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8일 토요일

매몰비용...?

오늘 뉴스제목을 훑어 보다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제목을 발견했다.

이 기사.... "경인운하, 지금 되돌리면 매몰비용 너무 많다"

기자가 붙인 제목은 아니고... 인천시장이라는 분이 경인운하에 대해 하신 말씀인 모양이다. 경인운하보다는 매몰원가 또는 매몰비용이라는 개념을 저렇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더 관심이 가서 기사를 대강 살펴 보았다. 제목에서 예상이 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는 내용은 없는 듯하고...

그 시장님의 경력에 경영학이나 경제학이라는 내용은 없는 듯하여 일단은 그러려니 했는데... 포탈사이트의 인물 검색의 학력란을 다시 보니 서울대 경영학 석사, 트로이주립대 경영학석사라는 학력이 쓰여 있다. 트로이주립대가 어디 있는 학교인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인물검색 사이트에서 링크를 따라가보니 미식축구 및 야구선수들 이름이 쭉 나온다..;;) 그 앞쪽의 석사학위는 상당히 난감하다.

매몰원가가 이미 발생한 비용이라는 점에서 경인운하에 쏟아져 들어간 돈이 매우 많다는 팩트는 전달이 될 수는 있겠지만, 매몰원가라는 것은 원래 의사결정과정에서 쓰이는 개념이고 의사결정에 있어서 이미 발생하여 회복할 수 없는 비용은 고려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만일 비용이라는 측면을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매몰원가가 아니라 기회비용을 비교하여야 하는 것. 그리고 시장님 말씀대로 바로 그 이유때문에 우리가 운하를 계속해야 한다면, 그건 요즘 유행하는 Behavioral Economics에 나오는 '매몰원가 효과'를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될 듯...;; 이 개념은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1학년 학생 정도면 다 아는 것일 텐뎅...

오마이가 저걸 제목으로 뽑은 것은 이 어처구니 없는 시장을 비웃어 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2009년 2월 24일 화요일

코리아나 챔버뮤직 소사이어티 제36회 정기연주회, 2009. 2. 24.

고클래식에 티켓 신청을 했었는데, 전에도 몇 번 신청은 했었지만 된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로그인을 했다가 쪽지함이 반짝거리는 것을 발견...! 그런데... 헉 공연이 바로 당일인 것이다. 쪽지가 온 지 며칠 되었는데 반짝이는 걸 그제서야 본 것이다. (아니면 로그인을 며칠 간 안했을 수도...)

급히 같이 갈 사람을 찾아 보았는데 별로 없어.... 도윤이에게 물어 보았더니 간다고 해서 모녀가 밤마실 나가는 겸해서 콘서트 나들이를 하기로 했다^^; 실내악이라서 나는 꽤 관심이 가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과연 도윤이가 얼마나 지겨워하지 않고 있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도착하여, 도윤이에게 자그만치 2,500원이나 하는 조그만 카스테라를 사주고 (음악당 안의 카페는 정말 심하게 비싼 듯..ㅠㅠ 하지만 연주회 시간 동안 엄마 말 잘 듣게 하기 위한 투자이기 때문에 사줘야...;;;)... 1시간 반 좀 넘게 이어진 콘서트 내내 도윤이는 잠도 안자고... 별로 많이 지겨워 하지도 않고... 꽤 착하게 앉아서 잘 들었다. 그건 그렇고... 

첫 곡은 전에 우리 앙상블의 은아씨가 나중에 꼭 해야 한다고 했던 바로 그 곡. 프로그램에는 미뉴엣이 적혀 있었는데, 연주는 알레그로만 했다. 기대했던 것처럼 정교한 연주가 아니어서 조금 실망스럽기는 했지만, 그래도 듀엣연주는 언제나 보기가 좋다. 비올라나 첼로가 낮은 음역을 가지고 있는 악기이긴 하지만 살짝 더 날카로운 음색으로 조금 더 앙상블을 잘 이루었다면 좋았을 텐데 싶긴 했다.

이어지는 곡은 하이든의 Fifth. 에르완 리샤가 들고 나온 비올라가 엄청 커 보였고...^^; 퍼스트 바이올린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곡인 듯 했다. 안단테 악장이 아름다왔다.

이 곡과 나중의 도흐나니 퀸텟을 들으면서 우리 앙상블도 이 곡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들었는데 하이든 같은 경우는 퍼스트 바이올린만 잘하면 가능할 수도 있을 듯 하고... (잘하는 분을 영입해야..;;;) 도흐나니는 어느 악기가 리딩한다는 느낌 없이 각자가 맡은 파트를 매우 충분한 소리를 내면서 연주해야 할 것 같았다. 하이든보다 도흐나니가 서로 묻어가면서 재미있게 연주할 수 있을만한 곡이지 않을까. 사실 도흐나니의 피아노 퀸텟이 연주되는 것 까지 보다 생각해 보니 이번 연주회 프로그램은 우리 앙상블의 구성으로 연주하기에 딱 좋은 프로그램이 아닌가 싶었다.

도흐나니의 곡은 매우 재미있었다. 각 악기들이 더하고 덜하고 없이 모두 자기 몫을 하면서 즐거운 앙상블이 되는 것을 보니 정말 부러웠다고나 할까. 집에 와서 인터넷에서 악보를 찾아 보았는데, 나름 최근 작곡가여서 그런지 무료악보는 없고 유료로 구해야 할 듯 하다. 아다지오 악장만이라도 한 번 해보면 어떨까 했는데 말이다.

연주는 앵콜 없이, 커튼 콜도 없이 그냥 끝났다. 어쩐지 마지막 곡의 화려한 엔딩과는 맞지 않는 맹숭맹숭한 느낌이랄까. 이런 소규모 음악회가 사실 더 즐겁고 재미있을 수 있는데... 오는 길에 도윤이에게 일전에 성당에서 했던 실내악 공연 (대중적인 클래식 소품들이 잔뜩 연주되었었다)이랑 이번 공연이랑 어느 것이 더 재미있었냐니까 뜻밖에 이번 공연이 더 좋았다고 한다. 도흐나니가 맘에 들었던 걸까... 아니면 무대가 가까이에 확 들여다 보이는 자리 덕분일까...

P/R/O/G/R/A/M

L.v.Beethoven Duet with two obbligato eyeglasses for Viola & Violoncello
Allegro-Menuetto
Va.. 김상진 Vc. 임경원

J.Haydn String Quartet No.61 in d minor Op.76 No.2
Allegro
Andante o piu tosto allegretto
Menuetto: Allegro ma non troppo
Finale: Vivace assai
Vn. 양승희, 지성호 Va. 에르완 리샤 Vc. 김호정

intermission

E.v.Dohnanyi Quintet for Piano & String Quartet Op.1
Allegro
Scherzo
Adagio, quasi andante
Finale (Allegro animato)
Pf. 오윤주 Vn. 지성호, 양승희 Va.. 서수민 Vc. 이유미

어디까지... 언제까지... 가게 될까?

지난 주에 본 사진들인데... 작년부터 계속되어온 여러가지 bail-out 정책들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에 대한 꽤 재미있는 (그러나 가슴아픈) 은유라고 할 수 있겠다.  

출처는 여기 그리고 여기

(이 사진들은 실제 사건이었던 모양인데, 마지막 사진만은 조작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세계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진행형이니 틀린 은유는 아니다.)











2009년 2월 23일 월요일

앙상블 연습 다섯번째 2009년 2월 21일

연주회 - 비록 노 관객이지만 - 가 딱 한 달 남았다. 우리와 함께할 오보이스트를 "모시고" 같이 연습을 했다.

