 감성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어지는 소나타도 정말 좋았다. 나에게는 1부의 곡보다는 2부의 곡이 더 소리도 아름다왔고 곡도 좋았다. 바흐시대의 류트곡 작곡가인 바이스의 곡들.. 단조로와 보이기만 하는 류트에서 노스는 매우 다양한 음색을 뽑아냈고, 류트는 노래하고, 반주도 하고, 다양한 화음을 보여 줄 수 있는 너무나 멋진 악기임을 증명해 주었다.

노스는 앵콜로 바흐의 첼로 모음곡 1번에 들어 있는 곡을 연주했다. 어제의 연주회가 어땠을지 짐작이 가게 하는 곡...

공연장에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는데, 금호아트홀이 소규모의 홀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3번째 줄이었는데도 사람들 때문에 무대가 가려져서 가끔은 잘 보이지 않을 때고 있었다. 내 주위에는 네이버의 모 클래식 동호회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던 듯 한데... 옆엣분이 책상에 프로그램을 펼치고는 공연 내내 무언가를 계속 노트하고 있었더랬다... 뭘 적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류트의 튜닝시간에 내내 들려오던 라디오 방송 진행자의 멘트도 좀 신경이 쓰였고... (아예 안들리게 작게 하던지, 아님 다 들리게 크게 하던지...;;) 노스의 앵콜곡 종료에 딱 맞추어 울려 퍼지던 핸드폰 소리도 인상적...;;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 안좋았던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있었던 연주회였다.

http://www.nigelnorth.com/index.html

Program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책] 더 나은 삶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 - 오래된 정원

이 책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상하권 두권을 사왔었다. 그러니 이 책들은 꽤 오랫동안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거의 7년간 나는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제목이 무엇이건 내용이 무엇이건 나는 황석영의 소설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의 글은 1987년, 내가 고3이던 그해 여름부터 긴 시간 동안 나를 지배했다. 80년 5월 광주항쟁의 기록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고 나서 부터 였다.

고3 때 읽었던 황석영의 광주기록과 이어 읽게 되었던 전태일평전으로 나는 당시가 얼마나 어두웠던 시대였다는 것을 알았고... 그 해 6월의 길거리에서 항쟁을 눈으로 보았었고.. 그 해 겨울엔 이미 선거가 얼마나 민중을 배신할 수 있는 사기놀음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었다. 80년대의 막바지에 대학에 입학하게 되어 88년부터... 89년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그 시대의 싸움꾼들과 만났었다. 편안하게 성장했었던 나에게 대학생활과 내가 자의로 타의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책들, 사건들은 충격을 넘어서 상처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길게 가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앙도서관과 대학본부 사이의 아크로폴리스에서 89년 11월에 힘차게 울려 퍼졌던 감동적인 인터내셔널가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노래였다.

그 시절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현우가 갇혀서 보낸 18년. 한윤희가 밖에서 보낸 또 그만큼의 세월만큼이, 아니 그 보다 더 긴 세월이 흘렀나 보다. 이 책이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여전히 상처가 아파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었고... 또 아파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고 힘들고 그랬었기도 했다. 그러다가는 잊어 버렸다.

며칠전 인터넷에서 오래된 정원이 영화로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를 보고는 영화를 찾아서 봤다. 별다른 생각없이, 아마 영화는 책보다 가볍겠지 하면서... 본, 이 영화는 지진희의 어색한 연기와 염정아와 감독의 지나친 표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책을 다시 찾아서 이제는 읽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는 내가 알고 있는 황석영의 작품은 아니었고, 어딘지 모를 어설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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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왼쪽을 향한 옆얼굴 (자화상) 1938

책을 다 읽고 나니 임상수 감독이 원작을, 내가 읽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독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긴 소설을 겨우 한 두 시간의 영상으로 옮겨 놓는 것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나는 영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으련다.

나는 오현우도, 송영태도 더구나 최미경 보다는 한윤희 쪽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상대적인 비교가 되겠지만... 실제로 그 당시에, 넌 너무 리버럴해...라던가, 2호선만 타지 말고 1호선도 타보지 그래...라는 말 따위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도 오래된 정원의 등장인물들처럼 살 지는 못했었다. 70년대 학번과 80년대 학번의 차이인가? 그들은 아주 쉽게 자신의 20대를 넘어섰던 것 처럼 보인다. 물론 다들 힘들었던 면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정말 쉽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8만원짜리 음악회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었고, 모두가 같이 듣지 못한다면 다시는 클래식을 듣지 않으리라 결심하기도 했었다. 이젠 20년 전의 일일 뿐이지만...

