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1)


"그의 작품들이 음악가들에게 받는 존경이나, 많은 청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점을 보면, 그는 아마도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일 것이다." 1980년판의 뉴그로브 음악사전은 이와 같은 칭찬과 더불어 베토벤에 대한 글을 위엄있게 시작한다. 이 문장은 10여년 후 독일 골리앗 (역주: 베토벤을 지칭)에게 보다는 모차르트라는 다윗에게 들어 맞게 되었다. 이 해 (1991년)가 모차르트의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고전적인 이미지가 베토벤의 더 외향적인 표현보다 선호되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라디오 채널을 휴 다운즈나 피터 우스티노프가 모차르트 스페셜을 진행하는 PBS로 돌려보라. 또 채널을 상업방송들 중의 하나로 돌려보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K.466과 "작은" G단조 교향곡 K. 183/173dB가 맥킨토시 컴퓨터를 팔고 있고, 돈지오반니는 Cheer 세탁세제를 선전하고, 피가로의 결혼은 Sirocco 자동차를 팔고 있고, 레퀴엠의 라크리모사는 Lee 청바지를 칭찬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또 다른 피아노협주곡 (K.482)는 맥스웰하우스 커피광고를 장식하고 있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에 쓴 교향곡의 발견은 뉴욕타임즈의 일면을 장식한다. 딜러와 수집가들은 작은 기록 조각이라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모차르트의 서명은 명화들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언젠가 딜러들은 "Andretter" 세레나데 K.185를 조각내어 각각 따로 팔아 엄청난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 피가로의 결혼과 돈지오반니는 현재 라보엠과 나비부인과 박스오피스에서 티켓판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모차르트의 대중화는 이로 인하여 가장 많이 이익을 얻고 있는 오페라하우스나 콘서트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며, 무대와 영화로부터 온 것이다.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1980년대의 모차르트 열풍은 피터 샤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연극과, 이어서 밀로스 포먼이 감독한 동명의 영화는 다른 어떤 것들이 작곡가 사후 200년 동안 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모차르트를 위하여 한 셈이다. '아마데우스'는 런던, 워싱턴, 뉴욕에서 상연되었고, 비엔나의 부르크극장 (Burgtheater)과 부다페스트의 넴제티 신하즈 (Nemzeti Szinhaz)에서 상연될 때에는 독일어, 헝가리어로 번역되었다. 샤퍼은 무대 버전을 계속적으로 수정했는데, 그는, "분명함, 구조적인 질서 그리고 드라마에의 거의 강박에 가까운 추구..... 런던 버전에서 잘못된 점의 하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몰락과 거의 관계가 없게 보였다는 것이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샤퍼와 포먼은 다시 원고를 수정하였는데, 단지 새로운 미디어를 위한 변경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더 순진한 관객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은 객관적인 "볼프강 모차르트의 삶"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이 점은 아무리 강하게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분명히, 무대에서의 아마데우스는 작곡가의 전기 다큐멘터리로 의도되지는 않았고 영화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주제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그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장식하는 월권 - 그 중에서도 특히 청중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주제를 강조할 목적으로 - 을 했다고 본다.

영화는 무대에서 보다 훨씬 더 그러한데,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럴법한 드라마를 역사 속의 시간, 장소, 실존인물들로 바꾸어 인식 시켰다. 무대공연에서 경고할 수 있었던 부분은 셀룰로이드 필름에는 넣을 수가 없었고, 픽션은 진실과 분리되지 않았다.

아마데우스는 궁정 작곡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의 작곡가로서의 신적인 재능에 대한 깊은 질투심에 중점을 둔다. 모차르트의 세련되지 못한 태도와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이 그의 인격으로 내려와서 만든 것과 같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었다. 그는 그의 이름대로 진실로 "아마데우스"의 축복으로 신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연극과 영화 둘 다 작곡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10년, 즉 1781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의해 해고된 후로부터 사망 시까지의 10년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비엔나에 거주하였고, 궁정 작곡가로서의 일상업무로부터 자유로운 작곡가가 되었으나, 재정적인 안정성을 위협받게 되었다. 이 10년동안 모차르트는 많은 곡들을 작곡하였는데, 모두 놀랄만큼 우수한 곡들이었다.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에 대한 경쟁관계에 촛점을 맞추기 위하여 비엔나 궁정의 장면들을 많이 설정한다. 몇몇 상황들이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들은 궁정 생활에 대한,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삶에 대한 비현실적인 왜곡이다.

영화가 개봉한지 7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음악학자들은 여전히 볼프강, 콘스탄체 그리고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요세프 2세 황제, 그리고 안토니오 살리에리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 그들은 정말 그러했었는가? 1991년 '모차르트의 해'는 이런 문화 아이콘의 초상을 검토하여 기록 바로 세우기를 시작할 시기이다.

'장식으로의 픽션' (역주: 사실이 아닌 내용을 극에 삽입하여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말함)은 작가들에 의한 창조와 역사적인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과소평가하게 한다. 샤퍼와 포만 둘 다 모차르트의 전기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역사적인 논란거리들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모차르트의 삶을 변형시킨 것은 다폰테가 보마르셰의 연극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 대본으로 바꾼 것과 유사했다. 길이는 매체의 형식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도록 만들어졌고, 등장인물의 수는 감소되었으며, 상황은 재정비되고 결합되어졌다.

그러나, (극에서의)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동기는 18세기 삶의 재창조일 수도 있다. 만약 샤퍼와 포먼이 그렇게 했다면, 또 그것을 의도했었다면, 그들의 영화의 힘이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동기, 목표 그리고 감정 또는 적어도 모차르트 시대의 사람들이 표현하고 유지했던 방식은 확실히 우리와는 달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강과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6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생존하여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둘 뿐이었는데, 이러한 비율은 그 당시에는 통상적인 것이었다. 만약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1990년대에 볼 수 있는 반응과 같은 크기였다면, 그들은 결혼생활 내내 거의 계속적으로 슬퍼만 하고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2편에서 계속.....)

--------------------------------------------------------------------------------

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