은하가 늦는 바람에 일단 우리끼리 좀 맞춰 보다가... 첼로가 없으니 영 맹숭맹숭하여 다시 각자 연습모드로... 한 시간을 보냈다. 연주회때 할 솔로곡을 경희씨와 맞춰 봤는데, 마지막 부분에 박자가 잘 안맞아서 좀 헤맸다.. ㅠㅠ

은하가 우리의 오보이스트를 데리고 등장... 6학년이라는 꼬마는 아줌마들이 득실거리는 앙상블 가운데서 멋지게 오보에를 연주한다. 생각보다 훨씬 잘하더라. 집에서 썩어가고 있는 야마하 오보에를 생각하며.. 꼬마의 오보에 연주를 들으며... 오보에 레슨을 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다.

꼬마에게 우리 연주 듣지 말고 문자메세지나 계속 보내라고 이야기 한 후... 바흐를 한 번 쒹 연주... 다들 지난 번 보다 좋아졌다고는 하는데.... 녹음을 들어봐야 그게 사실인지 아닌 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내 귀엔 그게 그거 같았는데 말이다 ^^;;;

짧은 연습은 그렇게 끝나고 2주 후에 만나기로 했다 (무슨 사랑과 전쟁의 이혼법정이 떠오르는 멘트다... "2주 후에 뵙겠습니다"). 공연이 있는 주에도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듯 하여... 그냥 공연 날 오전부터 만나서 쭈욱... 연습을 하는 것으로 했다. 결국 공연 전까지 연습은 한 번만 하는 셈이다.

그나저나.. 오면서... 이번 공연이 끝나면 다음엔 좀 더 멋진 곡으로 합주 연습을 해야겠다는 포부를 다졌다. ㅡㅡ;; 한 5-6개월 연습하면 그럴 듯 해지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품으면서...

2009년 2월 22일 일요일

No 관객 콘서트 시리즈 첫번째 공연

사실 원래 자학당은 아닌데.... 
친구가 자학당 당수인지라... 그리고 그 친구와 같이 앙상블을 결성한  까닭에....
우리 앙상블의 첫 공연을 자학당과 함께 하게 되었다.

매우 자학스러운 분위기(?)에서 즐거운(!) 공연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상당부분은 첼로 연주들로 채워질 것으로 예상이 된다. 

물론, 관객이 없는 공연이기 때문에, 그날 연주를 하지 않으실 "순수관객"은 참석이 불가. ㅡㅡ;;
(포스터는 우리 앙상블의 비올라, 은아씨의 솜씨^^)


안드레아 아마티와 크레모나 제작자들

다들 아시는 것이겠지만....

출처Craig Purdy교수의 웹사이트. 다양한 자료들이 상당히 많으니 한 번 방문해 볼만하다.



안드레아 아마티 바이올린 연주

안드레아 아마티의 샤를9세 세트 바이올린으로 연주된 Matteis와 Biber의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연주자는 Simon Standage.
2006년 4월에 Royal Academy of Music에서 녹음되었다.



아래 샘플로 나온 클립은 2번째 트랙에 수록되어 있는 Matteis의 Passaggio Rotto.



이 곳에서 구입할 수 있다.

현존하는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 (The Surviving Instruments of Andrea Amati)

By 로렌스 위튼 II (Laurence C. Witten II)
October 1982, Early Music Vol. 10, No. 4, pp 487-494 (출처 링크)

  1. 4편의 글로 쪼개어 올립니다.
  2. 원래는 매우 작은 글씨 7장 정도 되는 아티클입니다. 원래 Early Music은 유료이긴 한데...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수업시간에 읽을 아티클로 쓰면서 그 대학 사이트에 올려 놓은 모양입니다. 게다가 일단은 27년 전의 글이고.... 그냥 번역합니다.;;
  3. 안드레아 아마티에 관한 글로는 아주 많이 인용되는 글이기도 합니다. 길지 않으면서도 안드레아 아마티에 대한 개론적인 내용으로는적합한 듯 합니다. 안드레아 아마티 악기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글이 길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4. 사진자료는 몇 개되지 않지만 원문을 참고하셔도 되고, 사우스 다코다 대학의 내셔널 뮤직 뮤지엄 사이트를 참고하셔도 되겠습니다. USD사이트의 샤를9세 사진은 정말 볼만하지요.
  5. "King"에 관한 동영상은 유튜브에도 있는데, 어떻게 사이즈가 축소되어졌는지, 또 원래의 악기대로 만들어 보는 과정에 관한 내용이지요. 7분이 안되는 짧은 영상입니다.
  6. 이 글을 쓴 위튼과 위튼 콜렉션은.. 이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1) 주석은 번역을 한 것도 있고 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다지 번역을 할 필요가 없어 보여서요^^

(주2) 완전한 초벌번역입니다. 즉, 엉망 진창 비문에 오타 투성이라는 말이지요..;;; 추후에도 수정을 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ㅡㅡ;; 읽으시는 분들이 양해해 주시길...

[번역] 현존하는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 4부

로렌스 위튼 II (Laurence C. Witten II),

October 1982, Early Music Vol. 10, No. 4, pp 487-494 (출처 링크)

안드레아 아마티 악기의 음색의 특성 (Tonal properties of the instruments of Andrea Amati)

최근에는 몇 명 되지 않는 상급 연주자들이 단지 한 대 또는 두 대 정도 안드레아 아마티 악기들만을 정기적으로 연주하기 때문에 이들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소리는 오늘날 학자들이나 음악가들 그리고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그러나, 3대의 가장 중요한 큰 바이올린들 (II-1~3), 유명한 오케스트라에서 최근까지 독주악기로 연주된 비올라 (III-3) 그리고 두 대의 가장 유명한 첼로들 (IV-1과 5)는 모두 뉴욕-코네티컷 지방에서 지난 25년간 숙련된 청중들 앞에서 그들의 음색의 특성에 대해 분명한 생각을 제공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연주되었었다. 여전히 들어 보아야 하는 것은 안드레아의 작은 바이올린들이지만, 마눅 파리키안 (Manoug Parikian)은 최근에 칼라일의 튈리 하우스 박물관 (Tullie House Museum)에서 그 중 하나를 연주하였고, 나에게 무척 만족하였다는 말을 했다. 

비록 바이올린의 음색에 대한 설명에는 보편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표준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작은 바이올린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내가 들어 보았고 그것도 여러 번 들었던 이들 악기의 사운드에 대한 나의 설명이 적어도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기를 희망한다. 첫번째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악기들 모두가 ‘크레모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힘, 음역 전체의 균등한 배분, 유연성 그리고 크레모나 현악기의 각인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적인 음질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나는 3가지 사이즈 모두가 사람들이 그런 고악기들에 대해 흔히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많은 파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후계자들 – 그의 아들들인 안토니와와 지롤라모, 지롤라모의 아들인 니콜라, 니콜라의 아들인 지롤라모 2세, 스트라디바리에 이르는 그리고 니콜라의 제자들과 모방자들 – 에 의해 만들어진 크레모나 악기들은 안드레아의 걸작들보다 더 폭넓거나 더 우월한 음색적인 특징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라 보르드 (La Borde)가 2세기 전에, 악기들이 만들어진 지 2세기 후에, 말한 것은 오늘날에도 진실이다: 'les meilleurs Violons que nous ayons encore, sont ceux que Charles IX, Roi de France, fit faire a Cremone par le fameux Amati, & que ce sont encore les plus beaux modeles possibles' (우리가 지금껏 가진 가장 좋은 바이올린들은 프랑스왕 샤를 9세가 가졌던, 크레모나에서 유명한 아마티에 의하여 제작된 악기들이고, 그것들은 여전히 가장 가능한 아름다운 악기들이다)[footnote]La Borde, loc cit[/footnote].

