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2월 22일 일요일

[번역] 현존하는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 3부

로렌스 위튼 II (Laurence C. Witten II),
October 1982, Early Music Vol. 10, No. 4, pp 487-494

안드레아 아마티의 현존하는 악기들에 대한 논평 (Remarks on the surviving instruments of Andrea Amati) 

위의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은 3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질 수 있다:

1 프랑스 샤를 9세를 위하여 만들어진 세트에 속한 악기들로 2대의 작은 바이올린(Oxford and Carlisle), 한 대의 큰 바이올린 (Cremona), 한 대의 테너 비올라 (Oxford), 그리고 4대의 첼로 (all in private collections)이다. 이 세트가 몇 대였는지 언제 제작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악기에 문장이 장식되어 있고 이전 군주들의 문장은 후계자들이 좀처럼 사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또 이 세트가 샤를 9세가 사망한 후에 도착했었다면 아마도 새 군주인 앙리 3세를 위하여 다시 장식되어졌을 것이기 때문에, 샤를 9세의 생전 (1574년 5월 30일에 사망)에 완성되었을 것이다. 아무도 이 악기세트가 프랑스 궁정에서 수백마일이나 떨어진, 상대적으로 작은 중심지였던 크레모나에서 만들어지게 된 일련의 상황들에 관하여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앙리 2세의 미망인이며 샤를의 어머니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지배했던 궁정의 확실한 이탈리아적인 분위기 속에서 이탈리아 음악가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그들에게 잘 알려진 제작자에게 악기를 주문할 만큼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초기의 출판문헌에서 제시되었듯이, 아마도 발다사르 드 벨지오이오소 (Baldassare de Belgioioso, 1587년 경 사망)이 중간에 있었을 것이다. 이 음악가는 통설로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하는데, 1555년부터 카트린느 드 메디치를 위하여 프랑스 궁정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며, 1582년에는 바이올린들이 아마 사용되었을 작품인 발레 코미크 드 라 루안느 (comique de la Royne)를 출판했다. 이 세트에 관한 간단한 언급은 쟝 벵자맹 드 라 보르드 (Jean-Benjamin de La Borde)의 Essai sur la musique (Paris, 1780)에 나온다[footnote]Vol. 1, p.358[/footnote]. 안드레아 아마티는 아베 세바스티앙-앙드레 시비르 (Abbe Sebastien-Andre Sibire)의 뛰어난 소책자인 La chelonomie (Paris, 1806)에서 바로 이 악기세트의 제작자로 칭해진다. 이 책의 연구에 의하면, 시비르가 정보 대부분을 그의 동시대인이며 위대한 프랑스의 제작자인 니콜라스 루포 (Nicolas Lupot, 1758-1824)로부터 얻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루포의 수리 라벨이 현재 또는 전에 크레모나의 큰 바이올린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프랑스혁명 시기 왕궁으로부터 악기들이 옮겨진 이후에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 중 적어도 몇 대를 검사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샤를 9세 세트는 의심할 바 없이 안드레아 아마티 또는 초기 현악기 제작자들의 현존 악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다. 이것은 안드레아의 악기들 중에서 4 가지 종률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유일한 그룹이며 8대나 되어 가장 수가 많다. 이 악기들은 르네상스의 위대한 궁정을 위하여 준비된 것들이며 장인으로서의 아름다운 솜씨, 음색의 특질 그리고 풍부한 장식은 비할 만하거나 뛰어넘을 만한 악기를 좀처럼 찾기 힘든 것이다. 

2 안드레아 아마티의 두번째 장식 악기 세트는 프랑스 국왕을 위하여 준비된 세트만큼 아름답다. 아마도 연구를 더 진행하면 이 세트가 어떤 후원자를 위하여 만들어지고 장식되어졌는지가 밝혀질 것이겠지만, 이탈리아의 공작급 귀족 가문일 것이다. 현재에는 오로지 3대의 악기만이 알려져 있고, 모두 개인소유이다. 두 대의 큰 바이올린과 테너사이즈에서 크기가 줄여진 한 대의 비올라가 그것이다. 이 세트에 작은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은 아직 나타난 적이 없다. 

3 장식없는 악기들은 한 대의 큰 바이올린, 두 대의 작은 바이올린, 한 대의 비올라 그리고 한 대의 첼로이다. 적어도 이 악기들 중 몇 대는 아마 피렌체의 메디치를 위하여 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비올라는 메디치가와 관련이 있는 – 약간 희미하게 – 브랜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안드레아 아마티의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악기 하나는 1700년에 그 해의 익명의 재고목록에 따르면 메디치 궁정의 소장품에 속해 있었다[footnote]Florence, Archivio di Stato, Guardaroba Medicea, no.1117; published in V. Gai, Gli strumenti musicali della corte medicea e il Museo del Conservatorio 'Luigi Cherubini' di Firenze (Florence, 1969)[/footnote].

