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9일 수요일

제2회 바흐페스티벌 일정표

나이젤 노스 류트 독주회I
장소 : 세종 체임버홀 [장소보기]
기간 : 2007.10.18
나이젤 노스 류트 독주회 II
기간 : 2007.10.19
엠마 커크비 독창회  
장소 : 세종 체임버홀 [장소보기]  
기간 : 2007.10.28
타펠 무지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엠마 커크비  
장소 : 세종 체임버홀 [장소보기]  
기간 : 2007.10.30
타펠 무직 바로크 오케스트라  
장소 : 세종 체임버홀 [장소보기]  
기간 : 2007.10.31
피에르 앙따이 쳄발로 독주회 I
기간 : 2007.10.26 ~ 2007.10.26 .
피에르 앙따이 쳄발로 독주회II
장소 : 세종 체임버홀 [장소보기]
기간 : 2007.10.27 ~ 2007.10.27
버트 오르간 독주회  
장소 : 영산아트홀 [장소보기]  
기간 : 2007.10.28 ~ 2007.10.28


10월 22일이 있는 주에는 베이징을 가야한다. 가도 금요일에는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 공연들을 보는데에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아무래도 19일이나 26일 공연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18일 류트 공연은 아직 티켓오픈이 안된 것 같고... 피에르 앙따이의 공연은 보고 싶기는 한데.. 프로그램은 26일이 더 마음에 든다.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할 듯..

일단 4개의 공연을 예매해 놓았는데.. 일요일은 두 건..;; 3시와7시반.. 여의도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것이니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9월21일까지 예매하면 조기예매 할인이 된다고 하고.. 아직 예매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라 A석이 다 나가기 전에 얼른 예매를 해버리기는 했는데... 표값 부담이 장난이 아니다..ㅠㅠ

2007년 8월 27일 월요일

레슨일지 2007.8.25 (토)

밤에도 너무 더워서 자꾸 잠을 설치게 된다. 요즘엔 정말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다. 특히 토요일엔... 10시 레슨을 맞춰 가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았는데, 이번 주도 또 지각을 하고 말았다. 거의 30분을 늦게 갔는데, 가보니 같이 레슨 받는 5-6명 중에 1명만 와있었다. 내가 들어가고 나자 연달아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샘은 "10시까지 오셔도 되요.."라면서 은근히 지각하지 말라는 투의 멘트를 날리신다.

항상 하는 시라디크
A, D현 번갈아가며 하는 두 줄 연습
흐리말리 d minor, 세컨포지션 연습
Bach, Double Concerto 1 악장
집에서 에어콘 켜놓고 하면 악기소리가 좀 나은데, 밖에서 켜보면 악기에선 항상 물먹은 소리가 난다. 그래도 선생님이 현을 바꿨냐고 물으신다. 소리가 좀 달라지긴 한 듯...

별다른 것은 없었고... 바흐는 이제 많이 익숙해지긴 했는데, 속도가 붙으면 음정이 어긋나는 것이 문제인 듯하다. 세컨포지션 음정을 더 정확히 하는 것도 문제. 선생님은 그래도 아주 좋다며 칭찬을 해 주신다. 곧 2악장을 들어갈 수 있겠다고... 완벽하게 곡을 만들고 넘어가는 것이 워낙 힘들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좀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칭찬은 기분이 좋은 일이다.

레슨이 끝나고 나오는데, 장샘이 이번 연주회 정말 할 수 없겠냐고 다시 물으신다. 김샘반 앙상블에 사람이 모자라는데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고... 11월10일만 아니어도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겠지만.. 날짜가 겹치는데 어쩌랴.  체력적으로, 시간적으로 어렵겠지만... 내년 봄엔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2007년 8월 24일 금요일

오케스트라 연습 2007. 8.23

오늘 연습곡:
슈만, 교향곡 1번 "봄" 1악장
드보르작, 교향곡 8번 1악장
튜닝을 하고, 지휘자님을 조금 기다린 후 연습이 시작되었다. 오늘은 슈만 교향곡 1번 1악장.

이번 가을 연주회 곡은 아니지만, 내년 봄을 기약해서 미리미리 연습을 해두는 곡이라고 한다.

초견으로 새 악보를 보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처음은 느리게 시작을 해서 박자를 조금 못 맞추긴 했지만 그런대로 따라하고 있었는데, piu vivace가 있는가 하더니... 엄청 빨라져 버렸다. 16분음표들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다.. 흑흑.. 집에 가서 천천히 연습해야할 듯...

요즘은 빠른 곡들에 대한 부담감이 장난이 아니다. 빠른 곡을 보면 마치 시험공부 안하고 시험장에 와 앉아 있는 것 같은 패닉상태에 돌입한다. 음정도 불안해지고, 보잉은 더 뻣뻣해지고... 천천히 하면 또박또박 음정을 듣고 보잉도 신경을 쓰는데 말이다...

결론은 사실 잘 알고 있다. 천천히 연습하면서 점점 속도를 붙여 나갈것. 스케일과 에뛰드 연습을 철저히 할 것. 문제는 그렇게 연습을 할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머지 30분간은 드보르작 8번 1악장을 다시 연습했다. 여전히 잘 안된다. 흑흑... 연주회 곡을 연습하는 것보다는 집에서 차근히 지금 레슨 받는 곡을 연습하는 것이 맞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오케스트라 연습에 가면... 역시 집에서 연습을 할 껄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둘 다 연습을 할 시간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맘처럼 안되니...쯧.... 아직 오케스트라를 할 만한 실력이 아닌데 괜히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긴 하지만, 너무나 하고 싶었었는데, 계속 미룰 수도 없다는 생각도 들고...

어제 오케 연습하면서 망가진 자세를 다시 다듬고, 오늘은 다시 기본연습에 돌입해야 겠다. 빠른 보잉 연습도 좀 해보고....

2 더하기 2는?

그제, 어제 갔었던 tax Seminar에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 영어로 해야 더 재밌을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한국말로 옮겨서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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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 엔지니어, 경제학자, 트레이더, 인베스트먼트 뱅커, 회계사, 세무조사관, 이전가격전문가, 변호사에게 각각 2+2의 값이 무엇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수학자: (잠시 생각하더니..) 답은 4이다. 나에게 2시간의 시간을 주면 왜 2 더하기 2가 4인지 증명해 보이겠다.

엔지니어: (역시 잠시 생각 후) 답은 3.891에서 4.11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경제학자: 답은 4일 수도 있으나, 사실 이 문제는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의 여러가지 요소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되므로, 정답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다르다.

트레이더: 답은 6이지만, 시장의 상황에 따라 값은 2도 될 수 있고 8도 될 수 있다.

인베스트먼트 뱅커: 답은 10이다 현재의 가치는 6이지만, 이 값은 심각하게 저평가되어 있고 우리의 밸류에이션에 의하면 내재가치는 10이기 때문에 지금 사서 가격 상승 시에 팔면 10이 된다.

회계사: 답은..... 아마도 (more likely than not) 4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의견일 뿐이므로, 이 의견에 기초한 어떤 의사결정도 고객의 책임이며 고객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고객이 제공한 정보, 가정 등을, 독립적인 입장에서의 검증 없이, 정확한 것으로 가정하고 의견을 진술하는 것이며, 고객은 우리의 의견에 대해서, 우리에게 지급한 비용을 넘어서는 부분에 대하여는 손해배상의 청구, 비용의 보상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동의 하여야 한다. 고객은 우리 의견을 동의없이 제3자에게 배포, 전달, 인용할 수 없다. 우리는 앞으로 관련한 대한민국법령의 개정에 따라 우리의 의견을 재검토하고 수정하여야 할 의무는 없으며, 이 의견은 현행의 법령에 따른 것이다. 기타 등등.....

세무조사관: 답은 6일 수 있지만, 이것은 본세만이며 가산세를 모두 더하면 10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회사가 조사결과에 대하여 불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경우에만 해당이 되며, 불복을 할 것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답은 20이 될 것이다.

이전가격전문가: 비교대상기업을 분석한 결과에서 사분위수는 2.6와 7.4이며 중간값은 5이다. 만약 답을 4로 하면, 이는 사분위수 범위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는 정상가격으로 판단된다.

변호사: (주위에 누가 있나 없나 살펴본 후, 방문을 닫고 커튼을 내린 후, 질문자에게 속삭이며) ...... 답이 뭐였으면 좋겠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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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법인의 이전가격팀 사람이 말해준 이야기. 금융권과 조세에 대해 실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재미있을 만한 유머^^

2007년 8월 23일 목요일

레슨일지 2007.8.22 (화)

어제 차가 밀려서 늦어서 못간 레슨을 오늘은 가까스로 제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6시반에 사무실을 나서려고 미팅도 빨리빨리 대충대충 진행하고 나왔는데, 책상 위의 노트북에 켜진 피치를 보다가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10분 뒤에도 계속 일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 화들짝 놀라서 얼른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헉.. 오늘도 늦을 뻔 했군.. 하면서.

흐리말리 G major 16개 슬러
서드포지션 포지션 이동
호만 2권 앞부분
카이저 3번의 5번 변주
스즈키 비발디 가단조 3악장

내 생각엔 그다지 나쁘지 않았었는데... 카이저는 제자리 걸음..ㅠㅠ 음정이 워낙 부정확했었고, 빠른 속도로 연주할 때 특히 음정이 많이 나갔던 것 같다. 서드포지션은 내가 생각해도 잘 못했는데, 일단 그냥 다음 연습을 하기로 하신 듯. 호만이나, 흐리말리는 큰 무리가 없었다.

스즈키... 사실 아는 곡이고 배운 곡이라서 몇 번 해보니 옛날 생각도 나고 괜찮았었다. 오늘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으나, 강약을 살리는 것이 문제인듯.