안드레아의 악기들은 대부분의 브레시아 악기들과 쥬제페 과르네리 델 제수의 악기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바리톤적인 어두움이나, 1690년 이후의 스트라디바리의 악기들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뚫고 나가는 듯한 밝음 – 얼마간의 날카로움 또는 신랄함 -  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날카로움은 안드레아 아마티 음질의 주요한 특징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안드레아의 악기들이 결정적인 공격을 할 만한 역량이 부족하다거나, 음이 스펀지같거나 퍼져버리거나 무르거나 단지 달콤하기만 하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남성적’, ‘고귀한’, ‘힘있는’, ‘따뜻한’, 그리고 ’뛰어난’ 같은 형용사들이 생각난다. 나의 견해로는, 비올라의 사운드는 내가 들어본 어느 악기도 다 똑같다. 모든 현들이 다 파워풀하고, 풍부하며, C현에서는 잊을 수 없는 나무의 질감을 가지고 있다. 1959년 12월에 스트라드지는 몇 년 후에 우리의 콜렉션이 된 장식없는 첼로의 소리를 ‘웅대한’이라고 묘사했다. 우리는 ‘King’ 첼로의 음색이 더 훌륭하다고 느낀다.

안드레아의 악기들이 크레모나에서 – 확장한다면 전 유럽에서 – 적어도 세기 동안은 본이 될 만한 음색적인 표준을 세웠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 시기 동안 그것에 필적할 만하거나 수준을 넘는 일은 많지 않았다. 훗날 제작자들은 약간 다른 음색의 특징을 찾고 개발했지만, 그들이 도달한 사운드가 안드레아의 것보다 우월한 것이라는 명제를 유지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안드레아가 바이올린족 악기를 발전시킨 것에 좀 더 큰 결과는 그 악기들이 널리 퍼져나갔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그가 모던한 형태, 크기와 음색의 특징을 부여한 악기들은 그 이후로 청중들을 사로 잡았고, 르네상스 이래로 음악문화의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그가 창조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소리가 독주악기로나 앙상블 악기로나 모두 그의 사후에 서양음악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어왔다고 말해도 아마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온 것들 중에서 가장 다양하고도 세련된 이 악기들의 소리를, 이러한 악기들에 대해 개발된 문헌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생각해내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것으로 보인다. 안드레아의 악기들로 – 크레모나, 옥스포드, 또는 뉴욕에서 - 연주하는 콘서트는 그의 서양음악에 대한 4세기 동안의 유례없는 공헌을 절절하게 축하하면서 밝게 빛날 것이다. 안드레아의 악기들 중 적어도 6대가 보여지는 전시회가 1982년 10월 9일부터 18일까지 크레모나의 팔라조 코뮤날레 (Palazzo Comunale)에서 계획되어 있다. 안드레아 모스코니의 감독 하에 이 전시는 1789년 혁명 때 프랑스 궁정악기 세트가 흩어진 이후로 안드레아 악기들이 가장 큰 규모로 한 곳에 모이게 되는 행사가 될 것이다.

[번역] 현존하는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 3부

로렌스 위튼 II (Laurence C. Witten II),
October 1982, Early Music Vol. 10, No. 4, pp 487-494

안드레아 아마티의 현존하는 악기들에 대한 논평 (Remarks on the surviving instruments of Andrea Amati) 

위의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은 3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1 프랑스 샤를 9세를 위하여 만들어진 세트에 속한 악기들로 2대의 작은 바이올린(Oxford and Carlisle), 한 대의 큰 바이올린 (Cremona), 한 대의 테너 비올라 (Oxford), 그리고 4대의 첼로 (all in private collections)이다. 이 세트가 몇 대였는지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악기에 문장이 장식되어 있고 이전 군주들의 문장은 후계자들이 좀처럼 사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또 이 세트가 샤를 9세가 사망한 후에 도착했었다면 아마도 새 군주인 앙리 3세를 위하여 다시 장식되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샤를 9세의 생전 (1574년 5월 30일에 사망)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아무도 이 악기세트가 프랑스 궁정에서 수백마일이나 떨어진, 상대적으로 작은 중심지였던 크레모나에서 만들어지게 된 일련의 상황들에 관하여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앙리 2세의 미망인이며 샤를의 어머니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지배했던 궁정의 확실한 이탈리아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탈리아 음악가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그들에게 잘 알려진 제작자에게 악기를 주문할 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의 출판문헌에서 제시되었듯이, 아마도 발다사르 드 벨지오이오소 (Baldassare de Belgioioso, 1587년 경 사망)이 중간에 있었을 것이다. 이 음악가는 통설로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는데, 1555년부터 카트린느 드 메디치를 위하여 프랑스 궁정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1582년에는 바이올린들이 아마 사용되었을 작품인 발레 코미크 드 라 루안느 (comique de la Royne)를 출판했다. 이 세트에 관한 간단한 언급은 쟝 벵자맹 드 라 보르드 (Jean-Benjamin de La Borde)의 Essai sur la musique (Paris, 1780)에 나온다[footnote]Vol. 1, p.358[/footnote]. 안드레아 아마티는 아베 세바스티앙-앙드레 시비르 (Abbe Sebastien-Andre Sibire)의 뛰어난 소책자인 La chelonomie (Paris, 1806)에서 바로 이 악기세트의 제작자로 칭해진다. 이 책의 연구에 의하면, 시비르가 정보 대부분을 그의 동시대인이며 위대한 프랑스의 제작자인 니콜라스 루포 (Nicolas Lupot, 1758-1824)로부터 얻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루포의 수리 라벨이 현재 또는 전에 크레모나의 큰 바이올린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프랑스혁명 시기 왕궁으로부터 악기들이 옮겨진 이후에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 중 적어도 몇 대를 검사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샤를 9세 세트는 의심할 바 없이 안드레아 아마티 또는 초기 현악기 제작자들의 현존 악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이것은 안드레아의 악기들 중에서 4 가지 종률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유일한 그룹이며 8대나 되어 가장 수가 많다. 이 악기들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궁정을 위하여 준비된 것들이며 장인으로서의 아름다운 솜씨, 음색의 특질 그리고 풍부한 장식은 비할 만하거나 뛰어넘을 만한 악기를 좀처럼 찾기 힘든 것이다. 

2 안드레아 아마티의 두번째 장식 악기 세트는 프랑스 국왕을 위하여 준비된 세트만큼 아름답다. 아마도 연구를 더 진행하면 이 세트가 어떤 후원자를 위하여 만들어지고 장식되어졌는지가 밝혀질 것이겠지만, 이탈리아의 공작급 귀족 가문일 것이다. 현재에는 오로지 3대의 악기만이 알려져 있고, 모두 개인소유이다. 두 대의 큰 바이올린과 테너사이즈에서 크기가 줄여진 한 대의 비올라가 그것이다. 이 세트에 작은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은 아직 나타난 적이 없다. 

3 장식없는 악기들은 한 대의 큰 바이올린, 두 대의 작은 바이올린, 한 대의 비올라 그리고 한 대의 첼로이다. 적어도 이 악기들 중 몇 대는 아마 피렌체의 메디치를 위하여 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비올라는 메디치가와 관련이 있는 – 약간 희미하게 – 브랜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드레아 아마티의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악기 하나는 1700년에 그 해의 익명의 재고목록에 따르면 메디치 궁정의 소장품에 속해 있었다[footnote]Florence, Archivio di Stato, Guardaroba Medicea, no.1117; published in V. Gai, Gli strumenti musicali della corte medicea e il Museo del Conservatorio 'Luigi Cherubini' di Firenze (Florence, 1969)[/footnote].