나는 이 소설을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읽지는 않았다. 작가의 의도도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임상수 감독이 그린 것 처럼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80년대와 9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세기가 바뀌는 시간에 종이에 적어 넣고 싶었을 것이다. 혁명은 아스라해지고, 대립은 모호해지고, 이상과 이념은 더럽혀지는 시간 속에서 담담하게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 같다. 나처럼 정리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황석영처럼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할 수 있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켄로치 감독의 1995년작 랜드 앤 프리덤을 본 적이 있다. 1995년에 스페인전쟁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다니... 아니 그래도 21세기보다는 스페인전쟁을 이야기하기에 더 나은 시기일지도 모르지... 1995년이라면 그러한 이야기가 적어도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1995년의 랜드앤프리덤에서는 손녀가 죽은 할아버지의 동지들과 할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시를 읊을 수 있었지만... 오현우는 지금 동지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다만 서글플 뿐이 아니던가...

그래서 등장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부드럽다. 2000년에 탈고한 소설답게... 80년대처럼, 90년대초반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  세상을 향해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렇게 살았었다라고 부드럽게 이야기 한다. 오현우처럼, 또 한윤희처럼, 한윤희의 동생처럼,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 살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숨쉬고 있고, 자연스럽다.

한윤희가 독일에서 가지고 있었던 케테콜비츠의 자화상. 위에 가져다 놓은 그림 말고도 콜비츠의 자화상이 많아서 어느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케테 콜비츠의 그림들을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이제 과연 이념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고통받는 민중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다면, 또는 어떠한 해결책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그저 가슴 한켠에 쌓아두고 지난 7년동안 이 소설을 외면했듯이, 질문 자체를 외면하면서 사는 것 밖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아마 사십이 넘어서도 계속 나는 이런 질문을 가끔씩 던지면서 지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게 가장 예민했던 시기에 그 어두운 시절의 막바지에 서있어야 했었던 세대의 최소한의 의무이며 운명이 아닐까...

2007년 10월 20일 토요일

[공연] 알렉상드르 타로 피아노 독주회 200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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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타로의 연주회가 있다는 소식에 얼른 예매를 했다. 장소가 예당 콘서트홀이라... 그 큰 홀이 타로의 피아노소리와 별로 맞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별 수 있나.. 이번에는 프랑스 문화축제의 일환으로 연주회가 열리는 모양이다. 연주회 전에 프랑스 문화원에서 프랑스 피아니즘에 관한 강연회가 있어서 가보려고는 했으나... 결국 시간이 되질 않았다. 연주회도 간신히 시간에 맞춰 갈 수 있었으니..

생각보다 홀에 관객들이 많았다. 작년 호암아트홀 연주회에서도 몇몇 빈 자리가 보였었는데, 이번에도 물론 빈자리는 꽤 있긴 했지만, 콘서트홀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온 듯하다. 프랑스대사관 관계자들과.. 프랑스문화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듣는 사람들도 꽤 할인을 받아서 온 모양이었다.

타로는 작년처럼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페이지 터너를 데리고 무대로 나왔다. 쿠프랭과 라벨. 그의 피아노는 여전히 유려하다. 스타인웨이에서 만들어지는 쿠프랭의 음악은 아주 오래전의 음악이 아니라 마치 현대의 뉴에이지 음악인 것 처럼 솜사탕처럼 몰랑몰랑하다. 그러나 그렇게 몰랑한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곡을 쉽게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쿠프랭의 곡이 연주하기 쉬운 건가... 그렇다기 보다는... 그의 독특한 연주법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 같다. 전혀 다른 피아노... 스타인웨이에서 빚어지는 프랑스의 향기.