서드포지션의 3번 음정이 모두 높다고 하신다. 아직도 서드포지션 자체의 음정이 부정확한 것이 문제. 도 내추럴, 파 내추럴 모두 약간씩 높은 모양인데.... 이미 높은 음들이 귀에 익은게 아닌가 심히 걱정된다. 1포지션에서도 1번 음들을 모두 낮게 기억하고 있어서 아직도 1포지션 1번 음정이 불안한데... 서드포지션도 그렇게 되면 곤란한데...

piano로 스타카토를 할 것. piano로 하면서도 음정을 정확히 짚을 것. 음정이 부정확한 경우에, 내 귀로 듣기 위하여 약간씩 커지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아노로도 확실한 음정을 듣고 운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늘도 즐거운 레슨^^

2007년 8월 20일 월요일

[번역] 모차르트 즉흥연주하기 by Robert Levin

Improvising Mozart by Robert Levin

클래식 음악가들은 매우 전문화되어져 버렸다. 오늘날 연주자들의 대부분은 하루에 수시간씩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진 텍스트를 배우고 완벽하게 익히기 위하여 고통스럽게 연습한다. 음악을 재생산하는 데에 매우 재능이 있으나, 그들은 종종 음악을 창조해내는 훈련은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한다. 출구를 못 찾거나 대사를 잊어버린 상황에 직면한 배우는 그 갭을 메울 대사를 그 자리에서 생각해 내면서 상황을 모면하곤 한다. 기억력의 실수, 갑작스런 발음이나 사투리의 대조는 등장인물과 배우 사이의 동일성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 내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상황이며, 그것이 흉내내는 인생보다 순간적으로는 더 강렬해 보이는 연극의 연금술이 아니라는 것을 뼈져리게 알려준다. 운율이 있는 고전시가에서 애드립의 대사를 읊는 것이 어렵지만, 모든 배우들에게 그의 모국어로 즉흥적으로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일상화된 경험이다. 이것은 음악가들에게는 별로 그렇지가 못하다; 그리고 위대한 작곡가의 개인적인 언어들 안에서 그런 발명의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작곡, 문법, 문장론, 수사학 그리고 음악 (이론)의 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연주가들에게는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겁나는 일이다.

건반 앞에 앉은 어린 모차르트

18세기에는 모든 작곡가들은 연주자들이었고 사실상 모든 연주자들은 작곡을 했다. 더구나, 실제로 연주되는 모든 음악은 새로운 것이었다. 오늘날의 대중음악과 예술음악과의 분리는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각각은 시대의 특징에 맞는 자연스러운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흥연주는 비예술 음악에서는 필수적이다. 모든 문화권의 음악에서 존재하고, 재즈에서는 중심적인 과제이다. 루이 암스트롱, 콜맨 호킨스, 아트 테이텀,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과거의 대가들의 임의적인 샘플링임)의 천재성은 환상적인 상상의 자유로은 비행을 담은 음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연주들은 즉흥연주가, 피아니스트, 작곡가 (이 것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재능에 대해 평가를 했던 순서이다)로서의 그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하여 디자인된 것이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소위 카덴차와 도입부 (전주)라고 불리우는 - 그가 충동적으로 대담한 연주를 하기 위하여 설정한 - 인위적인 공백들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많은 패시지들을 스케치나 개략적인 형태로 남겨두었는데, 실연에서 연주자들이 각각의 연주에서 새로운 특정한 표현적인 내용을 가지고 채우도록 연주자들의 의지에 맡겨 놓은 것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1악장의 자필 악보. 이 페이지 마지막의 코드는 모차르트가 즉흥연주를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공백 (contrived chasms)' 중의 하나이다. 

20세기에 음악가들은 충실하게 작곡자들이 써놓은 성서 (악보)를 지켜서 연주하도록 훈련 받아왔다. 만약 연주자의 의지가 나타나면, 작곡된 곡을 단순히 자기 자신을 과장하여 드러내려는 도구로만 사용하기 위하여 곡의 지시들을 무시하고 눈길을 끌게하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고전음악의 연주자와 청중 각각은 작곡가들이 이 들 작품을 썼던 것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많이 표준화된 레퍼토리를 경험해왔고, 작품이 최초에 연주되었을 때의 효과의 참신함을 그들에게 다시 느끼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졌다. 오늘날 표준화된 많은 연주들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경우에서 즉흥연주는 전체적인 작품의 성격을 내부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한데, 쓰여져 있는 텍스트를 충동적으로 꾸며서 연주하는 것은 음악적인 표면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꾸밈음과 즉흥적인 부분들은 작품의 개성을 묘사하는 것을 좀 더 강조하여야 하며, 단지 평범하고 진부한 관습 (여기서는 트릴, 저기서는 curlicue)을 연속으로 넣어 놓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차르트와 그의 동료들로로부터 그 음악의 장식된 버전이 분명하게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장식의 종류와 양을 보여주고 있는 상당수의 예를 가지고 있다. 이런 증거로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연주 중 많은 수가 받아 들일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하다고 모차르트가 생각할 지도 모를 만한 방식으로 연주되는 패시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연주가 기대하는 바처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오히려 '..... 그것이 문제가 아니로다'가 된다면, 그 연주가 얼마나 시적이고, 얼마나 음율적으로 매혹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의 자필 악보에서 느린 악장의 시작 부분. 피아노 부분의 오른 손 부분만이 쓰여져 있다 — 모차르트는 장식부분 뿐만아니라 왼손도 즉흥연주 하였을 것이다.

오르가니스트는 제외하고, 고전 음악 연주자들은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거의 다 더이상 즉흥연주를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연주자들은, 경쟁과 레코딩의 가혹한 상황 하에서, 일관성과 정확성에 어떠한 위협을 가하게 되는 위험을 회피하는 법을 일찌기 배우게 된다.  즉흥연주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으나, 위험을 피하는 것보다 더 음악의 드라마틱하고 감정적인 메시지를 파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즉흥연주도 아무 것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이 어떤 곡의 언어에 특징을 나타내어 주는 지는 분명히 중요하다. 영화 제작자가 역사적으로 정확한 위치에서 그 시대의 소품들과 복장을 입고 그 시대의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을 수백만 번을 찍었으나, 모든 장면에서 그 장소와는 맞지 않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크리스토퍼 말로우이의 희곡이 시골 알라바마의 사투리와 억양이 갑작스럽게 삽입되면서 공연되면 청중들은 그로테스크하거나, 코믹하다고 인식하게 될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언어적인 부조화를 음악에 있어서는 주저없이 인정을 하곤 한다. 만약 모차르트의 언어가 말로우이의 것 만큼이나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각각의 연주의 부분으로서 그것을 새롭게 고안해 내기 위하여, 그 곡의 내부로부터 배우는데에 시간을 쓰는 것은 분명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모든 모차르트 연주의 목적이며, 특히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the Academy of Ancient Music와 같이 하는 이 협주곡 사이클의 레코딩에서의 목적이기도 하다.

출처: http://www.aam.co.uk/features/9705.htm

7/8 바이올린 사용기

키도 작고, 팔도 짧고, 손가락도 짧아서, 4/4 악기를 쓰면서도 늘 불만이 가득했었다. 악기만 조금 더 작으면 정말 연주가 너무나 잘 될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고나 할까. 그날 그날 연습이 안되면, 악기가 너무 커서 그렇다는 둥, 바디가 36센티나 되는 거대 악기라는 둥.. 온갖 핑계를 악기의 크기에 갖다 붙이곤 했다.

레슨 선생님도 손이 작다는 둥, 악기가 크다는 둥의 말을 가끔씩 하셨는데, 그게 학생의 실력을 탓해서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것 보다는 나아서 그러시는 것이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7/8을 가져보고자 하는 내 열망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 되었었다.

4/4인 빅토르 오디놋을 처분하고... 잠시 3/4을 사용해봤었는데, 3/4은 정말 연주가 편하긴 했지만, 너무 심하게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래도 3/4는 아닌 것 같고, 4/4 중에서도 넥이 얇게 빠져 있거나, 길이가 좀 짧은 악기를 구하거나, 정말 7/8을 구해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이 악기를 발견했다.

모양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고, 판매자가 올려 놓은 사운드 샘플도 그럭저럭 맘에 들었다. 가장 맘에 든 것은 가격...ㅡㅡ;; 한국에 가져와서의 수리비까지 고려해도 많이 저렴했다. 그리하여.. 이 악기는 나에게로 오게 되었고, 수리하지 않고 대충 써보려고 했으나, 가져온 지 하룻만에 지판 분리라는 황당한 일이 발생하여, 지판을 올리고 브릿지를 교환하는 수리를 거치게 되었고, 수리 후에는 상당히 놀랄만하게 음질이 개선되었다.

악기가 온 것이 4월 초이니 벌써 꽤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사용 후의 총평은 매우 만족. 일단 악기가 손에 맞으니, 음정 잡는 것이 훨씬 부드럽다. 특히나 겹음을 연주할 때 훨씬 좋은 것은 사실. 악기의 소리 크기는 사실 비교를 할 수가 없다. 4/4라고 해도 워낙 차이가 있으니까.

이 악기는 세팅을 제대로 하고 나니 소리는 더 좋아 졌고 커졌는데, 아직도 브릿지나, 사운드포스트를 워낙 좋지 않은 걸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개선의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악기 사이즈가 작은 것에 비해서는 소리가 시원시원하고 울림이 좋다. resonance가 좋다는 것은 나같은 초보에게는 참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운지를 했을 때 제대로 운지가 되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7/8을 써보고 나니, 사이즈가 작다고 해서 특히 소리가 작거나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악기가 음량에서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손가락이 짧아서 연주가 힘들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7/8을 적극 권하고 싶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사이틀을 할 것이 아니라면, 사실 악기의 음량은 아마추어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인데, 굳이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를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살면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다고....

문제는, 7/8에 익숙해진 손가락으로는 연주해 볼 수 있는 악기의 숫자가 줄어들 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나중에 더 좋은 악기들을 만나게 되면, 분명히 대부분은 4/4일테니, 7/8로 연습을 해온 나로서는 연주가 힘들 수도 있을 듯하다. 글쎄... 그건 내가 좀 더 악기를 잘하게 되면 또 극복가능한 문제가 아닐까? 같은 4/4라도 차이가 많이 나곤 하니까...

