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8일 월요일

프랑수와즈-조세프 고섹 1734-1829


François-Joseph Gossec (1734-1829)

가보트와 탕부랭으로 유명한 고섹. 어린이를 위한 음악을 주로 작곡한 작곡가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만큼 발랄하고 아름답고 신나는 선율의 곡들이다.

고섹은 1734년 1월17일에 네덜란드 남쪽의 베르니스 (현재는 벨기에)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17세에 프랑스로 건너간 이후로 프랑스에서 작곡가로서, 지휘자와 음악감독으로, 또 교수로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요한 슈타미츠의 영향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교향곡 형식을 익혔고, 라모의 지휘 하에서 바이올린과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수많은 교향곡을 써서 프랑스에서 교향곡을 대중화시켰고, 줄곧 귀족들을 위한 오케스트라와 오페라좌에서 일했었지만,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공화주의자로서 신체제를 옹호하며 혁명 대중을 위한 음악들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프랑스 학술원 및 콩세르바튀르의 창립멤버이기도 했으나, 나폴레옹이 득세하고 다시 귀족정치가 시작되자 물러나 후학을 양성하는데에 몰두한다. 나폴레옹의 워털루 패전 후 콩세르바뛰르가 문을 닫자 그는 파리교외의 파씨로 은퇴한 후 9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섹은 서정적인 곡을 쓰는 재능과 오케스트라의 소노리티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이 둘은 결합되어 그의 최고의 작품들에서 뛰어난 효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요한 슈타미츠의 강한 영향을 받았으나 매우 독자적인 면도 있었다. 후기 교향곡들은 충만한 소노리티와 뛰어난 관파트가 있는 훌륭한 작품들이다.

그는 실질적으로 18세기 프랑스 음악을 이끌며 많은 작품을 쓴 다재다능한 작곡가였다. 그는 화성적인 상상력과 소리의 질감에 대한 감각에 의존하여 오케스트라의 역량을 증가시켰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를 예고하는 많은 실험을 하는데, 예를 들어, 그의 테 데움 (1779, 1200명의 가수와 300명의 관악주자)은 훗날 베를리오즈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음악에 있어서 분명한 형식과 오케스트라 색채의 혁신은 프랑스 기악음악 발전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밖에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라고 할 수 있으나, 모차르트와 베를리오즈는 그의 레퀴엠을 극찬하고 자기들의 장례미사곡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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