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27일 일요일

Happy Birthday to you!

251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작년엔 250년이라고 요란했었지요... 늘 변함없는 그의 음악에 감사를 보내며~~

Good Morning~!
 
Picture of Wolfgang Amadeus <small>(Amadé)</small> Mozart.
 
 
Picture of Wolfgang Amadeus <small>(Amadé)</small> Mozart.
 

사진출처: http://www.classical-composers.org/comp/mozartwa
그리고, http://shop.berliner-philharmoniker.de/index.php?cat=c14_Plakate-und-Postkarten.html&page=2

2008년 1월 26일 토요일

레슨일지 2008.1.25 (금), 오케연습 2008.1.24 (목)

원래 주초에 레슨을 받아야 하는데, 월요일 저녁에 conference call이 잡혀 버렸다. 아일랜드 사람들이라... 어쩔 수 없이 그 시간에 해야 했다. 그래서 레슨을 금요일로 미뤘다.

수요일엔 간만에 와튼 동기들을 만나고, 목요일은 오케스트라 연습에 갔고.. 결국 연습을 거의 못하고 (또..;;;) 레슨을 받으러 가야 했다. 금요일이라 차가 밀려서... 회사에서 한시간 15분이 걸렸다. 시간만 보면.. 대전이나 청주에 레슨 받으러 가는 것이나 비슷하당.....;;

연습도 안했는데... 웬일인지... 선생님이 진도를 다 나가 주신다..;; 기분이 묘하다. 포기하신 걸까 ㅡㅡ;;

악보는 잘 보니까... 문제는 보잉이라고 말씀하신다. 당연한 말씀...; 활밑에서 활끝까지 동일한 음색이 들려야 한다. 활에 힘 조절이 잘 안되는 문제는 계속적인 보잉연습으로만 해결이 될 부분... g, d현에는 팔꿈치를 들고 보잉을 해야 하니 고음 현들 보다 더 힘드는게 당연한데, 천성적으로 본질적으로 게을러서인지..;;; 그게 잘 안된다는 것. 저음 현들에서의 보잉에 더 신경을 써야 겠다. 저음은 보잉도 운지도 그닥 쉽지가 않다..;;

하이포지션에서 음정이 부정확한 것도 문제. 손가락을 좀더 바짝 붙여야 하는데... 사실 난 손도 작고 손가락 끝부분도 가늘어서 남들보다 하이포지션 음정 간격을 쉽게 붙이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4번 짚을 때 3번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할 정도로 붙여야 한단다..;;; 손이 솥뚜껑 같은 분들은 어떻게 하이포지션을 짚는지....

레슨 하루 전 목요일, 오케스트라 연습 때에는 2악장과 3악장을 중점적으로 연습했다. 2악장 두번째 페이지는 밀착된 보잉이 관건인 것 같다. 바로 옆의 현이 아니라 두 현 너머 사이를 슬러로 연결해 가면서 반주를 넣어 주어야 하는데... 음...;;; 연습해야지 뭐.. 3악장은 리듬감이 관건인 듯. 악보는 하나도 안 어려운데 말이다..;; 3악장 중반까지 연습했다.

끝나고 나오는데 지휘자샘이 빌려가신 DVD를 주시면서 고맙다고 선물까지 같이 주셨다. 헉..;;; DVD값보다 선물로 받은 허브티값이 더 비싸겠당... 너무 미안한데, 안받을 수도 없고.. 난감하다. 어찌 보답을 할꼬...;; 첼로의 다른 분이 또 빌려달라고 하셨는데 어느 분인지 기억이 안나서 그냥 왔다. 다음 주에 빌려 드려야징.

2008년 1월 19일 토요일

J. S. 바흐의 '커피 칸타타' (BWV 211)


아무 할 일이 없는 토요일. 토요일 아침 레슨을 그만두고, 지윤이도 방학이라 토요일이 정말 한적하다. 아점을 먹고 지윤이가 커피를 한 잔 가져다 주었다 (네스프레소를 사놓았더니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을 만큼 커피 만드는 것이 쉬워졌다^^). 맛난 커피를 마시면서 문득 바흐의 커피칸타타가 떠올랐다.

사람이 커피마시기 시작한 것이 대략 9세기부터 라고 한다. 유럽에 소개되어 널리 마시게 된 것은 17세기경이라고 하고, 최초의 커피집은 1645년에 이태리에서 문을 열었다. 바흐가 이 곡을 쓴 것이 대략 1732년에서 34년 사이라고 하니, 유럽에서 커피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 대략 100년쯤 뒤가 되는 셈이다.