나중에 좋은 사진기를 구하게 되면 악기 사진을 올려봐야 겠다.

2007년 8월 18일 토요일

레슨일지 2007.8.18 (토)

어제 피가로의 결혼과 발트뷔네 콘서트 DVD를 연이어 봤더니...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조금만 더 자야지... 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9시 40분...;; 너무 졸립고 몸도 안좋은데 그냥 제낄까.. 하다가... 결국 출발.

늘 하는 시라디크 연습곡, A, D현으로 하는 연습.
흐리말리 d minor scale, B flat major 2포지션 scale.
Bach, concerto in d 1043, 1st mov.
시라디크는 책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달랑 한 페이지만 복사해주시고, 모든 레벨을 동일하게, 한 2년간 같은 것만 하는 것으로 봐서, 보잉을 위한 연습이라고는 생각하는데... 가끔은 다른 에뛰드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취미로 하는 단체레슨생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인 연습을 고민한 결과인 듯..

문제는 같은 연습을 2년째 하고 있는데도, 난 여전히 활이 비뚤고 내림활-올림활의 힘균형이 균일하지 않으며, 때로 음정도 흔들린다. ㅡㅡ;;

흐리말리는 바흐 더블 콘첼토를 위한 연습. 오늘은 컨디션이 영 아니어서인지.. 포지션이동에 삑사리가 많았다. 흐리말리 뿐아니라, 바흐를 할 때에도 포지션 이동할 때 마다 괴로울 지경. 2포지션 음정도 오늘은 잘 안되고... ;;;

바흐 연습을 좀 더 해야 겠다. 다음 주에 1악장을 끝내고 2악장을 들어갈 듯. 언뜻 본 2악장은 포지션 손가락 번호가 예술이더라...;;; 쉬운 스즈키 번호를 놔두고 왜 갈라미안판으로..ㅠㅠ

연주할 때 마다 가속도가 붙어서 조절 불가능한 속도가 되곤 하는 것도 문제. 박자를 잡아야 연주도 여유가 생기고 음정도 정확해 질 것 같다...

오케스트라 연습 2007. 8. 16

악장님이 평소보다 약간 일찍 출발하자고 하셔서, 6시 50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출발했다. 보통 30분 정도면 도착하는데, 공휴일 다음날이라서 그런지... 차가 엄청 밀렸다. 결국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발했음에도 도착시간은 겨우 5분-10분 정도만 일찍 도착했다.

일찍 도착해야 하는 이유는... 모 제약사에서 나온 홍보행사 때문. 그 덕에 도시락은 하나 얻어 먹었을 수 있었다. 8만원짜리라던 사은품은 연습 끝나고 나올 때 까먹고 그냥 와 버렸다.

오늘은 지휘자님도 지각. 지휘자님을 기다리면서 드보르작 4악장을 좀 해봤는데... 일주일 내내 연습을 못하다가 와서 연습을 하니.. 역시 발전이 없다. ㅠㅠ

핀란디아는 그래도 나은 편. 30분 정도 핀란디아를 연습 후 드보르작 8번의 1악장 - 3악장 연습. 조금만 연습을 하면 많이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만 잔뜩하고는 10시에 연습을 마쳤다. 계속 연습부족을 한탄만 하다가는 결국 연주도 엉망으로 마무리 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는 중....ㅠㅠ

11월 공연에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연주할 예정. 상당히 기대가 된다. 모차르트의 곡이길 바라고 있다^^

다음 주에는 슈만 교향곡 1번을 연습한다고 한다.

2007년 8월 17일 금요일

L'estro Armonico 곡의 구성

조화의 영감 L'estro Armonico op. 3

1711년 작곡.

(바흐는 훗날 이 협주곡을 하프시코드 솔로 (no.9, no.12), 오르간 솔로 (no.8, no.11) 그리고 4대의 하프시코드와 현을 위한 곡으로 (no.10)으로 만들기도 했다.)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1 in D major for four violins and strings, RV 549:
1.
Allegro
2. Largo e
spiccat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2 in G minor for two violins, cello and strings, RV 578:
1. Adagio e spiccato
2. Allegro
3. Larghetto
4.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3 in G major for violin and strings, RV 310:
1. Allegro
2. Larg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4 in E minor for four violins and strings, RV 550:
1. Andante
2. Allegro assai
3. Adagio
4.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5 in A minor for two violins and strings, RV 519:
1. Allegro
2. Larg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6 in A minor for violin and strings, RV 356:
1. Allegro
2. Largo
3. Prest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7 in F major for four violins, cello and strings, RV 567:
1. Andante
2. Adagio
3. Allegro - Adagio
4.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8 in A minor for two violins and strings, RV 522:
1. Allegro
2. Larghetto e spiritos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9 in D major for violin and strings, RV 230:
1. Allegro
2. Larghett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3, Concerto No. 10 in B minor for four violins, cello and strings, RV 580:
1. Allegro
2. Largo - Larghetto
3.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11 in D minor for two violins, cello and strings, RV 565:
1. Allegro
2. Adagio e spiccato
3. Allegro
4. Largo e spiccato
5. Allegro

L'Estro Armonico, Op. 3, Concerto No. 12 in E major for violin and strings, RV 265:
1. Allegro
2. Largo e spiccato
3. Allegro

전곡 악보 모음: http://scores.ccarh.org/vivaldi/op3/

2007년 8월 15일 수요일

[번역]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이야기하는 "VIVALDI: L'Estro Armonico, Op . 3"

호그우드의 이 글은 번역이 쉽지가 않다. 영국 사람이 영어로 쓴 글인데 왜 이리 어려운지... 그래서 아래 번역은 정말 매끄럽게 만들어지지가 않았다.. 다시 영어를 읽어 보고 고치고 싶은데... 읽어도 정확하게 어떤 의미로 그렇게 썼는지가 잘 와닿지가 않는다..ㅠㅠ 그래도 비발디의 조화의 영감에 대한 내용, 연주방법등에 대한 약간의 정보는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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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ro Armonico는 번역하기가 곤란한 제목이다; 조화의 영감이나 음악의 고양은, 18세기의 가장 통찰력있는 출판가였던, Estienne Roger가 이 1711년에 이 12개의 협주곡 모음을 발간하도록 만들었던 천재와 상상력의 결합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 이 곡들 이전에는, 비발디의 작품 중 인쇄본이라고는 베니스에서 출판된 소나타 두 세트가 있었을 뿐이었다: 1705년의 12개의 트리오 소나타 (Opus 1)와 1709년의 12개의 솔로 소나타 (Opus 2), 두 곡은 그의 Conservatorio  dell' Ospedale della Pietà에서의 바이올린 교사로 활동하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고아원은 베니스의 4군데의 유명한 기관들 가운데 하나였고, 어린 소녀들에게 음악적인 학습을 시켜주었는데, 비발디는 일요일이나 축제일마다 연주회를 지휘하였고, 이로 인하여 매우 빠르게 도시 밖의 멀리에서 온 방문자들에게서 명성을 얻었다. "The transcendant music은 병원 소속이었다. 4개가 존재하는데, 모두 사생아들이나 고아들, 부모가 기를 수 었는 상황에 있는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국가가 비용대어 양육되어졌고 음악분야에서는 탁월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천사와 같이 노래하고, 바이올린, 플룻, 오르간, 오보에, 첼로, 바순을 연주했다; 간단히 말해, 그들을 놀라게 할 만한 큰 악기들은 없었다... 맹세컨대, 하얀 제복을 입은 상당히 어린 수녀가 귀에 석류꽃봉오리 가지를 꽂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우아함과 정확함으로 박자를 맞추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Charles de Brosses, Lettres familières sur l'Italie)

이것은 작품번호 3번의 출판이었고 비발디가 유럽에서 명성을 얻게끔 하였으며, 이 모음곡은 곧 John Walsh에 의해서 런던에서도 출간되었고 (Vivaldi' s most Celebrated Concertos) Le Clerce Cadet에 의하여 파리에서도 Les Troharnonico라는 약간 괴이한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Quantz는 1714년에 드레스덴 근방의 피르나 (Pirna)에서 처음으로 이 곡을 들었다: "그 당시에는 완전히 새로왔던 이런 종류의 음악은 나에게 적지 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이런 곡들을 꽤 많이 모으려고 노력했고, 비발디의 놀라운 ritornelli는 훗날 나에게 훌륭한 모델이 되어 주었다."

바흐가 비발디의 협주곡으로 부터 작곡한 10개의 키보드를 위한 곡들 중에서, 6곡은 Opus 3으로부터 온 것이나, 사실은 인쇄된 판본에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작품 중 몇몇은 手稿 형태로 이미 수년간 회람되어졌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들 중 6개는 현재에도 분리된 모음곡으로 널리 분포되어 전해지고 있다 (3곡은 드레스덴에, 나머지는 각각 비엔나, 나폴리 그리고 슈베린(Schwerin)에 있음). 인쇄된 악보의 복사본을 만들 이유도 이익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 작품들이 1700년경까지 알려져 있었고 널리 배포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비발디가 Roger를 위하여 엮었던 모음곡은 스타일과 스코어링에서의 다양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디자인 된 것이다. 10년 이상 동안의 협주곡 형태에 대한 실험에 의하여 그는 2개의 polysectional 협주곡 (IV과 VII)같은 오래된, 코렐리적인 방식의 곡들을 삽입할 수 있었고, 토렐리의 작품번호 8번에서의 'due violini che concertano soli'을 협주곡의 모델로 삼기도 했으며, 또는 가장 발전된 방식으로, 이전에는 오페라하우스에서만 사용되던 서정주의와 드라마를 비발디가 분명히 자신을 주인공으로 여겼을 솔로 협주곡들에 도입하기도 하였다.