인터미션이 지나고 라벨이 시작되었다. 200년이 넘는 간격을 두고 다른 시간대를 살았던 두 작곡가는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공간을 살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타로의 연주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어딘지 모르게 비슷했다. 라벨을 들으면서... 타로가 테크닉적으로도 간단히 평가할 연주자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앵콜은 쇼팽 2곡... 그리고 라모. 귀에 익은 쇼팽과 라모의 곡들은 앵콜곡으로 정말 안성맞춤.. 가슴 가득 타로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감기몸살, 회사일, 레슨 땡땡이.....그리고 네스프레소

감기몸살...
추석무렵부터 몸이 안좋더니, 어제는 정말 너무 아팠다. 오늘 아침 레슨도 못가고... 갔었어도 이번 주 내내 바이올린을 건드려 보지도 못했었기 때문에 레슨을 받을 의미가 없긴 했지만... 원래 건강체질은 아니지만, 만성적인 운동부족으로 몸이 환절기를 견뎌내지 못하는게 아닐까 싶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근육통과 살갗이 쓰리는 듯한 느낌은 많이 가셨지만 여전히 몸이 노곤하다.

지난 주 금요일 회사에서 행사가 있어서 홍천엘 다녀오느라 계속 운전을 하고, 늦게 오고 (원래는 자고와야 하지만 역시 땡땡이..) 이번 주엔 visitor들과 저녁을 먹어 주느라 또 며칠 늦고... 종일 미팅하고 프레젠테이션하느라 신경쓰고... 그러면서 몸살이 온 것 같다.

어제는 기다리던 나이젤 노스의 류트연주회가 있는 날이었는데, 몸이 너무 아파 하마터면 연주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올 뻔 했다. 그래도 조용히 앉아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름 치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픈 몸을 끌고 갔는데... 정말 가길 잘했다. 너무 멋진 연주회여서 못 갔으면 엄청 후회했을 듯 하다. 비록 음악감상이 몸살에 별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회사일....
회사라는 곳은 항상 참 많은 일이 일어난다. 본의 아니게 여러회사에서 근무해 본 결과... 어느 회사나 다 그런 것 같다. 내가 관여되지 않아도, 이런 저런 일들이 생기는 것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참 피곤하다. 계속 그런 일들이 머리 속에 담겨 있으니... 정작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놓치기도 하고... 정말 비효율적이지만, 사람사는 곳이 그럴 수 밖에 없으니 어쩌랴...

레슨 땡땡이...
이번 주는 회사 일때문에 화요일 레슨도 못가고... 저녁식사에 반드시 가야 한다고 해서 목요일 오케스트라 연습도 못가고... 결국 몸이 아파 오늘 레슨도 못가고... 계속 시달리면서 정리도 안되고 해결도 안된 많은 것들이 산적해 있는 것 같은 느낌... 주말동안에는 머리 속에서 모든 것을 지우고 푹 쉬어야 하는데... 잘 될 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내내 바이올린을 꺼내 보지고 못했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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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지름신이 강림하사... 네스프레소와 에어로치노를 구입했다^^


하도 칭찬 일색이어서 대단한 기대를 했는데, 일단 무척 편리하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런데, 워낙 커피를 진하게 먹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커피가 연하다. 그래도 향이나, 맛은 대체로 좋다. 아직 종류별로 다 시음을 해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먹어본 것들은 연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괜찮았다.

에어로치노로 우유거품을 만드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들이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커피를 먹일 수는 없어서 우유거품만 줬더니 맛이 없다고 한다..;; 나중에 코코아에 우유거품을 얹어 줘봐야 겠다. 사실 나는 라떼나 카푸치노보다는 그냥 마시는 것을 훨씬 선호하기 때문에 살까 말까 많이 망설였었다. 생각해보니... 순전히 재미삼아 산 것 같기도 하다..ㅡㅡ;; 그래도 순식간에 우유거품이 생기는 걸 보니 신기하긴 하다^^

원래 가지고 있는 커피메이커가 110볼트이고, 커피 한잔을 먹기 위해서 이것 저것 꺼내야 하는 것이 귀찮았던...  게으름의 극치를 달리는 우리 부부에겐 딱 좋은 기계인 것 같기는 하다. 어차피 커피는 집에서 주말에만 마시니까... 물론 좀 더 써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2007년 10월 3일 수요일

오케스트라 연습 (2007. 9. 27) 및 레슨관련 잡담

지난 주는 추석 연휴가 있었다. 연휴 바로 다음 날은 오케스트라 연습날이었다. 악장님을 픽업해야하는데... 바로 처리해야하는 메일을 7시가 다되어서 받았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이 구제불능의 기억력... 회사 안짤리고 다니는게 정말 다행이다..ㅠㅠ) 하여간, 7시반이 다되어서야 악장님에게 전화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일은 대충 45분-50분에 끝났다. 추석 연휴에서 복귀한 사람들이 많지 않아선지 다행히 거리가 한산했다. 생각보다 빨리 연습실에 도착...