팔로 연주하는
(a braccio) 7현의 작은 리라는 전나무로 된 앞판, 메이플로 된 넥, 테일피스, 브릿지, 옆판, 뒷판과 어울리는 펙과 핑거보드와 테일피스에는 a mastacciolo [? 다이아몬드 모양의 마름모꼴]인 흑백의 끈이 있었고 사방의 가장자리에는 비슷한 퍼플링이 앞판과 뒷판 모두에 있었으며, 안쪽에 붙여진 종이조각에는 진사로 적혀진 라벨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Andrea Amati in Cremona 1573'라고 적혀 있었다. 대리속 무늬의 결이 있는 나무활 [즉, 아마도 스네이크 우드]에는 프로그에 하트모양의 디자인이 있었으며 오래된 포플라 케이스에는 두 개의 후크와 구멍이 있었다. 

붉은 잉크로 적힌 라벨은 아마 위의 I-3에서 언급된 작은 바이올린에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마지막 25년과 19세기 초에 가장 위대한 현악기 수집가였던 이그나티오 알레싼드로 코지오 디 살라부에 백작 (Count Ignazio Alessandro Cozio di Salabue)은 안드레아 아마티가 제작한 진품 악기들을 만나기 위해 많은 시간동안 결연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는 원래는 리라였었을 ‘비올라’와 그가 ‘레벡’이라고 묘사한, 당시에는 안드레아가 만든 것으로 여겨졌던 3현 악기를 보았다. 그의 유명한 카르테지오 (Carteggio)에서 코지오는 그림으로 묘사하고 몇 가지 자세한 서술도 했다[footnote]Transcr. R. Bacchetta, ed. G. Iviglia (Milan, 1950), p.13[/footnote]. 큰 ‘비올라’는 코너가 두 개 밖에 없었고 밑의 안쪽으로 구부러진 립을 가지고 있었는데, 브레시아 악기와 비슷했고 소문에 의하면 원래는 아마도 리라였을 브레시아 악기였을 것이라고 한다 (불행히도 어느 것도 정체 파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오리지널 헤드가 남아 있지 않다). 사운드홀은 코지오의 스케치에서도 크레모나의 것이라기 보다는 더 브레시아 (또는 베니스의?) 악기처럼 보이고, 악기는 가스파로의 라벨을 달고 있다.

이 것은 메디치의 리라였을까? 그것은 매우 의심스럽고, 코지오가 인용한 카를로 만테가자 (Carlo Mantegazza)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아 아마티의 작품이라는 것은 심지어 더 의심스럽다. 이 존경할 만한 수집가가 안드레아 아마티의 바이올린족의 악기를 과연 만날 수 있었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어쨌거나, 메디치의 리라 다 브라치오는 영영 잃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 (Bartolomeo Cristofori)가 수집품의 또다른 품목을 추가한 1716년에 이미 메디치가의 관할을 벗어났다[footnote]Transcr. F. Soldi in Atti dell'accademie del reale istituto musicale di Firenze, 12 (1874), pp. 191-7[/footnote]. 그는 아마티가의 다른 제작자들과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바이올린 형태의 몇몇 악기들에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은 아니다. 내 의견으로는 위튼 콜렉션의 큰 바이올린과 이전에 우리가 소유했던 첼로는 아마도 다른 악기들보다는 이른 시기의 작품인 것 같다. 그들의 독특한 f홀은 더 좁고 더 똑바로 세워져 있으며 퍼플링은 좁고 다른 악기들보다는 덜 섬세하다.

안드레아의 현존 악기들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장 독특한 점은 아마도 나무의 선택일 것인데 이는 알려진 모든 악기에서 실질적으로 동일하다. 윤곽과 아칭 프로그램은 매우 모던하고, f홀 패턴은 독창적이어서 안드레아의 사후에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더 전형적인 모던한 성격의 디자인으로 좀 빨리 변형되었다. 멋진 스크롤은, 슬프게도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S. F. 사코니 (S. F. Sacconi), 렘버트 벌리처 (Rembert Wurlitzer), 다리오 다틸리 (Dario d'Attili)와 다른 전문가들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스크롤과 4세대 전의 안드레아의 공방에서 나온 스크롤들  간의 디자인의 강한 유사성에 대해 언급했었다. 이 화려하게 디자인되고 조각된 스크롤의 중요성은 그 모든 하나하나의 특성이 그 후의 바이올린 제작자 세대들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작은 크기의 바이올린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아직 아무도 왜 두 가지 크기의 바이올린이 있었는지, 또 그들의 피치가 서로 달랐는지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띄게 작은 크기의 바이올린들 - 매우 자주 342mm이고 안드레아 아마티의 패턴- 은 크레모나에서, 다른 많은 제작의 중심지들에서 이탈리아 바이올린 제작자들에 의하여 안드레아의 시대로부터 18세기에도 쭉 만들어졌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안드레아 아마티의 4가지 크기의 바이올린 패턴은 수 세기에 걸친 사소한 수정들이 있기는 하지만, 세계표준이 되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온 그의 몇 대의 악기들에서 발견되는 디자인이 오늘날에도 많은 생산자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재해석되어 질 뿐만 아니라, 4세기보다 더 이전에 그의 공방에서 제작된 놀라운 악기들이 오늘날의 가장 까다로운 조건의 연주회에서도 그 악기들의 소리가 다른 어느 제작자의 악기들과도 성공적으로 겨룰 수 있을 만한 힘과 음질을 가지고 연주되고 있다.

[번역] 현존하는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 2부

로렌스 위튼 II (Laurence C. Witten II),

October 1982, Early Music Vol. 10, No. 4, pp 487-494

안드레아 아마티의 현존 악기 목록 (List of surviving instruments of Andrea Amati)

I. 작은 바이올린들 (Small violins)

1 작은 바이올린, 342mm. 1560년에서 1574년 사망 시까지, 모왕, 까뜨린느 드 메디치 (Catherine de' Medici)의 섭정 하에서 집권했던 프랑스의 샤를 9세 궁정을 위하여 제작된 악기 세트의 하나이다. 이 세트에 속한 악기라고 알려져 있는 악기들은 모두 왕의 제명과 문장이 그려져 있고 금박이 되어 있다. 가운데 바우트의 옆판에는 대문자 왕관이 쓰여진 K (Karolus)가 금색으로 쓰여져 있고, 제명인 'PIETATE ET IVSTITIA'도 금색으로 옆판을 둘러 쓰여져 있으며, 뒷판에는 금박으로 fleurs-de-lis (프랑스 왕가를 상징하는 붓꽃)과 추가로 2개의 왕관이 둘러진 K, 'Pietate' 제명과 함께 기둥, 그리고 날아가는 작은 천사 (putti)를 포함한 구조에 둘러싸인 정의의 여신의 모습이 있다. 펙박스와 스크롤은 검은 칠과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다. 작은 바이올린은 상당히 낡아 있으나, 그 이외의 상태는 좋은 편이다. 라벨의 윗 줄은 해독하기 어렵고 두번째 줄에는 보이든 (Boyden)에 따르면, 'Cremona MDLXIV'라고 쓰여 있으나 그는 이 라벨이 인쇄된 것인지 여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셋업은 모던이다 (원래의 넥과 피팅은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어느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에서도 남아 있지 않다). Oxford, Ashmolean Museum, bequest of Arthur F. Hill, 1939; D. Boyden, Catalogue of the Hill Collection of Musical Instruments (Oxford, 1969), no. 10. 

2 작은 바이올린, 342mm. 샤를 9세 세트에 속한 또 다른 장식 바이올린으로 이것은 실질적으로 아쉬몰리언 (Ashmolean) 소장품과 동일한 것이다. 나는 이 바이올린을 본 적이 없고, 보존상태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악기는 상당히 최근까지 성공적으로 연주되었었다 (아래의 음색의 특징에 관한 부분을 보라). Carlisle, Tullie House Museum; The Galpin Society 21st Anniversary Exhibition, European Musical Instruments (London, 1967) [catalogue], no.571. 