이 모음곡은 시대순으로 엮여 있지는 않았으나, 이런 복잡한 편집은 모음곡이 전체적으로 연주되는 경우에 최대한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비발디가 마지막에 약간 곡을 다시 쓰게 만들었던 것 같다). 협주곡들은 3곡씩 4개의 그룹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그룹은 솔로, 2중주, 4중주의 협주곡을 포함하고 있다. 게다가, 비발디는 조별로 쌍을 지었는데, 장조로 되어 있는 각 협주곡 뒤에는 단조 협주곡이 이어지는데, 마지막 한 쌍은 예외여서 이 시스템이 뒤집혀져 전체 곡이 장조로 끝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이탈리아식 편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비노니(Opp. 7 and 9)와 토렐리(Opp. 5 and 8)도 이런 식의 한쌍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사용했었다.

4명의 솔로이스트들이 이 복잡한 편집에 만족하도록 하기 위하여 비발디는 협주곡들이 충분히 많아야 했기 때문에 곡을 다시 쓰는 일은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것은 VII번에서 가장 명백하다. VII번은 원래 두대의 바이올린과 콘티뉴오를 위한 보통의 콘체르티노로 협주곡이 시작되었었다는 표시를 보여준다; 마지막 알레그로는 사실 원래의 그룹 (비록 콘티뉴오 라인이 현재는 '첼로 오블리가또'가 되기는 했지만)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곳에서 솔로파트가 두개인것은 단순한 연장과 반복에 의하여 부풀려졌다. 몇개의 다른 협주곡에서, 원래 콘티뉴오 라인의 존재를 추측해 보는 것이 가능하며, 가끔 불필요한 '첼로 오블리가또'는 비발디가 하나의 콘티뉴오 파트를 가지고 이 모음곡을 만들어 내려고 약간 불편한 타협을 했었다는 점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인다.

협주곡들은 8개의 파트보로 발간되어졌다 (4 바이올린, 2 비올라, 첼로 그리고 '비올론 에 쳄발로'). 이것이 교대로 하는 연주를 의미한다는 주장이 자주 있었으나, 이는 그 작품들 자체와 모순되어 진다; 필요한 유일한 교송 (교대로 하는 연주)는 콘체르티노와 투띠 (VII에서 처럼)간에 있거나, I, IV, X에서 공간적인 분리를 허락하기에는 스타일이 너무나 변덕스러워 지게 되는 부분에서, 솔로이스트들간에 나타난다. 두 대의 비올라 간에는 교송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간단한 대답이 정답이 될 것이다: 8개의 파트보는 비발디가 요구하는 다양한 스코어링을 포함하면서 최대한 4대의 바이올린과 콘티뉴오로부터 때때로 분리되어 연주되어지는 첼로파트를 넣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다. 비발디의 가정은 물론, 각각의 파트가 한 명의 연주자에 의하여 연주될 것이고, 파트들은 아주 잘 조직되어 있어서 솔로 협주곡에서는 이것은 3 바이올린의 뚜띠가 될 것이고; 두대를 위한 협주곡에서는 각 독주자들이 리토르넬리에서 둘이 될 것이고; 4명의 독주자들이 함께 연주할 때에는, '뚜띠'와 '솔로'의 표시가 지침이 될 것이다. 이것은 바흐가 브란덴부르크협주곡의 연주를 위하여 했던 가정과 동일한 것인데, 브란덴부르크 III번은 아마 비발디의 여러 현악기 독주자들을 위한 스코어링 방법에 가장 가까운 독일제 파생품일 것이다. 현재 녹음에서, 첫째로 독주 현악기들이 전체적으로 사용되는데, 연주자들은 왼쪽으로부터 제1, 제2 바이올린이 배치되며, 제3, 제4 바이올린은 중앙의 콘티뉴오 섹션의 오른쪽에 배치되는데, 2명의 독주자가 교송을 하게되는 'con due violini obligati' 협주곡들만이 예외이다.

18세기의 협주곡 연주에서 즉흥연주의 대부분은 - 특히, 솔로파트의 'gracing' (카덴차)과 콘티뉴오의 화성전개에서 - 현대의 연주자들에게 많은 문제를 남긴다. 우리가 비발디의 연주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약간의 증거에 의하면, 그는 독주자가 장식음을 넣어 연주하는 것을 요구할 때는 그것을 표시하였고 (V, VI, IX의 과도하게 느린 악장에서 보여지듯이) 또는 카덴차의 순간적인 정지를 표시하려고 코로나 모양을 사용하였었다. 다른 곳에서, Quantz의 충고가 가장 잘 맞는 것으로 보여진다:"좀처럼 싫증나지 않는 서정적인 부분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은 피해야하고, 선율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운 멋진 패시지도 유사하다. 별다른 감동이 없는 부분만이 다양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IX의 느린 악장에 가장 적합한 이야기를 하는데: "시실리아노는 트릴를 되도록 넣지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게 아주 단순하게 연주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실리안 양치기들의 춤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몇 개의 appogiatura (비화성적 앞꾸밈음)를 제외하고는 너무 많은 다른 장식음을 여기에는 넣어서는 안된다."

즉흥적 콘티뉴오 부분에 관하여, 비발디 자신에 의하여 쓰여진 화성 전개의 두 부분은 이탈리아인들이 콘티뉴오를 독주자에 대한 경쟁자로 앞에 나타세우기 보다는, 화음을 뒷받침해주는 배경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견해를 확인해 준다.

코렐리의 작품 IV를 따라 만들어졌고, 그 세기를 통틀어 가장 인기있는 협주곡의 모음이었던 L' EstroArmonico 를 보면서, Quantz, Marcello, Mattheson같은 사람들이 다른 작곡가들을 평가하고 충고해 주던 표준을 L' EstroArmonico이 어떤 식으로 보여주고 있는지 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Quantz는 그의 Versuch einer Anweisung die flöte Traversiere zu spielen에서, 찾아야 할 것은 '모든 부분이 잘 다듬어져 있는 장대한 리토르넬로 시작부분' (예를 들어 II, IV, VIII), 또는 아마도 '고결하고 위엄있게 연주되는 유니즌과 다른 종류의 선율의 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열정과 활기' (V또는 I의 라르고) 라고 쓰고 있다. "협주부분에서 모방들의 절묘한 조합"은 첫번째 악장에서 4명의 독주자들에 의해 가장 잘 보여진다. 리토르넬로와 서정적인 독주의 대조는 추천할만하다; 라르고 악장을 위한 비발디의 해결책은 계속되는 유니즌의 뚜띠 (I에서처럼), 지속적인 하모니 (VI), 부드럽게 반복되는 코드 (V, XI) 그리고 베이스 라인을 완전히 없애버림으로 자주 나타나는 질감의 변화이다. 마지막 악장은 "성격과 박자에서 앞서의 두 악장과 달라야 한다... 첫 악장이 진지했던 만큼 유머러스하고 즐거워야 한다"; 화려한 피날레에 대한 흥미로운 대안은 VII번의 마지막 악장에서 볼 수 있는데, 전통적으로 궁정 춤곡 모음곡으로 끝나는 프랑스의 발레 스타일의 미뉴에트이다 (브란덴부르크 1번의 마지막 미뉴에트와 트리오와 비교해 보라). 이런 맥락에서, 이탈리아인들은 과거에 생각되던 것 보다 더 stile alla Francese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고, 비발디 협주곡의 몇몇 패시지들은 프랑스식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18세기 평론가들을 놀라게했던 Opus 3의 이들 협주곡들은 우리에게 같은 효과를 주기 때문에 거의 주석이 필요하지 않다: II의 이론적인 도입부분 (사계의 '겨울' 시작 부분과 현저하게 유사하다), 또는 X의 라르게토에서, 4개의 독특한 아르페지오의 방법이 동시에 지정되어 있는 4명의 독주자들을 위한 스코어링의 뛰어난 패시지 같은 효과. 전체의 곡 세트에서, 가장 평이 많고, 모방되기도 했었던 곡은 11번째 협주곡이다. 도입부의 드라마는 다시 없을 만한 것이나, 이어지는 푸가 주제는 더 훌륭하여 많은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던 것이다.  '변덕스런 성미를 가진 ' 비발디가 이런 대위법적인 기술을 보여주었어야만 했다라는 점은 주목받아왔다. 옥스포드의 음악교수인, William Hayes는 "그의 첫 12개 협주곡, Opus 3, 중 11번째 협주곡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가 충실하게 작곡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예를 보여준다... 다른 곡에서 그는 빛나는 상상력과 실천력을 사용하였고, 이런 점에서 그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 앞서 있었으며, Geminiani 조차도 그를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푸가의 주제가 잘 만들어졌으며, 잘 유지되었고, 대가다운 장치들을 넣어 전체가 적절하게 변주되어지고 하모니는 풍부하고 완전하게 되어 있는 것은 바로 이 11번 협주곡이다." (Remarks on Mr Avison's Essay on Musical Expression에서)

CHRISTOPHER HOGWOOD

Title Page of L'Estro Armonico

Antonio Vivaldi

2007년 8월 14일 화요일

[번역] 무질서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괴짜

무질서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괴짜 (Freaks of disordered thought)

(Published in
The Strad, October 2003)

헨리의 사전은 훌륭한 바이올린 제작자들에 대한 찬사로 가득차 있지만, 형편없는 제작자가 나타나면 그는 점잖게 표현하지는 않는다. Alan Coggins가 그의 뛰어난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Henley의 Universal Dictionary of Violin and Bow makers에 대한 글입니다.
**헨리의 책에서 인용된 부분은 이탤릭체를 사용하지 않고, 배경색과 글자색을 다르게 처리하였습니다. (예시)


"헨리"라는 말을 현악기와 관련된 세계에 살고 있는 어느 누구에 언급한다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성공한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 교수, 그리고 작곡가의 이미지는 아닐 것이다. 대신에 사람들은, 'Universal Dictionary of Violin and Bow Makers' 라고 옆에 쓰여져 있는, 두껍고, 무거운 책을 불가피하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책은 전세계의 바이올린 제작자들, 딜러들 그리고 수집가들의 서재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어 지는 책이고, 약 9,000명의 제작자들의 정보가 들어 있는 표준화된 참고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단지 "헨리"라고 언급되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윌리엄 헨리는 사실 12살의 나이에 연주여행을 시작했던 재능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신동 파가니니 (The Wonder Boy Paganini)라고 불려졌는데, 이는 단지 바이올린에 대한 그의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정확히 파가니니가 태어난 날로부터 100년뒤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는 런던에서 오귀스트 빌헬미와 같이 공부했고, 그 둘은 매우 절친한 사이가 되었으며 때때로 빌헬미의 집에서 함께 연주하곤 했다.