드보르작, 교향곡 8번 1악장
브루흐,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


드보르작.... 간만에 하는 1악장은 역시 생소하다... 정말 매일 조금씩이라도 연습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말도 한 두번이지.. 매번 일지마다 쓰려니 이제 민망하다;;) 브루흐도 끝까지는 못했다. 그러나 물론 드보르작보다야 훨씬 낫다...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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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잡담.

추석 때도 영 몸살기운에 정신을 못 차리겠더니... 여전히 몸이 안좋았다. 금요일 저녁 레슨에선 정말 내가 생각해도 엉망진창이었다... 좌절하고 집에와서 계속 잤다..ㅡㅡ;; 토요일 아침 레슨을 자느라고 빼먹다니...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일어나서 악기를 챙겨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말 내내 집 밖으로 한걸음도 못나간 채로 지내다가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 상황이 나아졌다.

그리고 오늘 또 레슨... 어제 나름 조금 연습을 했더니, 선생님왈..
저번에 레슨 언제 했었죠?
금요일에요..
그 때 정말 컨디션이 안좋으셨나봐요.. 오늘은 확 달라졌는데요...

제 연습이 효과를 본 건지.. 하긴 지난 주 상태가 정말 심각하긴 했었지.. 사실 오늘도 좀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보잉에 엄청 힘이 들어가긴 했었다.

Presto까지 땡겨서 레슨 받고 싶으시면 한 번 더하구요..
그렇게 빨리는 절대 못할 것 같은데요..
본인이 연주하면서 만족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전공할 것도 아니고.. 속도 붙이다가 안되서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는 연주에서 만족감을 얻는게 더 중요하죠. 그럼 다음 곡으로 넘어갈께요.

흑... 전공할게 아닌 것은 맞고.. Presto로 땡기는 것은 내 상황에서 거의 불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뭔가 속이 쓰리다.. 그래도 일단 진도는 나갔으니 만족해야 하나...;; 빨리 연주하는 것이 문제다.. 늘... 정확하게 빠르게.. 둘 중 하나 밖에 안되는 것이 문제...; 더구나 혼자서는 그럭저럭인데.. 선생님 앞에선 왜 버벅이는 것인지...


[곡해설]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Op. 26

Jean Sibelius Finlandia, op. 26


핀란디아는 시벨리우스의 작품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로운 세기가 도래하기 바로 직전인 1899년에 작곡되었고 1900년에 수정되어 오케스트라곡으로 완성되었다.


1899년 2월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스 2세는 핀란드공국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2월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선언은 핀란드의 문화예술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시벨리우스도 그의 음악으로 정치적인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를 원했다. 1899년 11월, 표면적으로는 핀란드 언론인들의 연금기금 마련을 위한, 실제로는 자유언론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한 민족적 역사극의 공연을 위하여,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역사적인 장면들을 묘사하는 6곡의 표제음악과 짧은 서곡을 작곡했다. 끝에서 두번째 곡인 “Great Hate”는 러시아 정복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파괴를 보여주며 어머니 핀란드가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눈보라 속에서 전쟁, 추위, 기아,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시벨리우스는 이를 위하여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어둡고 가장 고통스러운 음악을 작곡했다. Great Hate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곡인 “핀란드의 각성”은 그간의 고난이 승리의 영광으로 바뀌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곡은 스웨덴에 이어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독립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던 핀란드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바로 이 마지막 곡이 현재 핀란디아의 초기버전이었다.


역사극의 공연 후, 수개월 동안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로베르트 카야누스와 시벨리우스는 표제음악 중 좋은 곡들을 뽑아 핀란드에서 연주했으며, 이 모음곡의 피날레 부분을 유럽 순회공연 시에 연주하기도 하였다. 오케스트라가 파리 국제 박람회에서 이 곡의 피날레 (“핀란드의 각성”)을 연주함으로서 곡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시벨리우스는 핀란드 내에서 만의 유명세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핀란디아라는 이름은 1900년 이 표제음악의 피아노 편곡에 악셀 카펠란이 제목을 붙이면서 나오게 되었고, 핀란디아라는 이름으로 1900년 시벨리우스에 의하여 재작업된 이 곡의 오케스트라 버전은 1901년 카야누스의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러시아의 검열 때문에 이 곡은 핀란디아라는 이름을 불리워지지 못하고 1차대전 후 핀란드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는 “즉흥곡” 등 다른 이름으로 감추어져 공연되기도 하였다.