팔로 연주하는
(a braccio) 7현의 작은 리라는 전나무로 된 앞판, 메이플로 된 넥, 테일피스, 브릿지, 옆판, 뒷판과 어울리는 펙과 핑거보드와 테일피스에는 a mastacciolo [? 다이아몬드 모양의 마름모꼴]인 흑백의 끈이 있었고 사방의 가장자리에는 비슷한 퍼플링이 앞판과 뒷판 모두에 있었으며, 안쪽에 붙여진 종이조각에는 진사로 적혀진 라벨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Andrea Amati in Cremona 1573'라고 적혀 있었다. 대리속 무늬의 결이 있는 나무활 [즉, 아마도 스네이크 우드]에는 프로그에 하트모양의 디자인이 있었으며 오래된 포플라 케이스에는 두 개의 후크와 구멍이 있었다. 

붉은 잉크로 적힌 라벨은 아마 위의 I-3에서 언급된 작은 바이올린에 밀접하게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18세기 마지막 25년과 19세기 초에 가장 위대한 현악기 수집가였던 이그나티오 알레싼드로 코지오 디 살라부에 백작 (Count Ignazio Alessandro Cozio di Salabue)은 안드레아 아마티가 제작한 진품 악기들을 만나기 위해 많은 시간동안 결연한 노력을 기울였고 그는 원래는 리라였었을 ‘비올라’와 그가 ‘레벡’이라고 묘사한, 당시에는 안드레아가 만든 것으로 여겨졌던 3현 악기를 보았다. 그의 유명한 카르테지오 (Carteggio)에서 코지오는 그림으로 묘사하고 몇 가지 자세한 서술도 했다[footnote]Transcr. R. Bacchetta, ed. G. Iviglia (Milan, 1950), p.13[/footnote]. 큰 ‘비올라’는 코너가 두 개 밖에 없었고 밑의 안쪽으로 구부러진 립을 가지고 있었는데, 브레시아 악기와 비슷했고 소문에 의하면 원래는 아마도 리라였을 브레시아 악기였을 것이라고 한다 (불행히도 어느 것도 정체 파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오리지널 헤드가 남아 있지 않다). 사운드홀은 코지오의 스케치에서도 크레모나의 것이라기 보다는 더 브레시아 (또는 베니스의?) 악기처럼 보이고, 악기는 가스파로의 라벨을 달고 있다.

이 것은 메디치의 리라였을까? 그것은 매우 의심스럽고, 코지오가 인용한 카를로 만테가자 (Carlo Mantegazza)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아 아마티의 작품이라는 것은 심지어 더 의심스럽다. 이 존경할 만한 수집가가 안드레아 아마티의 바이올린족의 악기를 과연 만날 수 있었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어쨌거나, 메디치의 리라 다 브라치오는 영영 잃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 (Bartolomeo Cristofori)가 수집품의 또다른 품목을 추가한 1716년에 이미 메디치가의 관할을 벗어났다[footnote]Transcr. F. Soldi in Atti dell'accademie del reale istituto musicale di Firenze, 12 (1874), pp. 191-7[/footnote]. 그는 아마티가의 다른 제작자들과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만든 바이올린 형태의 몇몇 악기들에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안드레아 아마티의 악기들은 아니다. 내 의견으로는 위튼 콜렉션의 큰 바이올린과 이전에 우리가 소유했던 첼로는 아마도 다른 악기들보다는 이른 시기의 작품인 것 같다. 그들의 독특한 f홀은 더 좁고 더 똑바로 세워져 있으며 퍼플링은 좁고 다른 악기들보다는 덜 섬세하다.

안드레아의 현존 악기들은 모두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장 독특한 점은 아마도 나무의 선택일 것인데 이는 알려진 모든 악기에서 실질적으로 동일하다. 윤곽과 아칭 프로그램은 매우 모던하고, f홀 패턴은 독창적이어서 안드레아의 사후에 그의 아들들에 의하여 더 전형적인 모던한 성격의 디자인으로 좀 빨리 변형되었다. 멋진 스크롤은, 슬프게도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S. F. 사코니 (S. F. Sacconi), 렘버트 벌리처 (Rembert Wurlitzer), 다리오 다틸리 (Dario d'Attili)와 다른 전문가들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스크롤과 4세대 전의 안드레아의 공방에서 나온 스크롤들  간의 디자인의 강한 유사성에 대해 언급했었다. 이 화려하게 디자인되고 조각된 스크롤의 중요성은 그 모든 하나하나의 특성이 그 후의 바이올린 제작자 세대들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작은 크기의 바이올린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왜냐하면 아직 아무도 왜 두 가지 크기의 바이올린이 있었는지, 또 그들의 피치가 서로 달랐는지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에 띄게 작은 크기의 바이올린들 - 매우 자주 342mm이고 안드레아 아마티의 패턴- 은 크레모나에서, 다른 많은 제작의 중심지들에서 이탈리아 바이올린 제작자들에 의하여 안드레아의 시대로부터 18세기에도 쭉 만들어졌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다. 

안드레아 아마티의 4가지 크기의 바이올린 패턴은 수 세기에 걸친 사소한 수정들이 있기는 하지만, 세계표준이 되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온 그의 몇 대의 악기들에서 발견되는 디자인이 오늘날에도 많은 생산자들에 의해 일상적으로 재해석되어 질 뿐만 아니라, 4세기보다 더 이전에 그의 공방에서 제작된 놀라운 악기들이 오늘날의 가장 까다로운 조건의 연주회에서도 그 악기들의 소리가 다른 어느 제작자의 악기들과도 성공적으로 겨룰 수 있을 만한 힘과 음질을 가지고 연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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