헨리는 성공적인 연주경력을 가졌었고, 결국은 런던의 로얄 아카데미에서 작곡교수이자 바이올린과 주임교수로 임명되었다. 그의 다양한 연주, 작곡, 교수생활 이외에도, 그는 또다른 분야에 위대한 노력을 기울였었다 - 즉, 바이올린과 활 제작자들의 총괄 목록의 작성이라는 분야이다. 헨리는 개인적으로 가능한 한 많은 악기들을 검사하고 시연해 보았으며, 성공적인 음악가로서, 그의 의견은 아주 권위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성격의 정보를 모으는 것은 확실히 분명한 종착점은 없는 것이다. 헨리는 그의 작품을 마무리지어 출판할 수 있기 전인, 1957년에 사망했고, 이 사전은  작가의 노트로부터 딜러인 시릴 우드콕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 이 책은 약 3년 뒤 1959-60년에 최종적으로 출판되어 졌고 최초에는 5권으로 되어 있다가, 1973년에 우리에게 친숙한 1권짜리로 재 출간되었다.

이 사후 출판이라는 상황은 이 책의 가장 명백한 결점들 중 하나로 귀결되어졌다. 우드콕은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책이 포함시키고 싶었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중 많은 것들이 헨리에 의하여 악기 자체와 악기의 음질에 대한 헨리 자신의 직접적인 평가에 근거를 두어 쓰여진 것인 반면에, 헨리가 아마 연주는 커녕 결코 본 적도 없었을 악기들에 대한 언급도 이 책에는 존재한다.

이들 기록들은 모두 너무나 명백하게 그 제작자들 자신들에 의하여 쓰여진 것들이며, 그리하여 문제의 소지가 있다. 바이올린 제작자들에가 그들 자신의 작품을 평가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은, 마치 정치가에게 그들이 의회에서 유용하고 효율적인 구성원인지를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거의 확실하게, 우리는 매우 장황하고 열렬한 답변을 얻게 될 것이다. F.E. Davenport에 대한 기록을 부분적으로 보면:

뉴욕에서 작업, 1908-1914... 전문적인 제작자는 아니지만, 그때까지감정가들이 가장 흥미로운 이탈리안 모델들이라고 하는 몇몇 악기를 제작하였다. 우수한 제작 솜씨는 크레모나의 중요한 제작의 선구자들의 것과 거의 맞먹는 것으로 평가되어진다. 놀라운 - 절대적으로 새롭지는 않으나 건강하고 강한 톤 - 후세에 의하여 격찬되어질 일종의 투명함을 관철시키는 음질 이라는 결과를 달성하였다

헨리가 미국에서 일하는 이 아마추어 바이올린 제작자에 관하여 이런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정말로 믿겨지는가? 우드콕은 이런 과장된 기록 (출처도 없이)을 삽입하였을 뿐아니라, 또한 합리적인 길이로 그러한 기록들을 편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A.H.Merrill에 대한 기록이 한 페이지 전체를 차지하게 되는 것도 발견하게 되며 (이는 그란치노나 로제리에 대한 기록의 길이보다도 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리노이의 엘긴에서 1853년 출생. 프랑스-영국계. 1872년까지 19년 동안 보통 사람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우여곡절을 겪음. 바이올린 음악에 매혹되어 그는 Hopf - "성숙되기 전에 수확한" 괴물같은 소리가 나는 -를 한대 구입. 주로  "활기를 주고 취하게 하는 음료"를 자주 마시라는 것이 주요한 가르침이었던 것 같은 선생으로 부터 6번의 레슨을 받음.

- 그리고 기타등등. 이런 기록을 읽어 나가면서, 우리는 결국 많은 그의 악기들이 때때로 터무니 없이 가격이 매겨진 크레모나 악기에 대항하여 왔고, 가장 성공적인 방식으로 시련을 극복하여나갔다 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주장에 다소간 감명을 받을지도 모른다, ... 1924년까지 10,000개의 악기를 수리하는 놀라운 기록을 가지게 된다.

다행히도 이러한 자기평가는, 불가피하게 공통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꽤 쉽게 알 수가 있다. 그 제작가들은 위대한 크레모나의 마스터들과 유사한 (때로는 능가하는)음질을 가진 악기들을 제작하였거나, 또는 그들은 '잃어버린 크레모나 바니쉬'를 재발견했다 - 사실, 많은 제작자들이 둘 다 이루어 냈다고도 쓰여져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러한 주장들은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바바리아의 Zacharias Fischer는 분명히

... 그의 주장에 따르면, 스트라디바리와 슈타이너와 동등한 품질로 제작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발견했다. 이러한 과정은 가끔 해로운 화학물질을 넣어 목재를 오븐에 가열하여 시도되어 졌으나 무익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1786년이었는데, 스트라디바리의 사후 겨우 50년이 지났을 때였다. 스스로 평가된 기록들은 의도된 대로의 효과를 항상 거둔 것은 아니었다. 뉴질랜드의 George Nicoll 은 독자들을
완전히 혼동시키는데에 성공했을 뿐이다. 그는 그가 다음과 같다고 믿었는데:

...과학적인 바이올린 제작의 표준적인 작업이 결과적으로 계획되어 질 수 있는 핵심을 제공했다. 길이와 넓이의 2차원만을 다루면서, 유클리드의 조화론을 공부하였고 길이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깊이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현대의 수학자들은 '생명' - 즉, 진동과 더불어 있는 문제' - 의 근원으로부터 너무나 벗어나게 되었었다. 그의 바이올린을 이 극과 극의 상대성원리에 맞게 디자인했고, '순수한 이탈리아의 음색'의 생산으로 귀결되어 졌다.

일단 의심스러운 기록들을 인식하는 법을 배운 후에는, 헨리 자신에 의하여 쓰여진 기록들을 읽음으로서 이 사전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다. 그의 저술은 교양있는 평가, 유머 그리고, 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에 있어서는, 가차없는 비판의 매력적인 결합을 보여준다. 그는 특히 간결하게 문장을 잘라내는 데에 재능을 보여주었고, 가치없는 대상에 대하여 너무 많은 단어들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분명한 생각을 전달할 수 있었다. 예를들어, 그는 우리에게 요셉 슈타이너 (Joseph Steiner)  (1)가 '미텐발트에서 1792년에 일을 했고. 절대적인 평이함으로 악명을 얻었고. 형태를 망가뜨리고 음질에서 가치가 없었다'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덧붙이기를: 때때로 "미텐발트 ("Mittenbald")"라고 레이블에 적었던 무식한 사람. 헨리는 값싸고, 대량 생산되는 악기들에 대해 쓸 시간이 없었으며, 그의 이러한 악기들에 대한 기술은 특히 매서웠다. Heureux의 레이블이 붙어서 판매되는 바이올린에 대한 그의 평가를 보자: 

"기분좋은 (pleasing)" 또는 "좋은 인상을 주는 (prepossessing)"의 뜻을 가지는 그 이름은 매우 부적절하며, 판매자의 뻔뻔함이 제작자의 형편없는 재능 만큼이나 크다. 생동감이라고는 없는 나무로 된 가면; 현저히 관상학적으로 빈곤한 모습. 가늘고 작은 음색은 좋은 활로 연주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다.

그리고 때때로 그의 기록은 너무나 가혹하여, 우리는 그가 그 제작자에 대하여 개인적인 혐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그의 William Beale의 작품에 대한 의견은 상당히 악의적이다:

정신없고 무질서한 생각을 가진 괴짜. 아웃라인, 스크롤, 사운드홀은 혐오스럽도록 못생기게 만들어 졌다. 목재는 평범하고, 바니쉬는 재앙이며, 소름끼치게 공허함 음색을 가졌다.

 

제작자에 의하여 쓰여지지 않은 것이 분명한 기록이다. 가끔 헨리는 그의 경계심을 약간 풀고는 조금 더 급진적인 의견을 그의 기록에 슬며시 집어넣기도 한다. Adam Friedrich Grimm 에 대하여 그는 수 년동안 많은 바이올린 수리사들의 머리 속을 스쳐갔을 생각을 표현한다:

장인의 솜씨는 매우 비참한 지경이다. 때로 퍼플링이 없다. 1기니 정도의 가치밖에는 없는 메마른 음색. 망치의 쿵하는 소리는, 이러한 어리석음을 부수기 위하여 사용된다면 (우리 중 몇몇에게는) 비음악적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M.E. Lantez의 경우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의 인내심과 유머가 그를 완전히 떠나서 상당히 무뚝뚝해 보이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일 뿐이다:

그의 악기들 중 다수는 예민한 연주자들이 소화불량에 걸리게 할지도 모르는 음색을 가지고 있다. 싸구려 작업은 바보 멍청이들이나 고마워 할 것이다.

많은 헨리의 기록들은 혁신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읽을 거리를 제공한다. 그는 악기의 디자인이나 형태라는 측면에서 실험적인 '개선'의 수많은 예를 묘사하고 있으며, 이런 예들을 전통주의자들의 완벽한 경멸을 가지고 대한다. 사실, 영원히 사랑받는 악기들의 한정된 숫자라는 점을 보면, 그의 이러한 의견은 옳은 것이었다. 그의 평가는 차분한 정중함 - Regina Geigenbau에 대한 평가 (아래 참조)와 같은 - 으로부터 완벽한 경멸 - 아래 기록에서 보듯이 영원히 저주받은채로 남은 John J. Hawkins의 경우 - 까지 다양하다.