 

곡의 대부분은, 핀란드 민중들의 투쟁정신을 고취하는, 열렬하면서도 휘몰아치는 듯한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끝부분으로 가면서 고요함이 오케스트라를 장악하고 장엄하게 핀란디아의 찬가가 들려온다. 종종 전통적인 민속선율이라고 잘못 인용되기도 하나, 이 찬가 부분은 시벨리우스 자신의 곡이다.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찬가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였었는데 시벨리우스 자신은 이 곡이 원래 오케스트라 곡을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며 불평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제 멜로디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전세계를 위한 국가로 쓰자고 제안했을 만큼 호소력이 있는 것이었다. 핀란드에서는 1940년 코스켄니에미에 의하여 쓰여진 가사가 가장 유명하고 현재는 핀란드의 준국가처럼 불리워진다. 이 노래는 “오 핀란드여 보아라 너의 날이 밝아오는 것을, 험난한 밤의 장막은 이제 걷히었도다”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핀란디아는 곧 포르테에서 포르티시모로 커지게 되는 금관의 우울한 고난의 동기로 시작한다. 목관은 성스러운 느낌으로 답하며 현들은 더 "인간적인" 목소리를 들려 주기 시작한다. 템포는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바뀌며 금관의 팡파레는 투쟁 정신을 보여주고 알레그로의 템포는 승리의 자신감을 나타낸다. 유명한 찬가의 동기는 처음 목관으로 연주되며, 현이 이어서 찬가의 주제를 연주한다. 템포는 빨라지고 금관 팡파레가 다시 나오면서 금관이 찬가의 주제로 곡을 고조시키며 짧은 교향시는 승리를 선언하는 종결로 달려간다.

 

연주시간은 약 8분.


참고:

http://www.sibelius.fi/english/musiikki/ork_finlandia.htm

http://www.sfsymphony.org/templates/pgmnote.asp?nodeid=3772&callid=792

http://immaculatasymphony.org/past/Apr03.html

http://www.symphonypromusica.org/notes/9211.html

http://www.daytonphilharmonic.com/content.jsp?articleId=506

http://www.strathmore.org/eventstickets/calendar/programnotes.asp?id=2767

http://www.asianyouthorchestra.com/public_html/ayo%20new%20site%202/Note%20--%20Finlandia.html

http://www.kalamazoosymphony.com/concerts/2006/sibelius-notes.htm
 

2007년 10월 2일 화요일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Secret, 不能說的秘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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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친기의 누군가가 이 영화를 봤다고 하면서 피아노 배틀 장면이 나온다고 하길래... 찾아서 봤던 영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런 저런 장면이 잔뜩 나온다. 캠퍼스가 아름다운 예술학교라는 배경과 주걸륜이 전학생으로 나온다는 점은 올훼스의 창이라는 오래된 고전만화를 연상시켰고... (이자크가 전학생이었다..)

영화를 찾아 보는 계기가 되었던 피아노 배틀 장면은,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피아노의 전설이라는 영화 속에서의 장면을 연상시켰다. 물론 연주되는 곡은 달랐고.. 피아노의 전설의 장면이 훨씬 독창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둘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장면들이나... 기타 등등의 연애 장면들은.. 어디서 봤었는지도 생각이 잘 안날 정도로 진부한 설정... 그렇긴 해도 그다지 보기 힘들다거나 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없이 보기엔 딱이다..;;)

후반부에는 샤오위의 비밀이라는 것이, 정말 많은 영화나 만화에서 소재로 쓰였던 시간여행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최근에 봤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요 소재이기도 했던...

마치 짜집기를 하여 만들어진 것 같은 영화이긴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영화는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나에게 가장 큰 흥미를 불러 일으켰던 부분은 주걸륜의 피아노 연주. 주걸륜 뿐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연주하고.. 배우들도 어색하지 않게 연주장면을 연기하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음악 자체도 재미있었고... 피아노 배틀에서 쇼팽곡들을 대만식으로 변주하는 것도 흥미로왔다.

