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20일 월요일

[번역] 모차르트 즉흥연주하기 by Robert Levin

Improvising Mozart by Robert Levin

클래식 음악가들은 매우 전문화되어져 버렸다. 오늘날 연주자들의 대부분은 하루에 수시간씩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쓰여진 텍스트를 배우고 완벽하게 익히기 위하여 고통스럽게 연습한다. 음악을 재생산하는 데에 매우 재능이 있으나, 그들은 종종 음악을 창조해내는 훈련은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한다. 출구를 못 찾거나 대사를 잊어버린 상황에 직면한 배우는 그 갭을 메울 대사를 그 자리에서 생각해 내면서 상황을 모면하곤 한다. 기억력의 실수, 갑작스런 발음이나 사투리의 대조는 등장인물과 배우 사이의 동일성에 대한 환상을 산산조각 내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상황이며, 그것이 흉내내는 인생보다 순간적으로는 더 강렬해 보이는 연극의 연금술이 아니라는 것을 뼈져리게 알려준다. 운율이 있는 고전시가에서 애드립의 대사를 읊는 것이 어렵지만, 모든 배우들에게 그의 모국어로 즉흥적으로 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일상화된 경험이다. 이것은 음악가들에게는 별로 그렇지가 못하다; 그리고 위대한 작곡가의 개인적인 언어들 안에서 그런 발명의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작곡, 문법, 문장론, 수사학 그리고 음악 (이론)의 구조에 대한 집중적인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연주가들에게는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겁나는 일이다.

건반 앞에 앉은 어린 모차르트

18세기에는 모든 작곡가들은 연주자들이었고 사실상 모든 연주자들은 작곡을 했다. 더구나, 실제로 연주되는 모든 음악은 새로운 것이었다. 오늘날의 대중음악과 예술음악과의 분리는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각각은 시대의 특징에 맞는 자연스러운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흥연주는 비예술 음악에서는 필수적이다. 모든 문화권의 음악에서 존재하고, 재즈에서는 중심적인 과제이다. 루이 암스트롱, 콜맨 호킨스, 아트 테이텀,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과거의 대가들의 임의적인 샘플링임)의 천재성은 환상적인 상상의 자유로은 비행을 담은 음반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모차르트의 연주들은 즉흥연주가, 피아니스트, 작곡가 (이 것은 그의 동시대인들이 그의 재능에 대해 평가를 했던 순서이다)로서의 그의 재능을 보여주기 위하여 디자인된 것이었다.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소위 카덴차와 도입부 (전주)라고 불리우는 - 그가 충동적으로 대담한 연주를 하기 위하여 설정한 - 인위적인 공백들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많은 패시지들을 스케치나 개략적인 형태로 남겨두었는데, 실연에서 연주자들이 각각의 연주에서 새로운 특정한 표현적인 내용을 가지고 채우도록 연주자들의 의지에 맡겨 놓은 것이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1번 1악장의 자필 악보. 이 페이지 마지막의 코드는 모차르트가 즉흥연주를 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공백 (contrived chasms)' 중의 하나이다. 