한국에 커피가 들어온 시기는 언제쯤일까? 보통 19세기 후반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한다. 서양문물들이 들어오면서 같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당시 고종이 커피를 매우 즐겼다는 이야기도 널리 알려져 있는 걸 보면 그 무렵 왕실과 귀족들의 값비싼 기호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로부터 100년도 더 넘은 지금은, 거리마다 커피점이 넘쳐 나고 종류도 너무나 다양해져 버렸다. 바흐시대처럼 딸이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신다고 혼내는 아버지는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지만... 커피로 엄청나게 돈을 번 별다방의 성공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고, '별'나게 비싼 커피값과 대조적으로 충격적일 정도로 싼 커피 산지의 임금, 그리고 이제 스스럼없이 비싼 커피를 소비하게된 우리나라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도 한동안 사회적인 관심을 끌었었다. 커피는 이래저래 수백년동안 사람들의 관심대상이고 화제거리를 몰고 다니는 모양이다.

원래 제목은 "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 ("조용하게, 떠들지 말고") 라는 것이지만 '커피칸타타라'는 제목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18세기 바흐의 동네인 라이프찌히에서는 아마도 커피중독이 상당한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했었던 것 같다.  이 칸타타의 가사는, 바흐와 많은 작업을 같이 했었던 크리스티안 프레드리히 헨리키 (Christian Friedrich Henrici)가 썼다. 아래 가사 번역 참고.

이 곡은 라이프치히의 짐머만의 커피집에서 콜레기움 무지쿰의 연주로 초연되었었다고 한다. 원래 편성은 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트라베르소, 2바이올린, 비올라, 그리고 콘티뉴오.

글, 그림, 악보 및 설명

가사번역

1. 레시타티브

나레이터:조용하게, 떠들지말고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여기 헤르 슐렌드리안이 딸인 리첸과 같이 있군요. 그는 곰처럼 으르렁대고 있어요. 딸이 아버지에게 한 일을 좀 들어 보세요!

2. 아리아
슐렌드리안: 자식들은 끝없는 시련과 고난을 일으킨답니다! 제가 매일같이 내 딸 리첸에게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군요

3. 레시타티브
슐렌드리안: 이 말도 안듣는 나쁜 녀석아. 아, 언제야 내 말을 들을거니? 커피를 끊어!
리첸: 아버지, 잔인한 말씀은 하지도 마셔요! 만약 제가 하루에 세번 커피를 못 마시게 된다면, 저는 고통속에서 구워진 염소고기처럼 시들어 갈 것이랍니다.

4. 아리아
리첸: 음! 이 커피는 너무나 달콤하구나. 천번의 키스보다 더 달콤하고 백포도주보다도 더 부드럽구나! 커피, 커피야 말로 내가 마셔야 할 것이고, 만약 누가 나에게 한 번 쏘고 싶으시다면, 아, 커피나 좀 따라 주세요!

5. 레시타티브
슐렌드리안: 만약 네가 커피를 끊지 않겠다면 나는 널 시집보내지 않을 것이고, 집에서 내 보내지도 않을 거야. 오! 언제야 내 말을 들을 거니? 커피를 끊어!
리첸: 오 좋아요! 커피만 주신다면요!
슐렌드리안: 이 말괄량이야. 유행하는 고래수염 치마도 못입게 하겠다.
리첸: 저는 그런 것은 참을 수 있어요.
슐렌드리안: 창가에 서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못하게 할거야.
리첸: 그것도 괜찮아요. 하지만 제발 커피만은 마시게 해주세요.
슐렌드리안: 게다가 너는 모자의 금장식 은장식도 다 압수당하게 될 것야.
리첸: 좋아요, 좋아요! 제 기쁨만은 빼앗아 가지 마세요.
슐렌드리안: 이 말도 안 듣는 리첸, 결국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구나!

6. 아리아
슐렌드리안: 고집센 딸들은 쉽게 말을 듣지 않지. 그러나 걔들의 약점을 알면, 아! 그러면 말을 듣게 할 수 있지.