주인공인 주걸륜과 샤오위도 상당히 매력이 있었고... 그림같은 학교와 동네 배경도... 보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된 음악실의 오래된 피아노도 그렇고... 비밀의 악보와 오래된 피아노를 통해서 시간여행을 한다는 설정도... 특히 집으로 돌아갈 때는 빨리 치라는..;; 그런 환타지적인 내용이 재미를 가중시켰다^^

대만영화 뿐만 아니라 중국계 영화들을 별로 많이 보진 않았는데...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좀 시끄럽게 들린다는 점 (ㅡㅡ;;)을 제외하면 추천할 만한 영화.

2007년 9월 29일 토요일

[곡해설] 드보르작 교향곡 8번 G장조, 브루흐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 Op.85

드보르작 교향곡 8번 G장조 (Dvorak, Symphony No. 8 in G Major Op. 88)
 
드보르작은 프라하 교외의 한 마을인 Nelahozeves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가로 여관과 정육점을 운영했다고 한다. 삼촌의 후원아래 음악을 배울 수 있었던 드보르작은 1857년에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하여 수학했고 당시 새로이 문을 연 Prague  Provisional Theatre의 오케스트라에서 스메타나와 바그너의 지휘하에 비올라를 연주하는 경험을 얻기도 했었다. 그의 첫 교향곡은 1865년에 작곡되었는데, 이 곡은 영향력있는 비엔나의 비평가인 한슬릭(Hanslick)과 브람스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의 명성은 서서히 전 유럽과 미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드보르작 교향곡 8번 G장조는 드보르작의 교향곡 중에서 9번 신세계 교향곡에 이어 두번째로 유명하고, 두번째로 많이 연주되는 곡이다. 이미 국제적인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던 드보르작은 성공적인 영국여행을 마친 후 귀국하여 그동안 꿈꾸어 왔던, 언덕과 수풀에 둘러싸인, 보헤미아의 비소카 (Vysoka)의 소박한 전원주택의 음악실에서 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체코적인 곡인 G장조 교향곡 8번을 작곡하였다.


이 곡은 1889년 8월 26일에서 11월 8일까지 두 달 반 동안에 작곡 되었다. 악보에는 "To the Bohemian Academy of Emperor Franz Joseph for the Encouragement of Arts and Literature, in thanks for my election." 라고 헌정사가 쓰여져 있다. 곡은 작곡자 본인에 의하여 1890년 2월 2일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8번 가끔 “영국교향곡”으로도 불리는데, 사실 곡의 분위기나 주제는 영국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 드보르작은 베를린의 출판가와 약간의 분쟁이 있었고, 그리하여 그는 그의 곡들 상당수를 런던의 노벨로에게 보냈는데, 거기에는 이후에 "The English"라는 부제가 달리게 되는 8번 교향곡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런 이유로 이 교향곡에 “영국”이라는 부제가 붙게 된 것이다. 드보르작은 영국에서 매우 유명했었고 1891년 6월에는 캠브리지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도 받았었는데, 그는 논문을 제출하는 대신, 학위수여식에서 이 G장조 교향곡을 지휘했다. 그는 또한 1893년 시카고의 세계 박람회에서 체코의 날에 이 교향곡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8번 교향곡은 활기찬 분위기의, 드보르작이 사랑했던 보헤미아의 민속음악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곡이다. 비록 종종 신세계교향곡의 유명세에 가리기도 하지만, 보헤미아의 시골길을 산책하는 듯한 이 작품은, 낙천적인 19세기 후반의 교향곡 작곡의 최고봉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이전의 소나타 형식을 벗어나 주제들이 자발적인 흐름을 보이는 듯한 방식을 보여준다.


1악장: Allegro con brio (G major) –
팀파티가 자유롭게 사용되며, 힘차고 열정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 첼로, 혼, 클라리넷이 장엄하고 서정적인 G단조의 주제로 시작되고, 새가 지저귀는 듯한 플룻의 멜로디로 이어진다. 곡은 점점 더 힘차고 빛나며 행진곡풍의 G장조 선율이 나오면서 율동적인 목관의 2주제가 나타난다.