Regina Geigenbau:

어퍼와 로우어 립이 음색을 제어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앞판과 뒷판은 너무 아칭이 져서 옆판에서는 결합되어 있을 정도이고, 허리의 립은 보통의 바이올린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이 남아있다. 소리의 방출은 보통방식으로 제작된 악기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상한 윤곽의 바이올린들은 사실 진지한 연주자들이 고려할만한 가치는 없다...



John J. Hawkins:

1800년 런던에서 바이올린의 새로운 형태로 특허를 받음. 옆판이나 뒷판이 없고 단지 강한 립이 앞판 아래로 이어져 있는데, 그 위에는 사운드포스트가 스프링에 의하여 앞판을 누르며 세워져 있다. 단순한 음량의 크기는 이 광기어린 구조에 의해서 망가지지는 않았으나, 아름다운 울림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는 그의 완전히 어리석은 혁신을 적용하기 위하여 진짜 스트라디바리우스를 파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가들 중 적어도 하나는 올바른 궤도에 잘 올라서 있었던 것 같다. John Frederick Grosjean은 돌아보면, 광물매장층에서 초기의 시굴을 시도했던 것과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만들지는 않았으나 현악기의 음질을 개선하고자 했던 수많은 기인들 중의 하나였다. 1837년에 바이올린의 표면을 아교와 유리가루로 코팅을 하는 아이디어로 특허를 받았다. 이 터무니없는 혁신은 이어지는 악평들로 인하여 그에 알맞는 영역으로 가게 되었다 - 그것은 망각의 영역이다.'


이런 종류의 정보를 모으고 기록하는 것은 매우 지루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몇몇 작은 일화들이 연구자의 마음을 밝혀주기도 하는데, 헨리는 이런 좋은 이야기들이 바이올린제작자들의 작업에 꼭 관계가 없을지라도 가능한 곳에서는 포함시키기도 하며 즐겼다. 그리하여, 우리는 별났던 Joseph Merlin에 대한 훌륭한 묘사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1770-1783년 런던에서 작업. 소호광장에 있는 코널리부인의 칼리슬 저텩에서의 가면무도회에서 바퀴달린 스케이트를 타고 스스로 제작한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500파운드 짜리의 거울앞으로 돌진하여 거울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그의 악기를 조각조각나게하였고, 스스로도 엄청난 부상을 입어 그 명성을 획득.


그리고 Thomas Calow의 비극적인 이야기:

참을성이 없는 경향을 가진 무책임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하기로 하면 훌륭한 수리작업을 해내곤 했다. 1905년, 겨우 37세의 나이에 더블베이스 현에 목을 매어 자살.


물론 바이올린 제작자에 관한 어떤 책도 '초자연적인 계시'의 이야기 없이는 완전할 수는 없을 것인데, 그것은 Heinrich Ohlhaver에 의하여 제작된 Revalo 바이올린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이다. Heinrich Ohlhaver는:

..."영적인 집회에서, 스트라디바리의 유령이 그에게 나타났고 그의 비밀을 알려 주었고, 거기에서부터, 그 비결의 현대 바이올린으로의 이전은 "콜럼버스의 달걀만큼이나 쉬운" 것이 었다."고 말했다..



또는, 초자연적이면서 실험적인 접근법을 결합시키려고 했던, 석탄 광부였던, Ralph E. Fishburn도 예가 될 것이다:

외관상 성실한 열렬한 심령술사로서, 그는 靈媒의 인도를 받아 스트라디바리의 두 대의 바이올린의 환영을 하나의 악기로 만들었다. 그는 이전에 제작에 대한 지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 3개월만에 악기를 한 대 제작할 수 있었고, 이를 '비올라-바이올린'이라고 명명했다.아웃라인은 분별있는 실물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확실히 꿈속에서 본 환영이었다.


이 책에서의 수 많은 비판적이고 불손한 기록의 즐거운 예시들에도 불구하고, 헨리가 제작자의 작업을 훌륭한 것으로 여겼을 때의 그의 의도는 확실할 것이다. 그의 시적인 서술방법은 다시 나타나지만, 간결함의 한계는 더이상 필수적이지 않으며 그의 생각을 더욱 더 펼쳐나간다. Giovanni Francesco Pressenda의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그의 예술에 관해 광대한 사고의 폭을 지닌 심오한 제작자로, 크레모나와 프랑스 학파의 예술적 기교를 완전히 흡수하였고 그의 바이올린에 다양한 특성을 스며들게하고, 형상화시키고, 완벽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최상의 질서로 특징지어지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었고, 단순한 탁상공론은 삼가했으며, 그 자신을 전적으로 이전의 제작자들의 법칙에 제한시킴으로서 창조를 하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느꼈다.


그는 한페이지가 넘도록 이런 식으로 계속 서술하고, 어느 시점에서는,

우리가 Pressenda의 악기들이 후대에게 이탈리아의 바이올린으로 여겨질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이것이 과장된 허풍으로 비난받지 않기를 희망한다,

 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더 활발한 많은 의견이 이 책에 포함되었다는 점은, 우드콕이 헨리의 서술을 그의 사후에 출판하여 얻은 가장 다행스러운 점이라고 할 것이다. 만약 헨리가 살아서 이 사전의 마지막 초안을 검토했다면, 얼마나 많은 이런 기록들이 수정되고 편집되어 없어졌을지 우리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기록들의 존재는 책에 생명과 흥미를 넣어 주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이 책에서 전화번호부를 대할 때에 기대하는 정도의 흥분을 기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Universal Dictionary of Violin and Bow Makers는 감동할 만한 성과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이올린 제작자들에 대해 이것과 같은 책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늘날이 소송이 많은 사회라는 점을 고려하다면, 앞으로도 이런 책은 없을 것이다.

The Universal Dictionary of Violin and Bow Makers는: Amati Publishing Ltd, 1 Northfields, Speldhurst, Tunbridge Wells, Kent TN3 OPL, UK Tel: +44 1892 870319 에서 구할 수 있다.

Alan Coggins는 호주 시드니 부근의 블루마운틴에서 Adele Beardsmore와 같이 일하는 바이올린 제작자이자 수리전문가이다. 그는 바이올린의 여러가지 측면에 대하여 저술을 해왔고 The Strad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한다. 그의 글들은 그의 홈페이지에서 읽어볼 수 있다. 앨런은 또한 호주의 현악기 제작자들에 대한 책을 쓰고 있으며, 온라인에서 과거의 현재의 500명 가량의 호주 제작자들의 정보를 담고 있는 Directory of Australian Violin and Bow Makers를 만들었다.

2007년 8월 13일 월요일

[공연] 가족오페라 마술피리 (2007.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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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니까, 가능하면 아이들이 볼 수 있는 공연들을 좀 보러 다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띈 것은 예당에서 매년하는 가족오페라 마술피리. 도윤이도 안심하고 들어갈 수 있는 가족공연. 일단 4자리를 예매했다.

8월4일 토요일 5시30분 공연.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은 가본 적이 없었다. 오페라 하우스는 간혹 가봤고, 콘서트홀이야 뻔질나게 드나들었지만, 토월극장은 어느정도의 규모인지 몰랐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가족오페라라는 이 공연에 딱 알맞은 적당한 크기의 홀이 었다. 가보고 나니, 너무 심하게 앞자리로 예매한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아이들을 맨 앞에 나란히 앉히고, 우리는 두번째 줄에 앉았다.

정식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라기 보다는, 아이들을 위하여, 훨씬 재미있게 꾸미고, 복장도 아이들이 즐겁도록 밝은 옷을 입은.. 수정된 마술피리였는데, 공연을 보면서, 사실 모차르트 시대의 마술피리 공연도 이러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징슈펠로서, 즐거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밝은 내용의 마술피리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면 즐기게 하려는 것이 원래 모차르트의 의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적인 측면에서 이러저러한 아쉬움이 있었다고 쓰는 것은 이 공연에는 정말 걸맞지 않은 리뷰가 될 것이지만, 딱 하나는 세명의 소년의 역할을 실제로 보이소프라노가 했었으면 정말 좋지 않았을까라는 점이다. 지혜의 세계로의 인도자 역할을 맡고 있는 세 명의 소년은 세명의 '아가씨들'이 맡아 노래를 했는데, 확실한 느낌이 살지 않았다. 그 유명한 밤의 여왕의 아리아도 조금 아쉬웠지만.. 통과..

지윤이 도윤이는 이 공연을 보고 와서 자기들끼리 오페라를 흉내내며 놀았다. 공연이 재미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특히 파파게노와 파파게나는 아이들에게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파파게나가 할머니 복장을 하고 엉덩이를 흔들며 추던 춤을 흉내낸다.

나는 집에 돌아와 마술피리 DVD를 걸고 다시 한번 보았다. 좀 잔인한 비교감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공연에서의 즐거운 느낌에, 내가 생각하던 모차르트 마술피리의 음악(!)을 더해 보고 싶었다. 그냥 DVD만 볼 때 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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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오르세 미술관展 (예술의 전당)

휴가 마지막날인 8월5일 일요일 가족들과 함께 예술의 전당을 찾았다. 오르세 미술관전을 보기 위하여.

시내 곳곳에서 하는 많은 전시회들의 광고들을 보면서 이건 꼭 가야겠다라는 전시회가 몇 건이 있었는데, 사실 오르세전은 그 중의 하나는 아니었다. 이유는 이미 10년전 5월 파리에서 오르세미술관을 한번 훑어 보았었기 때문. 그 당시에 갔던 미술관, 박물관 중에서 오르세는 가장 내 맘에 들었던 곳이었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었다. 오르세의 그림을 몇 점 서울로 가져와서 보여 준다고 해도, 그때의 감동이 되살아 날까 싶었었다.

그런데, 그 때 같이 파리에 갔던 남편은 바로 그 오르세의 문 앞에 앉아 문 앞 광장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꼬마들이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며 노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에게 혼자 오르세를 보고 나오라고 이야기 했었다. 들어가서 수 많은 명작들을 보면서, 정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런 그림들을 포기하고 문간에 앉아 있다 갈 수가 있단 말인지... 내가 두고두고 그 때의 일을 이야기했던 지라, 아마 남편의 입장에서는 오르세의 그림들을 한 번 봐야 겠다는 안타까움이 스스로에게도 생겨 있었던 모양이다. 이번 전시회는 그래서 남편이 먼저 가자고 이야기 했다.