7. 레시타티브
슐렌드리안: 자 이제 아버지가 하는 말을 주의깊게 들어라!
리첸: 커피만 말고는 뭐든지 다요.
슐렌드리안: 그래 그럼, 넌 절대로 남편을 가지지 못할 것이야.
리첸: 오 아버지, 남편이라니!
슐렌드리안: 맹세컨데, 절대 남편은 없을 거야.
리첸: 제가 커피를 끊을 때까지는요? 지금부터 커피는 만지지도 않을께요! 아버지, 들어 보세요, 저는 아무 것도 마시지 않을 거에요.
슐렌드리안: 그럼 넌 신랑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야!

8. 아리아
리첸: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 당장 신랑을 보게 해주세요! 오, 남편이라니! 정말, 이건 멋진 일이야! 만약 오늘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곧 그렇게 된다면, 커피 대신에 난 훌륭한 신랑을 얻을 수 있다면!

9. 레시타티브
나레이터: 슐렌드리안은 딸 리첸을 위해 신랑을 즉시 찾을 수 있는 지 알아 보러 나가는 군요. 그러나 리첸은 그녀가 원할 때는 언제나 커피를 마시게 하도록 하는 약속을 몰래 결혼 계약서에 쓰게 하지 않고서는 어떤 남자도 구혼에 성공하지 못하게 할 것이랍니다.

10. 트리오
고양이는 쥐 잡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고, 처녀들은 커피를 마시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엄마도 커피를 마신답니다. 할머니도 그랬구요. 누가 그 딸을 혼낼 수 있겠어요?


위에 삽입된 곡은 Hogwood와 AAM, 그리고 Kirkby, Covey-Crump, Thomas의 연주. 아래는 앨범 커버.


오케 연습일지 2008.1.17 (목)

봄 연주회까지 계속 이 곡.
Schumann, Symphony No.1 in B major Op.38 "Spring"


1월 들어 세 번째 연습이다. 매번 연습이 끝나고 나면 집에서 연습을 하고 와야 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목요일이 될 때까지 연습은 거의 하지 못한다. 레슨 받고 있는 곡들 한두번 씩 연습하고 나면 대충 한시간... 하루 한시간 연습하면 다행인 상황이라...;; 슈만은 이번에도 펼쳐 보지도 못하고 가게 되었다.

지난 번에 대충 넘어 갔던 1악장 뒷부분 Animato부터 집중 연습을 했다. 1악장에서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이다. 정말 봄 느낌이 물씬나는.. 그 부분은 세컨이 특별히 어렵지는 않아서 다행이긴 했지만.... 박치인 나는 박자를 자꾸 놓쳐서 혼자 계속 엇박을 짚어 넣고, 흐름을 놓치고 난리가 났다. 왜 전엔 내가 이렇게 박자감각이 없다는 것을 몰랐을까....;;

휴식 후에는 2악장을 연습. 쉬운 듯 쉽지 않다가 뒷부분으로 가면서 역시....ㅡㅜ 2악장에서도 역시 박자 때문에 힘들었다. 흑....

사실 처음에 연습을 시작할 때는 이 곡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데... 이번 연습을 하고 나니 곡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슈만의 다른 곡들 - 리트나 피아노곡들-은 괜찮았지만, 관현악곡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끌리지도 않았는데... 연습을 하다보니, 구성과 선율의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레이션도 괜찮은 것 같고... 조금씩 마음에 든다. 누구 말마따나 "변태" 슈선생인 줄 알았는데 역시 천재슈만인가 보다...

이번 주엔 연습 좀 하고 갈 수 있을지...

2008년 1월 16일 수요일

[책] 신인본주의의 기치를 높이 올리다 - 황금나침반 (His Dark Materials)

!스포일러 경고!

이 글에는 책 또는 영화의 줄거리 또는 일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짜로 영화예매권이 생겼었다. 겨우 1장이어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추가로 3장을 더 사서 아이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그래서 낙점된 영화가 황금나침반. 조카까지 아이들 3명을 데리고 갔는데, 도윤이는 무섭다고 울고.... 3-4학년인 아이들은 아주 재미있게 봤다. 영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이 갔던 나는 영화가 결말이 모호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끝나버리자 좀 황당해 졌다.

집에 와서 좀 찾아 보고 나서야 이 영화의 원작이 필립풀먼의 3부작 소설이고, 영화화된 것은 1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콜터부인이 정말 라이라 (영화에서의 발음)의 엄마인지 아닌지가 너무나 궁금했기 때문에 책을 주문해 버렸다.

주문하고 3권을 모두 읽는 동안, 책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찾아 봤다. 나니아 연대기의 기독교적인 세계관과는 거의 정반대적인 입장에서 쓰여졌다고 소개가 되어 있었다. 영화를 먼저 본 나로서는 어떤 면이 반기독교적이라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카톨릭 쪽 어디선가는 영화가 개봉되면 반기독교적인 책의 판매와 영향력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영화 개봉도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책 내용의 무엇이 문제였을까?

