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책] 더 나은 삶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 - 오래된 정원

이 책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상하권 두권을 사왔었다. 그러니 이 책들은 꽤 오랫동안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거의 7년간 나는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제목이 무엇이건 내용이 무엇이건 나는 황석영의 소설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의 글은 1987년, 내가 고3이던 그해 여름부터 긴 시간 동안 나를 지배했다. 80년 5월 광주항쟁의 기록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고 나서 부터 였다.

고3 때 읽었던 황석영의 광주기록과 이어 읽게 되었던 전태일평전으로 나는 당시가 얼마나 어두웠던 시대였다는 것을 알았고... 그 해 6월의 길거리에서 항쟁을 눈으로 보았었고.. 그 해 겨울엔 이미 선거가 얼마나 민중을 배신할 수 있는 사기놀음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었다. 80년대의 막바지에 대학에 입학하게 되어 88년부터... 89년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그 시대의 싸움꾼들과 만났었다. 편안하게 성장했었던 나에게 대학생활과 내가 자의로 타의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책들, 사건들은 충격을 넘어서 상처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길게 가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앙도서관과 대학본부 사이의 아크로폴리스에서 89년 11월에 힘차게 울려 퍼졌던 감동적인 인터내셔널가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노래였다.

그 시절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현우가 갇혀서 보낸 18년. 한윤희가 밖에서 보낸 또 그만큼의 세월만큼이, 아니 그 보다 더 긴 세월이 흘렀나 보다. 이 책이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여전히 상처가 아파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었고... 또 아파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고 힘들고 그랬었기도 했다. 그러다가는 잊어 버렸다.

며칠전 인터넷에서 오래된 정원이 영화로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를 보고는 영화를 찾아서 봤다. 별다른 생각없이, 아마 영화는 책보다 가볍겠지 하면서... 본, 이 영화는 지진희의 어색한 연기와 염정아와 감독의 지나친 표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책을 다시 찾아서 이제는 읽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는 내가 알고 있는 황석영의 작품은 아니었고, 어딘지 모를 어설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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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왼쪽을 향한 옆얼굴 (자화상) 1938

책을 다 읽고 나니 임상수 감독이 원작을, 내가 읽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독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긴 소설을 겨우 한 두 시간의 영상으로 옮겨 놓는 것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나는 영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으련다.

나는 오현우도, 송영태도 더구나 최미경 보다는 한윤희 쪽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상대적인 비교가 되겠지만... 실제로 그 당시에, 넌 너무 리버럴해...라던가, 2호선만 타지 말고 1호선도 타보지 그래...라는 말 따위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도 오래된 정원의 등장인물들처럼 살 지는 못했었다. 70년대 학번과 80년대 학번의 차이인가? 그들은 아주 쉽게 자신의 20대를 넘어섰던 것 처럼 보인다. 물론 다들 힘들었던 면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정말 쉽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8만원짜리 음악회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었고, 모두가 같이 듣지 못한다면 다시는 클래식을 듣지 않으리라 결심하기도 했었다. 이젠 20년 전의 일일 뿐이지만...

나는 이 소설을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읽지는 않았다. 작가의 의도도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임상수 감독이 그린 것 처럼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80년대와 9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세기가 바뀌는 시간에 종이에 적어 넣고 싶었을 것이다. 혁명은 아스라해지고, 대립은 모호해지고, 이상과 이념은 더럽혀지는 시간 속에서 담담하게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 같다. 나처럼 정리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황석영처럼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할 수 있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켄로치 감독의 1995년작 랜드 앤 프리덤을 본 적이 있다. 1995년에 스페인전쟁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다니... 아니 그래도 21세기보다는 스페인전쟁을 이야기하기에 더 나은 시기일지도 모르지... 1995년이라면 그러한 이야기가 적어도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1995년의 랜드앤프리덤에서는 손녀가 죽은 할아버지의 동지들과 할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시를 읊을 수 있었지만... 오현우는 지금 동지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다만 서글플 뿐이 아니던가...

그래서 등장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부드럽다. 2000년에 탈고한 소설답게... 80년대처럼, 90년대초반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  세상을 향해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렇게 살았었다라고 부드럽게 이야기 한다. 오현우처럼, 또 한윤희처럼, 한윤희의 동생처럼,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 살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숨쉬고 있고, 자연스럽다.

한윤희가 독일에서 가지고 있었던 케테콜비츠의 자화상. 위에 가져다 놓은 그림 말고도 콜비츠의 자화상이 많아서 어느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케테 콜비츠의 그림들을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이제 과연 이념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고통받는 민중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다면, 또는 어떠한 해결책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그저 가슴 한켠에 쌓아두고 지난 7년동안 이 소설을 외면했듯이, 질문 자체를 외면하면서 사는 것 밖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아마 사십이 넘어서도 계속 나는 이런 질문을 가끔씩 던지면서 지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게 가장 예민했던 시기에 그 어두운 시절의 막바지에 서있어야 했었던 세대의 최소한의 의무이며 운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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