일요일이라, 나름대로 긴 줄을 서서 들어 갔다. 사람들도 많았고, 특히 설명을 해주는 그림 앞에서는 도저히 그 근처에도 갈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이어폰으로 몇 몇 유명한 그림의 설명을 들으며, 그림들을 구경했다. 전에 초현실주의 르네 마그리뜨 전에서도 느꼈지만, 좀 유명한 전시회에서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꼼꼼히 구경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에 치이고, 밀리고....

그래도 그림들은 아름다왔다. 도록도 한 권 구입.. 한국전을 위한 도록이라서 그런지 그다지 값이 비싸지는 않은 듯 했다. 그림 작품 수가 별로 많지 않아서 좀 아쉽긴 했지만, 아이들이 있어서... 더 많은 그림을 시간을 더 들여서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듯 했다.

이런 그림들을 상설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프랑스, 영국, 미국, 이태리 처럼, 도시 곳곳에 박물관이 있고, 그 곳에 아름다운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도시... 그래도 지난 1-20년간을 돌이켜 보면, 문화의 인프라의 발전은 눈부실 정도이니... 곧 그런 공간들이 많이 생겨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아래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사진들. 전시가 끝나고 홈페이지 문 닫으면, 사진도 짤리려나...

 상당히 맘에 들었던 작품 중 하나. 아이를 보는 엄마와 요람, 요람속의 아기의 구조가 안정감과 편안함을 준다.

만종. 그림은 작은데 사람은 많아서, 자세히 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19세기 파리 예술가들의 생활이 느껴져서 좋았던 그림.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보기 좋다.
역시 맘에 들었던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을 그린 그림.
고전적인 그림처럼 보이는 그림.

전시작품








부산 해운대 (2007.7.30 - 8.1)

1. 7월30일, 월요일.

게으른 부부는 전날까지 짐도 안 챙겨놓고 있다가 아침에야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해운대로 간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계획이 없다. 당초에는 남해나, 전남의 해안 쪽을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서울에서 겨우 며칠 전에 숙소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 사실은 아니었다 보다.. 라고 해야 한다. 내가 찾아 본 것이 아니라 남편이 찾아 본 것이므로.

일단 남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잡아본 숙소가 해운대의 한화리조트. 부산에는 가본 적이 있어서 (그것도 벌써 10년이 훨씬 넘은 것 같지만), 사실 별로 내키지는 않았다. 더구나 해운대라... 여름 휴가 피크 시즌만 되면 TV뉴스에 최대인파 운운하며 나오는 장면이 바로 해운대 아니던가. 왜 내가 거길 가야 하는 건지.. 사람구경은 서울에서도 매일 실컷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숙소가 거기밖에 없단다. 딸내미 둘 데리고 여기 저기 헤매 다니기도 그렇고.. 결국은 그러자고 했다. 부산에 가는 김에 심하게 잡음이 나는 악기를 에떼르노 성훈님께 보일 수 있겠다는 것이 유일한 위로라고나 할까.

어찌 어찌 오전에 출발은 했고, 분당에 들러서 회원카드를 빌리고 (결국은 할인을 못받았지만..), 고속도로를 탔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해리포터에 열중하고 있었고.... 휴게소에서 대충 점심을 때우고, 달려 달려... 5시 경에 해운데 한화리조트에 도착. 바다가 바로 앞에 있었고, 주위에는 타워팰리스 같은 주상복합건물들이 들어서 있거나 공사중이거나 했다. 해운대라는 동네는 마치 서울의 청담동처럼 깔끔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물들과 가게들이 잔뜩 들어서 있는 것 같았다.

짐을 내려놓고는 산책을 나섰다. 웨스틴 조선 호텔 쪽으로 걸어서, 해운대 해수욕장까지. 월요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저녁 무렵이라서 그다지 덥지도 않았고... 지윤이와 도윤이는 잠시 모래장난을 했다.

해운대 해수욕장을 따라서 쭉 걷다가 모씨가 추천했다는 횟집으로 갔다. 돌도다리를 한 마리 잡아서 네식구가 포식을 했다. 서비스나, 시설이나, 음식이나... 서울만큼 깔끔하고 괜찮았다. 부산에 왔다거나, 여행을 하고 있다거나 하는 느낌이 별로 안드는 점이 흠이라고나 할까.

콘도로 돌아와서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노래방에서 1시간을 보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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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7월 31일 (화) 에떼르노 공방

다음날은 콘도 앞에 있는 곰탕집에서 아침을 먹었다. 시설과 가격은 서울의 강남의 곰탕집 같았는데, 맛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늦은 아침을 끝내고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 에떼르노 공방으로 갔다.  성훈님은 1시간이 훨씬 넘게 (시계를 안봐서 모르겠지만 거의 두 시간정도 걸렸던 것 같다), 이리 저리 악기를 둘러보고 이것 저것 봐꿔 보며 잡음의 원인을 찾으려고 진땀을 뺐다. 결국 발견한 가장 그럴 듯한 원인은 오래된 레이블. 풀이 붙어 딱딱하게 말라 붙은 레이블이 오락가락 하는 습기에 반응해서, 습한 날은 더 심한 잡음을 내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 결국은 슈스터라고 쓰여진 레이블을 떼어 냈는데, 그 밑에 스트라디바리 카피라는 레이블이 하나 더 붙어 있는 것도 발견했다.

공방은 생각보다 더 아담했다. 남편은 성훈님 첼로와, 반수제 첼로를 켜보았는데, 확실히 성훈님이 직접 제작한 첼로가 소리내기가 편했다고 한다. 반수제 첼로의 외양은 매우 화려했는데, 수제첼로는 올드 이미테이션이면서 소박하고 고급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지고는 싶지만... 차마 가격을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수년 후에, 남편이 첼로를 끝까지 열심히 하면 그 때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겠다.

아이들은 쉽게 지루해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내 악기의 잡음은 사라졌다. 악기의 어느 부분 아교가 떨어졌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라는 걸 알았다. 성훈님은 미세조정기도 이쁜 것으로 바꿔 주셨고, 수고비도 받지 않으셨다. 오랫동안 너무 공들여 봐주셨는데...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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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7월 31일 (화) 아쿠아리움과 조개 구이

해운대로 다시 돌아 갔다. 부산에 새로 생긴 아쿠아리움이 상당히 좋다더라는 소문을 들어서, 아이들에게는 좋은 장소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차를 지상 주차장에 세워둔 고로... 바이올린을 매고는 아쿠아리움으로 향했다. 어제는 시원했는데... 오늘은 쨍쨍 햇빛이 장난이 아니다, 바이올린을 매고 걸으면서도 막 따끈하게 손보고 나온 악기에 무리가 갈까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아쿠아리움은.. 서울의 코엑스 아쿠아리움 보다 어떤 면이 더 나은지 잘 모르겠다. 상어 수조 같은 것은 조금 더 나아 보이기도 했는데, 특히 더 재밌지는 않았다. 잠수부의 마술쇼도 보고, 인어 공주 공연이 있었다고 했는데, 어디서 하는 지 몰라서 그냥 나왔다. 아이들에게 돌고래 머리띠를 하나씩 사주고...

차를 타고 이번엔 조개구이를 잘 한다는 곳을 찾아 갔다. 역시 모씨의 추천 장소. 야외의 천막 식당에서 조개구이, 가리비구이, 된장찌개를 먹었다. 안면도의 조개구이 보다 낫다. 뭔가 허름해 보이는 식당에서 영 엉망인 서비스를 받으면서 음식을 먹고 있으니, 부산에 온 것 같았다. 어제 보다는 오늘이 좀 더 localize된 것인가. 식당에서는 해송과 방파제와 낛시하는 사람들과 바다가 보였다. 

상당히 긴 시간동안 조개와 씨름을 하고는 바닷가로 갔다. 낛시를 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고, 벌써 저녁 무렵이라,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있었다. 바닷가를 산책하고는 다시 차로 돌아왔다. 악기를 차에 둘 수가 없어서 계속 들고 다니느라 상당히 피곤...

일찌감치 콘도로 돌아와서 과일을 먹고 TV를 보고... 난 또 해리포터를 읽었다.


4. 8월 1일 (수) 을숙도와 남부의 교통체증

어딜가야 하나.. 원래 계획도 기대도 없이 떠나온 여행이라 그런지, 별로 가볼 곳도 마땅치 않다. 일단 철새도래지라는 을숙도를 가보기로 했다. 거기에서 진주로 가서 촉성루를 보고, 서울로 돌아가자.

을숙도는... 때를 잘 못 맞추어 간 것인지, 새가 한 마디도 없었다. 을숙도 조각공원이 있어서 잠시 구경을 했다. 자전거를 빌려 주는 곳이 있어서 자전거를 탈까도 싶었는데, 햇빛이 너무나 따가웠다. 무얼하고 놀아야 하는지 난감해 지는 순간....

부산에서 진주로 가는 길에 들어서서 조금 가자, 교통체증이 시작되었다. 이건 좀 심하다. 진주 촉성루를 포기하고 이 허탈한 여름 휴가 여행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건가.... 차는 진주까지 밀리고 있는 듯 했다. 도저히 갈 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우리는 서울 방향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난 조수석에서 책을 읽다가 조금 자다가 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거의 다 왔을 즈음에 운전을 바꿔 줄까 했었는데... 결국은 그 긴 거리를 남편 혼자 운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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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많이 보고 얻은 여행은 확실히 아니었고, 충분한 휴식이 된 것도 아니었다 (특히 남편에겐). 3일동안의 여행이었지만, 첫날과 세째날은 차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실제로는 1.5일정도의 짧은 여행이었다.