영국판 표지 (1995-2000)
Image:Hisdarkm.jpg

미국판 표지
Image:HisDarkMaterialsUS.jpg

한국판 표지 (2007)
(원래 1998년 또는 1999년에 출간되었으나 절판되고, 2007년 영화 개봉에 맞추어 재발간되었다. 원래 책의 표지는 저런 영화의 장면이 아니었을 텐데, 찾기가 쉽지 않다.)



일단, 1권을 다 읽고 보니 영화는 책과 너무나 달랐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아예 영화화되지도 않았으며, 이오렉 버니슨과 이오푸르 락니손의 싸움 장면과 볼반가르에서의 도주 장면은 순서가 바뀌어 있었다. 콜터 부인이 말하던 마지스테리움은 교회를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영화 보는 내내 알 수가 없었고, 고블러로 불리우는 성체위원회도 종교단체라는 것을 영화에서는 알 지 못했었다. 슬슬 왜 이 영화가 반기독교적인 영화인지 알 법했다.

2권에서는 우리와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윌이라는 남자아이가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동화나 판타지 소설에서 나올법한 캐릭터다. 아버지가 실종되어진 아이이고 친구들에게 왕따도 당하는, 그러나 용감하고 책임감있는 소년. 또 다른 주인공인 리라가 일반적인 기준의 주인공의 성격에서 약간씩 어긋나 있는 점과는 좀 대조적인다. 리라는 용기있다기 보다는 지나치게 겁이 없어 보였고... 거짓말을 너무나 잘하며.... 좋은 편인지 나쁜 편인지 판단하기 힘든, 이상한 부모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2권에서 약간 힘이 빠졌던 이야기는 2권 말미에 윌이 아버지인 존 패리를 만나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3권은 확실히 이 시리즈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리고 책이 종결에 다가가면서, 이 책은 단지 은유적으로만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또 기독교의 어떤 부작용을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확해 졌다. 작가는 근본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책의 말미에서, '신'이라고 불리우는 천사는 너무 오래 살아 외부공기에 접촉하여 녹아 버렸거나, 색을 탐하다가 어두운 구멍에 빠져 죽어 버리고 만다. 작가는 오랫동안 서양 사람들의 뇌를 지배해 온 기독교 중심적인 세계는 독재자들의 세계였고 광기에 빠져 있는 迷妄의 세계였다고 말한다. 

또, 이 책의 중심소재인 "더스트", "스라프", "섀도우" 또는 his dark materials은 이성을 가진 동물의 주위에서만 흐르고 있으며, 인간 또는 이성을 지닌 동물의 이성적인 활동을 통하여 더 증가하기도 한다는 점, 물리학 또는 실험신학의 힘을 줄곧 보여주고 있다는 점, 그리고 윌과 리라의 사랑의 힘으로 뮬레파 부족의 세계에서 더스트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는 점 및 콜터부인이 자식에 대한 애정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점... 이런 점들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이성의 힘을, 사람의 사랑의 힘을 믿고 있는 신인본주의자인 것이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낡은 세계와 싸우는 주인공들을 보고 있노라니....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에서 프리메이슨적인 신념으로 이성의 힘과 밝은 세계를 찬양하는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중세의 어둠과 교회의 압제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자신감과 스스로의 힘에 감탄하고 있던 근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저것 아니던가?

필립풀먼은 이 책에서 내내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가장 눈에 띄는 점, 그리고 영화의 큰 매력이 되기도 했던 것은 데몬의 존재. (심지어 영화의 공식 웹사이트에서는 접속하여 몇가지 설문에 응하면 자신의 데몬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며 팬서비스를 하고 있다.) 영화에도 나오는 갑옷을 입은 곰, 마녀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세계의 다양한 버전들. 천사, 뮬레파부족, 스펙터, 저승의 묘사, 갈레스피부족인들....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상상하여 만들어 내었는지 놀라울 정도이다. 독자에게 흥미를 유발시키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모습은 이 소설의 큰 장점이다.