3 작은 바이올린, 약 342mm. 매우 훌륭한 상태의 장식없는 악기로 붉은색 잉크로 손으로 쓰여진 라벨 (아마도 진품은 아닐 듯한)을 달고 있으며 1564년으로 되어 있다. 나는 1960년대에 이 아름다운 바이올린을 검사해볼 기회를 가졌었다. Great Missenden, Bucks., collection of Desmond Hill. 

4 작은 바이올린, 원래는 약 342mm, 354mm로 확대됨. 이 장식없는 악기는 19세기에 변형되어졌다. 앞판과 뒷판 모두 퍼플링 바로 안쪽이 잘려졌고, 더블 퍼플링으로 된 새로운 경계가 덧붙여져 악기를 “풀 사이즈”로 확대시켰으며, 옆판은 확대되고 그에 맞게 다시 구부려졌다. 스크롤은 원래의 것이 아니다. Connecticut, Witten family collection. 

II 큰 바이올린들 (Large violins)

1 장식된 큰 바이올린, 354mm, 샤를 9세의 세트에 속함. 비록 이 바이올린은 상당히 낡았으나, 장식의 주요한 특징들은 구별할 만하고 놀라운 음색의 품질을 지니고 있다. 이 악기는 파리의 니콜라스 루포 (Nicolas Lupot, Paris)의 수리 라벨을 가졌었고 아마도 아직 가지고 있을 것이다. Cremona, Palazzo Comunale, formerly New York, collection of Henry Hottinger; illustrations, some in colour, in M. Tanzi and A. Mosconi, Il Palazzo Comunale e le sue collezioni d'arte (Milan, 1981), and The Henry Hottinger Collection (Rembert Wurlitzer: New York, 1967), pl.I. 

2 장식된 큰 바이올린, 354mm,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후작을 위하여 제작된 세트에 속함. 장식의 아웃라인은 샤를 9세 세트를 위한 장식과 비슷하나 옆판을 둘러 금색 글자로 'QVO VNICO PROPVGNACVLO STAT STABITQ(ue) RELIGIO'라는 제명을 달고 있고 이 제명은 제명사전에는 없는 것이다. 뒷판에는 fleurs-de-lis 이외에, 몇 가지 글자가 암호처럼 엉켜 있고 같은 제명이 반복적으로 쓰여진 화환으로 둘러싸여 있다. 상당히 낡았지만 이 악기는 좋은 상태이고 음색도 뛰어나다. 라벨은 없다. New York, private collection. Ruggiero Ricci가 음반에서 이 악기를 연주했다. The Glory of Cremona, Decca DXE 179, side 1, band 1. 

3 장식된 큰 바이올린, 354mm, 역시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후작을 위하여 제작된 세트에 속하고 위의 II-2와 아래 III-2의 악기들과 같은 장식을 가지고 있다. 이 악기는 아마도 남아 있는 큰 사이즈 바이올린들 중에서 가장 덜 사용된 것일 것이다. 앞판과 뒷판의 가장자리는 더블로 되어 있지 않고 뒷판은 엣지 쪽으로 두드러진 홈이 있어서 초기 아마티 공방 (그림 1) 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이 악기도 시간의 흐름을 완전히 비껴가지는 못했다. 그림과 금박의 대부분이 어느 시점에서 고의적으로 제거되어졌는데 아마도 원래의 소유권을 감추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러나 앞판에는 흔적만 남아 있는 것과는 달리 뒷판과 립은 원래의 바니쉬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다 (그림 2). 스크롤은 아마 원래의 것이 아닐 것이며 라벨은 없다. 충실한 바로크 아웃라인과 길고 구부러진 코너 – 다른 알려진 악기들은 훨씬 더 닳아 있다 – 는 초기의 바이올린으로는 놀라운 것이다. 우리는 니콜라 아마티, 안드레아 과르네리, 지오반니 바티스타 로제리와 로제리의 아들인 피에트로 지아코모와 같은 기술적인 장인들을 훈련시킨 훗날의 아마티의 작품들에서 이런 점을 반복적으로 목격하게 될 것이긴 하다. 이 악기는 뛰어나고 매우 힘찬 음색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런던의 존과 아서 비어 (John & Arthur Beare)가 다시 발견하였다. Connecticut, Witten family collection. 

4 장식없는, 위의 II- 1~3 보다 좁고 약간 긴 (355- 6mm) 패턴의 바이올린으로 원래의 스크롤은 없다. 매우 닳아있고 크랙이 많으나 사운드홀의 절개, 아칭 그리고 재료의 선택에서 안드레아 아마티 악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철자법에서 설명하기는 어려운 실수가 있지만 아마도 진짜일 듯한 인쇄된 라벨을 가지고 있다 - 'Andreae Amati in/Cremonae MDLXXII'. 라벨은 위의 I-1에서 본 아쉬몰리언의 작은 바이올린에서의 손상된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Connecticut, Witten family collection, formerly Finland, collection of Wahl. 

III 비올라들[footnote]나는 몇 가지 추가적인 악기들 (모두 비올라)을 목록에서 제외하였는데, 그것들은 종종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라고 추정되어지는 것들이다. 그 중 두 가지 악기는 S. F. Sacconi, Isegreti di Stradivari (Cremona, 1972), p. 16, left의 장식된 비올라들과 같은 아마티 공방의 훗날의 작품들 (1585-95) 이라고 믿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아마티의 초기 모방작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며 아마도 이탈리아산은 아닌 듯 하다.[/footnote] (Violas) 


1 장식된 비올라, 470mm, 샤를 9세 세트에 속함. 이 세트의 어느 다른 악기들 보다 더 장식의 패턴이 많이 있는, 이 잘 보존된 비올라는, 비록 현대의 올드 스타일의 피팅을 가지고 있지만, 원래의 테너 사이즈 비올라들 중에서 최초의 크기를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것이다. 보이든은 1574년으로 된 라벨이 인쇄된 것인지 손으로 쓴 것인지, 그가 이것을 진짜로 판단하는지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Oxford, Ashmolean Museum, bequest of Arthur F. Hill, 1939; Boyden, Catalogue of the Hill Collection, no. 11. 

2 장식된 비올라, 409mm로 크기가 줄여졌으며,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 후작을 위한 세트에 속함 (위의 2 대의 큰 바이올린들 II-2와 3을 참조). 이것은, 바디길이와 넓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안드레아 아마티 공방에서 생산된 장식악기의 2번째 세트에서 가장 잘 보존된 악기이다. 스크롤의 소용돌이는 원래의 것이지만 펙박스는 교체된 것이고, 앞판의 바니쉬는 복원되어졌다. 라벨은 없다. 이 비올라는 스트라드지에서 소개되었고 (The Strad (35 (1925), pp.705-6 과 70 (1959)), 1981년 11월 5일의 런던의 소더비 경매에서 판매되었다. Connecticut, Witten family collection, formerly in the collections of C. B. Lutyens and Mrs Hope Hambourg. 