20세기에 음악가들은 충실하게 작곡자들이 써놓은 성서 (악보)를 지켜서 연주하도록 훈련 받아왔다. 만약 연주자의 의지가 나타나면, 작곡된 곡을 단순히 자기 자신을 과장하여 드러내려는 도구로만 사용하기 위하여 곡의 지시들을 무시하고 눈길을 끌게하려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졌다. 고전음악의 연주자와 청중 각각은 작곡가들이 이 들 작품을 썼던 것보다 수백, 수천 배는 더 많이 표준화된 레퍼토리를 경험해왔고, 작품이 최초에 연주되었을 때의 효과의 참신함을 그들에게 다시 느끼게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 졌다. 오늘날 표준화된 많은 연주들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경우에서 즉흥연주는 전체적인 작품의 성격을 내부에서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한데, 쓰여져 있는 텍스트를 충동적으로 꾸며서 연주하는 것은 음악적인 표면과 어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꾸밈음과 즉흥적인 부분들은 작품의 개성을 묘사하는 것을 좀 더 강조하여야 하며, 단지 평범하고 진부한 관습 (여기서는 트릴, 저기서는 curlicue)을 연속으로 넣어 놓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모차르트와 그의 동료들로로부터 그 음악의 장식된 버전이 분명하게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장식의 종류와 양을 보여주고 있는 상당수의 예를 가지고 있다. 이런 증거로 비추어 볼 때, 오늘날의 연주 중 많은 수가 받아 들일 수 없을 만큼 불완전하다고 모차르트가 생각할 지도 모를 만한 방식으로 연주되는 패시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연주가 기대하는 바처럼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가 아니라 오히려 '..... 그것이 문제가 아니로다'가 된다면, 그 연주가 얼마나 시적이고, 얼마나 음율적으로 매혹적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6번 ('대관')의 자필 악보에서 느린 악장의 시작 부분. 피아노 부분의 오른 손 부분만이 쓰여져 있다 — 모차르트는 장식부분 뿐만아니라 왼손도 즉흥연주 하였을 것이다.

오르가니스트는 제외하고, 고전 음악 연주자들은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는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하여도 거의 다 더이상 즉흥연주를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연주자들은, 경쟁과 레코딩의 가혹한 상황 하에서, 일관성과 정확성에 어떠한 위협을 가하게 되는 위험을 회피하는 법을 일찌기 배우게 된다.  즉흥연주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으나, 위험을 피하는 것보다 더 음악의 드라마틱하고 감정적인 메시지를 파괴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즉흥연주도 아무 것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발음이 어떤 곡의 언어에 특징을 나타내어 주는 지는 분명히 중요하다. 영화 제작자가 역사적으로 정확한 위치에서 그 시대의 소품들과 복장을 입고 그 시대의 언어로 대화를 하는 것을 수백만 번을 찍었으나, 모든 장면에서 그 장소와는 맞지 않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얼마나 이상하겠는가. 크리스토퍼 말로우이의 희곡이 시골 알라바마의 사투리와 억양이 갑작스럽게 삽입되면서 공연되면 청중들은 그로테스크하거나, 코믹하다고 인식하게 될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언어적인 부조화를 음악에 있어서는 주저없이 인정을 하곤 한다. 만약 모차르트의 언어가 말로우이의 것 만큼이나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면, 각각의 연주의 부분으로서 그것을 새롭게 고안해 내기 위하여, 그 곡의 내부로부터 배우는데에 시간을 쓰는 것은 분명히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모든 모차르트 연주의 목적이며, 특히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the Academy of Ancient Music와 같이 하는 이 협주곡 사이클의 레코딩에서의 목적이기도 하다.

출처: http://www.aam.co.uk/features/9705.htm

댓글 3개:

  1. 호그우드가 지휘한 피아노 협주곡이 갑자기 생각나네요. 피아니스트가 누구였더라...기억이...하여간에 그 시디 앞의 짧은 책에서 카덴짜에 대해서 얘기하던데, 매번 녹음할 때마다 즉흥적으로 다른 카덴짜를 연주했다고 하는데 흥미로웠습니다. 음...다른 카덴짜는 어떤 것이었을까 하고 궁금해지더군요.

    녹음은 그렇다해도 연주회 무대 위에서도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음악-특히 항상 똑같은 카덴짜-을 듣는 일은 좀 재미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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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amaDeus - 2007/08/22 20:00
    너무 획기적(?)이어서 충격적이지만 않다면, 연주자들의 개성이 살아있는 카덴차를 듣는 것은 정말 즐겁죠^^ 카덴차 뿐만아니라, 연주자들의 즉흥성이 살아있는 장식음을 들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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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amaDeus - 2007/08/22 20:00
    크리스토퍼 호그우드가 지휘했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녹음에서 포르테피아노 연주했던 사람이 바로 저 글을 쓴 로버트 레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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