그래도, 바닷바람은 시원했고, 음식을 즐겼으며, 가보고 싶었던 에떼르노공방에도 갔다왔다. 그냥 단순히 서울을 벗어나서 좀 멀리 다녀온 것으로 조금의 기분전환이 되긴 했다. 아이들은 수영장에도 바다에서 못들어간 것이 영 아쉬울 지도 모르지만... 이런 저런 사람들을 구경하고, 올빼미도 보고, 노래방도 가고... 별 불만 없어 보인다. (내 착각인가..)

그래도 다음엔 좀 더 나은 여행을 하고 싶다. 국내 여행을 하더라도, 사전에 좀 더 많이 알아보고 계획을 많이 세우고.. 무엇보다 시간을 좀 더 길게 잡으면 괜찮지 않을까. 가을이 깊어갈 즈음에 또 한 번 여행을 갈 수 있었으면...

[책] 인어수프


야마다 에이미| 김난주| 북스토리| 2006.07.14 | 206p | ISBN : 8989675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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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반쯤에 자려고 누웠다가 옆에 있는 책에 손을 뻗쳤다. 글씨도 큼직큼직하고 페이지 수도 얼마 안되어서 금방 읽을 것 같더라. 그만 읽고 잘까, 다 읽어 버릴까.. 계속 갈등하면서 읽었다.

이 책을 왜 사 놓았는지, 언제 샀는지도 잘 기억이 안난다. 어떤 다른 책을 샀는데, 같이 딸려온 책이 아닐까하는 의심도 든다. 야마다 에이미라는 작가도, 인어수프라는 제목도, 책의 내용도 생소하다.

어쨌든, 몇 장 안되는 얇은 책을 결국은 다 읽고 잤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부터 눈꺼풀이 자꾸 내려온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보니, 도무지 작가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다. 문체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일본 소설 같은 느낌도 별로 많이 들지 않는다. 소설은 사실 주인공이 발리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몇 명의 흥미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와양과 토니. (사실은 작가를 한다는 주인공이 더 재미있는 캐릭터이긴 하다)

주인공, 와양, 토니, 그리고 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일본인 유부남. 그들의 사랑과 성애의 방식을 그리면서도, 그들 사이에 "관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을 그리되 관계를 그리지 않는 것이 이 작가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소통은 토니가 말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완전히 막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긴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본 소설스러운 점은 있긴 하다.)

소설의 결말은 소년의 죽음이다. 왜 토니가 거기서 죽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은 확실히 토니를 통하여 또다른 사랑의 방식을 배운다. 토니가 죽지 않아도 주인공은 이미 실연의 아픔은 잊어 버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토니가 서핑 중에 바다에서 죽는 모습은 그의 사랑이 자연을 닮아 있고, 자연을 닮은 존재인 토니가 자연과 일체가 되는 (그래서 인어수프가 되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관계가 없다는 것은 소설의 배경이 발리라는 점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기도 하다. 일본인인 주인공은 발리에 아무런 연고가 없는 완전한 이방인이다. 그녀는 (일본에서도 자유롭게 살았겠지만) 발리에서 지극히 자유로운 생활을 한다. 관광객의 신분으로... 더 이상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발리의 축제 때, 주인공은 와양의 집을 방문하는데, 그녀와 와양의 식구들은 호감을 갖고 있기는 하나, 와양의 없으면 말이 통하지 않는다. 관계를 맺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관계불능의 상황들은 그녀가 발리에서 자유로은 성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책을 읽는 독자들이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아무런 얽매임 (관계는 서로를 구속짓는 다는 점에서 얽매임이다)이 없는 소설과 같은 상황에서 그녀의 행동은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책 뒤에 다른 일본인 작가가 달아 놓은 서평에서, 그는 야마다 에이미의 자유롭고 당당한 성애의 묘사와 사랑의 방식을 부러워 하고 있다. 기존의 일반적인 사랑의 방식이 오히려 속물적이며, 야마다 에이미의 방식이 오히려 솔직하고 순수하다는 것. 하지만, 그녀의 방식이 가져오게 될 파장은... 그녀가 소설 속에서 그린 관계가 없는 진공의 공간에서나 물결치지 않을 것이다. 관계로 얽혀 있는 사회에서는 파도가 쓰나미가 될지도....

[책] 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 (스포일러 다량 포함!)

7월21일, 7권의 발간일 오후에 책이 배달되어 왔다.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일단은 미뤄 놓고 시간이 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름휴가.

앞부분부터 읽기는 했지만, 결국은 마지막 페이지를 들춰 보고야 말았다. 마지막 문장은 scar가 들어있지는 않더라.. "All was well". happily ever after와 비슷한 동화적인 결말인가 보다... 19년 후에 해리가 살아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 책을 읽으니... 긴장감은 훨씬 줄어 들었던 것 같다^^

내가 읽은 책은 영국판, 607페이지. 미국판은 759페이지라는데.. 내용이 많은 건지 글자가 큰 것인지는 모르겠다.

7권은 앞서 나온 책들 (특히 5, 6권)에서 해리 주변인물들의 과거가 심도깊게 파헤쳐지는 데에 비하여 그런 미스테리적인 부분은 많이 줄어 들었고, 거의 시작부터 deatheater들과 order의 전투 장면들이 나오는 등 액션 장면이 많았다. 영화로 만들면 전작들보다 더 성공적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새로 등장하는 캐릭터는 루나굿의 아버지, 그린고트 습격을 도와주는 고블린 그리푹, wand 제작자인 올리벤더 정도...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것들이 전보다는 덜 배치되어 있어서 인지, 이야기 전개가 상당히 평이하게 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사실 Deathly Hallows의 존재와 Horcrux가 무엇인가에 대한 내용이 7권에서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고는 있으나, Deathly Hallows는 Elder wand를 제외하고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 invisible cloak은 1권부터 쭉 이용되던 것이라..별로... - Horcrux는 6권에서 찾고 있던 locket을 찾는데 집중되어 있었고, 나머지 Horcrux를 찾는 것은 뒷부분에서 너무나 빠르게 진행되어 버려서, 궁금증이 유발되기 보다는 아.. 그렇구나.. 하는 정도로 그쳐 버리게 되었다.)

거의 끝까지 궁금했던 것은 덤블도어가 정말 6권에서 그렇게 어이없이 죽었던 것이 맞는지, 스네이프와 덤블도어의 비밀은 무엇인지 하는 것이었는데, 결국은 책의 끝부분에서 밝혀지게 된다. 롤링도 이 스네이프와 관련된 부분을 시리즈에 걸쳐지는 가장 큰 비밀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6권 이후로 워낙 많은 이야기들이 무성했었기 때문에, 이런 내용이 엄청나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던 듯... 열심히 플랏을 짜서 책을 썼던 롤링은 이 점이 아쉬울 것도 같다.

마지막 호그와트 전투 장면까지는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던 소설은 마지막 두 챕터에서 상당히 묘하게 진행이 되었다. 해리가 아바다 케다브라 저주를 받고 쓰러진 후, 꿈인지 뭔지 모를 공간에서 덤블도어를 만나는 장면, 덤블도어는 해리가 죽지 않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리가 돌아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돌아가지 않는 다면 죽을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애매모호한 이런 장면들은 나쁘지 않았는데, 문제는 덤블도어의 기나긴 이야기들이다.

아.. 사실 그 전 챕터에서 스네이프가 죽고, 그의 기억을 해리가 펜시브에 담아 보는 것부터 롤링의 긴 설명이 시작되고 있기는 했다. 물론, 이 부분은 스네이프의 그간의 행동과 덤블도어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지만, 뭔가 좀 늘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이걸 작가의 입으로 꼭 이렇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 것인지 하는 아쉬움.

마지막 챕터에서 볼드모트와 해리가 마지막 결투를 하는 장면은... 더이상 아무것도 남은 것 없이 모두를 설명해 버리겠다는 작가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부분. 해리는 현자처럼 볼드모트에게 차분히 왜 자신이 승자인지 그리고 볼드모트가 죽을 것인지를 꼼꼼히 설명해 준다. 상당 부분의 설명은 볼드모트는 처음 듣는 것일지는 몰라도 독자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죽음을 앞둔 볼드모트에게 그렇게 잘 설명해 줄 필요가 있나? 해리는 (롤링은) 볼드모트에게 조차 선택의 기회를 주려는 모양이다.

해리는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볼드모트의 생각을 읽고, 마지막 호크룩스의 위치도 파악하고, 갑자기 사리가 매우 분명해진 것처럼 보인다. 해리는 지금까지 단순한 영웅이 아니라, 성장기의 소년이고 이 책을 읽는 어린 독자들이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대상이었던 것에 반해, 마지막의 해리의 행동은 이 17세의 소년이 갑자기 도(?)를 깨친 것처럼 느껴져서 낯설기도 하다.  

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해리포터는 재미있는 책이다. 그 동안 보여준 롤링의 상상력은 정말 놀랍다. 607페이지의 책 중 절반인 마지막 300페이지를 휴가에 놀러갔던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오면서, 그리고 집에 와서 새벽까지 하룻동안에 읽었다. (한글이 아니라 영어책인데도 그렇게 열심히 읽게 만들었다는 점은 역시 이 책이 정말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제 또 어디서 이런 즐거운 소설을 만날 수 있을지... 참신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을 가지고 깜짝놀랄 만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책. 롤링이 다음 책을 낸다면 과연 해리포터를 능가할 수 있을지...


7권 표지.
죽음의 성도들로 번역된 Deathly Hallows는 "성도"라는 단어가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성스로운 물건 "성물" 정도로 해석이 되어야 한다. Deathly도 Deadly라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 또는 "죽음의 신의"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해리포터와 죽음의 신의 성물 (또는 선물) 정도가 알맞는 번역이 아닐까 싶다.



1권부터 마지막 권까지의 표지를 모아 만든 우표 사진. 위키피디아에서 얻었다.
책을 다 읽고 위키에 가보니.. 7권이 내용이 요약되어 올라와 있었다. 오늘 가보니, 롤링이 인터뷰에서 밝힌 등장인물들의 뒷 이야기까지 올라와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Harry_Potter_and_the_Deathly_Hallo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