3 장식없는 비올라, 419mm로 크기가 줄여졌고, 진짜는 아닐 것으로 보이는 손으로 쓴 라벨을 달고 있는데, 이 라벨은 아쉬몰리언 비올라 (위의 III-1)에서의 글귀를 반복하고 있다. 크기가 줄어든 점을 제외하면 매우 잘 보존되어 있다. 스크롤의 뒷족에 왕관 모양의 구형으로 브랜딩 되어 있는데 아마도 피렌체의 메디치의 대공작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1595년의 아마티 비올라에는 메디치가 문장이 그려져 있는데 같은 브랜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비올라는 19세기에 윌튼경의 소유였다. 1904년에 런던의 피쉬몽거즈홀 (Fishmongers' Hall) 의 음악 초대전 (Music Loan Exhibition) 에 전시되어 있었고 (catalogue (London, 1909), p.158), 1922년 보스톤의 진여사 (Mrs Ginn)에게 판매되었다. 1940년대에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비올라 수석인 윌리엄 린써 (William Lincer)의 소유여서 연주회와 음반에서 자주 들어 볼 수 있었다. New York, 킴 카쉬카쉬안의 소유, formerly Connecticut, Witten family collection; illustrations in S. F. Sacconi, I segreti di Stradivari (Cremona, 1972; Eng. trans., 1979), figs.10-12. 

IV 첼로들 (Violoncellos) 


1 장식된 첼로 ‘King’, 프랑스 샤를 9세 세트에 속함. 다른 모든 현존하는 안드레아 아마티의 첼로와 거의 모든 초기의 일반적인 크레모나 첼로들과 같이 이 악기도 원래는 매우 큰 크기였고 바디길이는 약 795mm였다. 지금은 757mm정도인데, 중심선과 앞판의 위 아래, 그리고 뒷판을 잘라내어 길이가 줄어든 것이다. 장식의 대부분은 보존되어 있으며 스크롤은 원래의 것이다. 1872년 런던 사우스 켄싱턴 박물관 (South Kensington Museum) 의 고악기 특별전 (Special Exhibition of Ancient Musical Instruments)에서 (catalogue by Carl Engel (London, 1872), no.183), 그리고 1904년 런던의 음악 초대전에서 (catalogue (London, 1909), p. 159, 여기서 교황 피우스 5세 (Pius V)가 샤를 9세에게 헌정한 악기라고 언급됨) 전시되었다. Connecticut, Witten family collection; W. Sandys and S. A. Forster, The History of the Violin (London, 1864), p.203; illustrations of the scroll and pegbox in Sacconi, op cit, pp.16-17. 

2 장식된 첼로, 약 750-60mm, 샤를 9세 세트에 속함. 나는 이 악기를 본 적은 없지만 사진으로 판단하면, 원래의 장식 대부분이 남아 있어 매우 잘 보존된 악기이다. 크기는 줄여졌고 스크롤은 원래의 것은 아니다. Europe, private collection. 

3 장식된 첼로, 샤를 9세 세트에 속함. 이 악기는 사진만 보았는데 심각하게 잘려져서 원래의 스크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장식은 상당부분 남아 있다. Western USA, private collection. 

4 장식된 첼로, 샤를 9세 세트에 속함, 740mm. 이 악기도 심각하게 잘리워 졌는데, 바이올린 제작자이고 전문가인 조셉 샤르동이 1,220 프랑으로 구입하였고 (Paris, Hotel Drouot, 22 December 1908, lot 1), 최근까지 그의 후손들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이 악기는 1982년 6월7일에 다시 판매되었고 (at the Hotel Drouot on 7 June 1982 as lot 40), 경매 카탈로그에는 이 악기의 컬러 사진이 실려 있다. 

5 장식없는 첼로, 약 755mm로 크기가 변형됨. 원래의 스크롤은 아니며 리바니쉬됨. 이 악기는 1569년으로 되어 있는 인쇄된 라벨을 달고 있으나,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진과 설명은 The Strad, 70 (1959), p.836. USA, private collection, formerly Connecticut, Witten family collection.

[번역] 현존하는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 1부

로렌스 위튼 II (Laurence C. Witten II),

October 1982, Early Music Vol. 10, No. 4, pp 487-494

1525년에서 1575년까지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중세 후기의 현악기 – 특히 비올라 다 브라치오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는 변형의 과정을 거쳤고 이 시기가 다 가기 전에 바이올린족 악기로의 완전한 발전이 이루어 졌다. 19세기 후반에 볼로냐의 바이올린 역사 전문가인 지오반니 리비 (Giovanni Livi)[footnote] 'Gasparo da Salo e l'invenzione del violino', Nuova antologia, 3rd ser., 16 (1891), pp.663-81; I liutai bresciani (Milan, 1896)[/footnote]는 초기 제작자들에 관한 연구들에서 의존했었던 많은 기록에 대한 조사를 수행했다. 1930년대에는 누가 바이올린족의 “창조자”인지 관한 논쟁의 시기가 이어졌었다[footnote]See C. Bonetti, 'La genealogia degli Amati liutai e il primato della scuola liutistica cremonese', Biblioteca storica cremonese, 5 (1937), pp.3-63; A. M. Mucchi, Gasparo da Salo: la vita e l'opera (Milan, 1940); O. Foffa, Pellegrino da Montichiari inventore del violino (Brescia, 1937).[/footnote]. 늘날, 우리는 이 중요한 악기족의 모든 특징을 다 발명해낸 것은 한 사람이 아니며 많은 장인들이 그 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당시 베네치아의 화집[footnote]Summarized in my article 'Apollo, Orpheus, and David: A Study of the Crucial Century in the Development of Bowed Strings in North Italy 1480-1580 as seen in Graphic Evidence and some Surviving Instruments', Journal of the American Musical Instrument Society, 1 (1975), pp.5-55[/footnote]은 북동부 이탈리아의 위대한 상업 및 군사자본에서 그러한 발전의 명확한 패턴을 보여 주지만, 크레모나, 브레시아와 볼로냐 같은 바이올린 제작의 중심지, 또는 밀라노와 같은 아마도 바이올린제작이 활발했을 듯한 곳에 관한 비슷한 문서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새로운 출판물, 복사물, 전시회들의 덕분으로 또 직접 방문을 함으로서 초기 찰현악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현존하는 악기들과 문서들에 대하여 이전에 가능했었던 것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증가된 지식의 결과로서, 안드레아 아마티가 현대 바이올린족의 크기를 표준화하고 구조적인 특징을 명확하게 했던 최초의 마스터로 등장하게 되었다. 다른 초기 북부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제작자들과 관련하여 안드레아 아마티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도상학적인 증거들과,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악기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함께, 언급된 출판물들[footnote]이들 연구들은 주로 문헌적인 자료들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들은 종종 악기의 사진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현재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속성들을 다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footnote]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것들을 조사하는 것이 유용하다. 초기 바이올린 제작자들과 그들의 악기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브레시아 (Brescia) 