2악장: Adagio (C minor) –
아다지오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꽤 속도가 있다. 현에 의한 C단조의 셋잇단음표의 업비트로 시작한다. 만족감으로 가득 찬 전원생활을 그리고 있으며 새들의 노랫소리로 곡을 메운다. 마을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이다. 


3악장: Allegretto grazioso – Molto vivace (G minor) –
악장의 대부분이 3/8박자의 춤곡으로 되어 있고 끝부분에서 2/4로 변하고 2악장과 비슷한 방식으로 속삭이면서 끝나게 된다. 선율적인 매력으로 가득찬 우아한 왈츠이다. 중간에 시골풍의 춤곡으로의 갑작스런 변화와 두배로 빨라진, 끝부분으로 달려가는 코다는 체코의 춤곡인 Dumka를 연상시킨다. 중간에 나오는 주제는 "Pig-headed Peasants"라는 드보르작 초기의 오페라에서 사용한 것이었다고 한다. 


4악장: Allegro ma non troppo (G major) –
이 피날레는 가장 휘몰아치는 듯한 악장이다. 팡파레의 활발한 2/4로 시작해서, 팀파니가 이끌고 첼로가 시작하는 아름다운 멜로디로 전개가 된다. 긴장이 쌓여가다가 악기들이 최초의 주제를 폭포처럼 차례로 연주하면서 해소가 된다. 그 곳에서부터 악장은 몇 번씩 장조와 단조를 오고 가면서 광포한 중간부분을 통과하기 시작한다. 다시 느리고 서정적인 부분으로 돌아온 후에, 곡은 금관과 팀파니가 두드러지는 크로마틱 코다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코드 전의 서두르는 듯한 부분은 보헤미안의 춤곡인 Furiant이다.

연주시간은 36분 정도.


브루흐,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 (Max Bruch, Romance in F major for Viola and Orchestra, Op. 85)
 
부르흐는 후기 낭만파의 작곡가로 분류되어 지며, 그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아름답고, 상상력이 넘치고, 고상하다. 브루흐는 1838년에 쾰른에서 출생했다. 그는 독일, 영국 등에서 지휘, 작곡, 교수로 일하였고 1890년부터 1911년 은퇴할 때까지 베를린 음대에서 작곡교수로 봉직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g단조 (1868년작)이며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단악장의 작품 콜니드라이 (1881년작,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히브리 멜로디에 의한 아다지오)도 유명하다. 브루후의 작품들은 독일의 낭만주의 전통에 따라 보수적으로 구성되었고 아름다운 선율을 보여준다. 그는 스스로를 리스트나 바그너와 같은 ‘신음악’ 보다는 브람스와 같은 낭만적 고전주의 학파로 여겼다. 지금은 자주 연주되지 않지만 생전에 그는 주로 합창곡 작곡가로 알려졌었다.
 
브루흐의 이 아름다운 곡, 로망스 Op.85는 1911년에 작곡되었다. 같은 해에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위한 첫번째 스케치를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보수적인 전통을 따르는 작곡가인 것을 알 수 있다. 로망스는 파리오페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모리스 비외(Maurice Vieux)에게 헌정되어 졌으나, 1911년 제국주의 베를린의 반프랑스적인 정서로 인하여 이 곡은 베를린 음악학교에서 부르흐와 같이 교수로 재직하던 독일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빌리 헤스 (Willy Hess)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헤스는 브루흐의 작품을 많이 초연하였었는데,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 피스 Op.84는 그에게 헌정되어 졌었다.)

작곡자는 이 곡의 악보에 Andante con moto 라고 적었고, Q=69, 72라고 메트로놈의 표시도 적어 넣어놓았다. 단순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비올라 음역의 그윽함이 두드러지게 한다. 굳건하지만 우아하게 끌어내온 비올라의 음색으로 모든 감정적인 긴장이 섬세하게 그려내어 지며, 솔직하지만 충분한 반주와 완전히 융합되어 진다. 이 곡은 브루흐의 어느 다른 작품들과도 겨룰 수 있을 만한 랩소디적인 테마를 보여주고 있으며, 간절한 열망과 멜랑콜리한 풍부함을 가지고 있다. 투명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매우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러브레터라고 할 수 있다. 곡은 열정적인 웅변으로 시작하여 고요한 엔딩에 이르게 된다.
 
연주시간은 약 8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