페레그리노 또는 펠레그리노 드 미켈리 (Peregrino or Pellegrino de' Micheli)는 1520-22년 경에 브레시아 근방의 몬티치아리 (Montichiari)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자네토 (Zanetto, c1489-1564)였는데, 지오반니 마리아 란프란코(Giovanni Maria Lanfranco)가 1533년에 브레시아에서 출판한 Scintille di musica의 마지막 판권 페이지에서 칭송하던 제작자였다. 자네토의 서명이 있는 두 대의 비올이 알려져 있으나 그 악기들이 사실은 그의 아들의 손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한데, 제작솜씨, f홀들, 스크롤이 의심할 바 없이 아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악기들은 자네토의 말년에 제작되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고, 아마도 1564년[footnote]A cornerless tenor viol in the Brussels Conservatoire is no. 1410 in V.-C. Mahillon, Catalogue descriptif et analytique du Musee instrumental du Conservatoire royal de musique de Bruxelles, 3 (Brussels, 1912), where its original label, reading 'Zanetto in Bressa' in chancery script, is not noted; most unfortunately the label is now apparently lost, though I saw it in situ and a photograph of it in the viol is preserved. A small bass viol of identical workmanship with a similar manuscript label, is in the Witten family collection, Connecticut.[/footnote]에서 오래 전은 아닐 것이다. 페레그리노는 뛰어난 비올라들을 꽤 많이 제작했는데 그 중에서 내가 본 것은 3대[footnote]그 중의 하나는 the Witten family collection에 속해 있다.[/footnote]이다. 페레그리노가 바이올린도 만들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몇 개의 출판물들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 악기들을 본 적이 없으며 그들의 진위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첼로가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적은 없다. 페레그리노의 라벨은 종종 고딕체로 인쇄되었거나 손으로 씌여졌고 날짜가 기록된 적은 없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가 1564년에 사망한 이후에야 악기들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가스파로 베르톨로티 (Gasparo Bertolotti)는 1540년에 살로(Salo)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하여 가스파로 다 살로라는 이름으로 매우 유명하게 된 것이다). 그는 1565년에 브레시아에서 자신의 공방을 열었고 그 곳에서 1609년 사망할 때까지 일했다. 현존하는 그의 악기를 조사한 적은 없지만, 상당 수의 여러가지 크기와 종류의 비올들이 알려져 있고, 적어도 10 또는 15대의 비올라 (역시 여러가지 크기의)와 훨씬 적은 수의 바이올린들도 알려져 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남아있는 첼로는 없다. 가스파로의 작품이라고 여겨지는 매우 많은 악기들은 대부분 그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들은 도매상들이 가스파로의 이름으로 초기 브레시아 악기들에 다시 붙인 라벨들 때문에 우리가 오늘 날에는 누구인지 알기 어려운 다른 브레시아 제작자들의 작품인 경우가 보통이다. 이렇게 라벨을 다시 붙이는 관습은 가스파로의 시대 또는 그의 사망 직후에 시작되었던 것일 것이다. 가스파로의 진품 라벨 중 어느 것도 날짜가 적혀있지 않으며, 이는 다른 모든 초기 브레시아 라벨들도 마찬가지이다.

베니스 (Venice) 


비록 위대한 베니스 제작자인 벤투라 디 프란체스코 드 마케티 리나롤(Ventura di Francesco de' Macchetti Linarol)을 찬양하는 전기적 연구서는 없으나 그는 1581년[footnote]이 악기는 전에 파두아 근방의 Palazzo Catajo 의 Obizzi 가의 수집품에 속해 있었고 현재는 비엔나의 Kunsthistorisches Museum에 있다; see J. von Schlosser, Die Sammlung alter Musik- instrumente. beschreibendes Verzeichnis (Vienna, 1920), no.C.96.[/footnote] 뛰어난 바이올린을 만들었고 베니스와 파두아에서 1577년에서 1591년까지 많은 비올과 리르 다 브라치오를 제작하였다. 지금까지 출판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악기들은 주로 비엔나와 라이프찌히의 콜렉션들이다[footnote]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Leipzig, Musikinstrumenten- Museum der Karl-Marx-Universitat, including the Heyer Collection[/footnote]. 위튼 콜렉션(Witten family collection)에 있는 작은 베이스 감바는 1582년 베니스라고 서명되어 있으며 절묘한 솜씨로 제작되어져 있는데 1585년 파두아에서 만들어진 더블 베이스와는 작은 사이즈로 된 쌍둥이라고 할 수 있다[footnote]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Schlosser, op cit, no.C.78[/footnote]. 찰스 비어(Charles Beare)는 최근에 전형적이고 아름다운 작은 베이스 비올을 취득하였다. 그것은 코너가 없는 디자인이며 뒷판의 메인 바를 없애 남아있는 서명을 볼 수 있는데, 'Ventura de francesco Linarol in Venetia i59i'라고 되어 있다. 벤투라의 아버지인 프란체스코도 역시 잘 알려진 제작자였다. 1563년[footnote]Great Missenden, Bucks., collection of William E. Hill & Sons[/footnote]에 그가 만든 리라 다 브라치오가 남아있으며 베니스와 브뤼셀 콜렉션에 몇 개의 비올이 있다. 1535년 경부터의 베니스의 그림에서는 꽤 자주 큰 비올라들이 나타나지만, 초기의 발전기에 만들어진 베니스산 비올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팔라조 카타조[footnote]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Schlosser, op cit, no.C.70[/footnote]의 비올라 다 브라치오이다. 나는 이 악기가 대략 1540년에서 50년 정도 (슐로써 (Schlosser)의 주장처럼 1500년까지는 아닐 것이다)의 악기라고 생각하며 프란체스코 리나롤이 서명한 악기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도상학적인 자료들은 그렇게 큰 비올라가 베니스에서 사용되어졌음을 보여주지만, 내가 아는 한 그것들은 결코 첼로를 묘사한 것은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첼로로 현존하는 것은 도리고 스필만(Dorigo Spilman)의 것으로 현재는 베니스에 있다. 그는 또한 1591년 파두아에서 포쉐트 (pochette, 'TanzmeisterGeiglein')에 서명을 했었다. 그러나 이 악기는 남아있지 않다[footnote]See Schlosser, op cit, no.C.lll and C.114.[/footnote]. 

볼로냐 (Bologna)


1628년[footnote]United Kingdom, private collection[/footnote] 볼로냐에서 안토니오 브렌치(Antonio Brenzi)에 의하여 서명된, 좀 큰 크기의 훌륭한 비올라는 분명히 오늘날 알려진 볼로냐 최초의 바이올린족 악기이다. 그러나 이 제작자 (브렌티우스 (Brentius) 또는 브렌시우스 (Brensius)로 알려진)는 거의 4세기 전에 살았었음이 확실한데, 라이프찌히에 있는 'Antonius Brensius Bonon. 1592' 라고 서명된 잘 생긴 베이스 리라 다 감바가 이를 증명한다[footnote]Leipzig, Musikinstrumenten-Museum der Karl-Marx- Universitat, formerly Cologne, private collection of Wilhelm Heyer; G. Kinsky, Musikhistorisches Museum von Wilhelm Heyer in Koln (Cologne, 1910- 12), no.782. See also E. Winternitz, Musical Instruments of the Western World (London, 1967), no.l1.[/footnote]. 예전의 바이올린 제작자들에 관한 사전에서 안토니오 브렌스우스 또는 브렌치가 불가능할 만큼 이전 시기에 상당히 많은 악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안드레아 아마티 전생에 동안 또는 가스파로와 페레그리노의 초기 제작기에 바이올린족 악기들이 볼로냐에서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없다. 

밀라노 (Milan) 


내가 아는 한, 1660년에서 75년 경 이전에 만들어진 밀라노산 바이올린족 악기는 남아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 도시는 초기 시기에 바이올린 제작의 중심지로 간주될 수는 없을 것이다. 

크레모나 (Cremona) 


안드레아 아마티가 살던 곳과 출생일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보네티(Bonetti)는 그가 1505년 경에 살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으며 1580년에서 81년 경에는 45년 정도 현악기 제작 장인으로 크레모나에서 일했었다는 점을 확신을 가지고 보여주었다. 안드레아의 사망 이전에 크레모나에서 다른 제작자에 의하여 만들어진 어떤 종류의 악기도 알려져 있지 않다. 16세기 크레모나산 악기 중에서 안드레아와 그의 두 아들이 아닌 다른 제작자에 의한 악기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아마티가에서 제작된 상당 수의 현존하는 악기들 모두가 바이올린족의 악기들이다. 그리고, 주요 북부 이탈리아 중심지들에서 제작된 현명악기(chordophones)들은 종류와 수에서 많은 차이들을 가지고 있다. 비올라는 페레그리노와 가스파로의 브레시아 공방들의 제작품들에서 상당한, 그러나 지배적이라고 할 만큼은 아닌,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바이올린을 덜 만들었고 아마도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첼로는 거의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베니스에서는 비올과 리라를 주로 제작하였고 그 중에 오직 1대의 16세기 바이올린, 1대의 바올라 다 브라치오 – 이것은 완전히 발전한 모습의 바이올린족 악기는 아니지만 – 그리고 파두아 근방에서 아마두 1600년 이전에 제작되었을 1대의 첼로가 있을 뿐이다. 대조적으로, 크레모나에서는 16세기 제작품으로 알려진 모든 악기가 바이올린족의 악기에 속하며 모두 아마티가의 작품들이다. 만약 남아있는 악기들이 좋은 표본이라면, 이런 악기들의 생산은 매우 견고한 것이다. 

오늘날, 안드레아 아마티의 공방에서 생산된 4가지 크기의 악기들이 알려져 있다. 작은 크기의 바이올린들은 342mm정도의 바디길이를 가지고 있고, 좀 더 큰 크기의 바이올린들은 354mm정도이다. 매우 큰 비올라는 테너 사이즈인데 470mm정도이고, 첼로도 역시 매우 큰 사이즈이나 사이즈가 줄여지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없다. 원래의 바디길이는 약 795mm정도로 추측된다[footnote]W. Henry, F. Arthur and Alfred E. Hill, Antonio Stradivari, his Life and Work (London, 1902), appendix IV, state: 'We are only able to give the approximate dimensions of the Violoncello as made by the successive generations of the Amatis, as no example is known to us, the proportions of which have not been diminished.' They believed a body length of 31 inches, about 790mm, 'to be fairly accurate' and gave the length of the 'Aylesford' Stradivari cello of 1696, an instrument of the standard large Cremonese size, as 31 1/4 inches. Although uncut then and later while owned by Gregor Piatigorsky, this cello was reduced in size in the 1960s by a dealer to facilitate its sale.[/footnote].

2009년 2월 15일 일요일

어느 선생님과의 일 년

대학교부터는 빼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 동안의 선생님들을 돌이켜 본다. 나쁜 기억력 때문에 모든 선생님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때의 선생님들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가장 좋았던 분들은 기억이 난다. 단순히 교사라는 직업으로서만 선생님이로 존재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 마음을 표현하셨던 분들이 계셨었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집에 가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셨을 선생님들이 분명히 계셨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잘 몰랐었다.

대학 원서를 쓸 무렵,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특별히 어느 과를 가라고 강요하신 적은 없었다. 나 자신도 특별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고...  다른 많은 아이들처럼 나도 내 성적에 맞는 학교와 전공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세상이 내가 입학할 학교와 전공으로 나를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버지께 "아빠, 제가 어느 과에 갔으면 좋으시겠어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기는 하다. 그 때 아빠는 사범대를 가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었다. 평생 교육부에서 일하셨었고, 나중에 은퇴해서 작은 학교를 세우는 꿈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의 말씀이었는데, 나는 '내 점수로 사대를 가면 너무 아깝잖아'라는 턱없이 오만한 생각을 하면서 무시했었다. 그렇지... 그렇게 오만하고 세속적인 생각들로 가득했던 나는 선생님이 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이 확실히 맞는 것이었다.

그리고 20년 후에, 나는 둘째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냈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그 동안 또 많은 선생님들을 만났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모두들 아이들을 사랑하는 모습이 느껴지는 좋은 분들이었다. 오래 전엔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들의 마음을 잘 몰랐던 나는 이제, 나보다 훨씬 어린 우리 아이의 유치원 선생님들, 내 또래의 우리아이의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만나면서 이상하게도 그 분들의 마음이 이젠 훨씬 더 잘 보인다. 이제 나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가 되었기 때문인가 보다. 그런데, 올 해 만난 한 선생님은 정말 특별한 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만 6년째 맡아 오고 계신 그 선생님은 40대 중반의 남자 선생님이다.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선생님은 내년에 개그맨 데뷔를 준비 중이라는 말을 믿고 있을 정도로 재미있는 분이다. 얼마나 부지런하신지 주말에도 쉬지 않고 늘 가족들과 어딘가 다녀오시곤 하시고... 하교 시간에, 선생님과 아이들이 헤어질 때마다, 이 선생님은 아이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꼭 안아주신다. 선생님은 매일 매일 학급 홈페이지에, 아이들에게 한 장, 부모님께 한 장 편지를 쓰신다. 그걸 프린트해서 나누어 주고 "새끼손가락"이라는 공책에 붙이게도 하신다. 그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내는 숙제는, 봄놀이 가기, 주말에 실컷 놀기, 비오는 날 나가서 맨 발로 물 밟아 보기, 눈 사람 만들기, 달 보고 소원빌기, 나무 심기.... 그런 것들이다.

어제는... 이제 그 선생님과 보낸 일 년이 끝나서 곧 모두 지워져 버릴 학급 홈페이지에서 선생님이 일년 동안 써 놓은 편지들을 읽어 보다가, 너무 아쉬워서 모두 다 저장을 했다. 다시 꼼꼼히 읽어 보니... 선생님이 얼마나 많이 그 여덟살짜리 아이들을 사랑했는지, 그 넘쳐나는 사랑을 학부모들과 얼마나 나누고 싶어했는지가 참 많이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또 공부 잘하는 아이들보다는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아이들, 주위의 모든 것에 사랑을 느끼는 아이들로 키우고 싶은 선생님의 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그 어느 학교보다 교육에 열올리는 학부모들이 많은 학교다. 영어 유치원을 안다녀본 아이는 우리 아이 밖에 없는 듯 하고... 학년이 올라가면 아이들이 과외 서너개씩은 다 하고... 맞벌이 엄마라서, 또 그다지 또래 아줌마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라서, 엄따가 되어버린 나로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걱정만 될 뿐인 그런 분위기다. 그래서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지를 늘 고민하고 답답해했었다.

그런데, 그런 학교에 이런 선생님이 계셨던 거다. 사실... 문제는 학교나 선생님이 아니었다. 선생님이 써 놓은 글들을 읽으면서... 오히려 선생님은 지치고 스트레스 받는 아이들에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분이었던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2학년이 되고, 점점 더 점수, 사교육, 시험... 이런 경쟁으로 가득찬 공간으로 들어가게 될 아이들에게 그래도 여덟 살때 만큼은 행복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싶었던 선생님의 마음이 그 글들 속에 가득 들어 있었다. 우리 아이는 20년 30년 후에도 초등학교 1학년 시절, 이 선생님과 함께 했던 시간 만큼은 아름답게 기억할 수 있겠지.

그 동안 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으면서, 참 대단한 분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어떤 날은 그 글은 대충 읽고 밑에 적어 놓으신 그날 그날 챙겨야할 준비물, 숙제 등 알림장 내용만 체크하고 아이보고 빨리 숙제하라고 잔소리만 해대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바쁘고 피곤하여 아예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기도 했다. 매일 매일 그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내 아이, 부모의 역할, 우리가 사는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지는 못했던 것이 이제와 지난 일 년의 시간을 돌아 보면서 참 아쉽기만 하다. 그랬더라면, 내가 조금 더 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아이와 같이 행복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후회를 한다.

아래는 선생님의 허락 없이 몇 개의 글을 옮겨왔다. 아래 글 이외에도 너무나 좋은 글들이 많지만 "불펌"이라..ㅡㅡ;; 혹시라도 관심있으신 분들은 아래 닫아 놓은 글을 열어 보시면 된다.

(이 글은 그 선생님께서 쓰신 것으로, 모든 권리가 그 분에게 있고, 여기에 옮겨져서 잘 못 전달된 부분은 모두 저의 책임입니다. 이 곳에서만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또, 문제가 되면 제가 나중에 삭제할 수도 있습니다. 원래 허락을 받고 올렸어야 하나, 그간 너무나 성의없었던 불량 학부모로서 허락을 받는 게 송구스러워서....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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