영화를 보고 1권만 읽고 났을 때는 아마도 이 영화는 해리포터처럼 2부, 3부로 이어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주제가 너무나 불경(?)스럽고, 더스트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좀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3권까지 다 읽고 나니 영화로 만들면 상당히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CG로 온통 뒤덮혀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1부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기대를 해볼만 한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지윤이가 엄마 읽는 것을 보고 자기도 읽겠다고 나서는데... 말려야 하나 놔둬야 하나... 잔인한 장면이 많은뎅....;

2008년 1월 11일 금요일

대설주의보...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어째 날씨가 어두침침하다. 창 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그것도 엄청나게.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 것이 참 오랫만이다. 아무리 교통이 불편해져도 겨울엔 역시 눈이 와야 겨울 같다. 

어릴 적엔 서울에도 눈이 많이 왔었다. 국민학교 때 수업시간에 눈이 내리면 쉬는시간에 모두 몰려 나가 누가 먼저 운동장에 발을 찍나 해보며 놀았던 기억이 난다. 등하교길 공터에 내린 눈에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으면 아무리 바빠도 꼭 발자국을 내고 지나가곤 했었다. 겨우내 눈이 자주 왔었고 새학기가 시작될 무렵까지 동네 여기저기에 눈이 쌓여 있곤 했었다. 어떤 때는 30-40센티미터나 눈이 쌓이기도 했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눈과 얽힌 기억이 별로 없다. 그 6년간 서울지방에 눈이 그다지 많이 안왔었나....? 아니면 내가 더이상 겨울에 동네를 돌아다니며 놀지 않았었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 큰 홍수가 나서 대치동 은마사거리가 물에 잠겼던 기억은 있지만... 큰 눈에 대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대학교 1학년에서 2학년으로 넘어가던 해, 큰 눈이 왔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눈썰매를 타고 놀 수 있을 정도 였다. 비료푸대를 얻어다가 타야 잘 미끄러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내가 뭘로 썰매를 탔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엄청 재미는 있었다. 학교가 산이라 눈이 시내보다 더 많이 오곤 했었다. 오늘 온 눈 정도만 해도 버들골에서 또 눈썰매를 탈 수 있을지도... (요즘 대학생들이 그런 식으로 놀 것 같진 않지만)

눈 보다는, 눈이 온 후에 날씨가 추워지기라도 하면 학교의 길들이 꽁꽁 얼어 붙는 것이 정말 고역이었다. 우리과가 사회대 쪽과 붙었있었을 때에는 얼음으로 뒤덮힌 길이 군데군데에 있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오고 가야 했다. 최악의 길은 법대에서 내려가는 후생관 옆길. 요즘도 그럴지 좀 궁금하다. 그 길을 가기 싫어서 비싼 좌석버스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가기도 했었다.

그리고는 계속 눈이나 겨울의 추위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스키장이나 가야 눈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자연설이 쌓여 있는 장면들을 다시, 엄청 자주 보게 된 것은 미국에서 였다. 필라델피아는 사실 다른 북쪽 도시들에 비하면 눈이 많이 오는 편은 아니다. 보스턴이니 미시간이니 시카고니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필라델피아에 있는 것이 가끔 감사할 정도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서울보다는 눈이 너무나 너무나 많이 내렸다. 발이 푹푹 빠지도록 눈이 오는 것은 다반사. 한 번 내리면 너무 많이 와서 학교가 문을 닫기도 하고. 눈이 워낙 일상사이다 보니 눈에 대한 대처능력도 꽤 신속해서, 밤에 눈이 좀 온다 싶으면 밤새도록 제설차가 동네를 헤짚고 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큰 길은 아침에 나가보면 보통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곤 했다. 하지만 covered parking lot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유학생은 눈 온 날 아침엔 차 위에 쌓여 있는 눈을 치워야만 했다. 나중엔 수퍼에서 중간 크기의 막대가 있는 빗자루를 하나 사서 눈이 오면 그걸로 눈을 치웠다.

가족들이 다 있으면 좀 덜 서러웠을 텐데... 혼자서 한숨을 푹푹 쉬면서 내리는 눈을 보다가 빗자루를 들고 나가 힘겹게 눈을 치우는 것이 어찌 서럽던지... 서러운데다가 엄청 힘들고...ㅜㅜ 어느 날인가 눈이 정말 많이 왔을 때, 혼자 치우고 또 치우다가... 정말 힘들어서 아르바이트로 눈을 치우는 흑인 꼬마애들에게 부탁을 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로 사는 가난한 아파트에 있는 자동차들은 온갖 눈치우는 도구들을 들고 팔팔하게 돌아 다니는 걔네들에게는 좋은 수입원이 되어 주고 있었다.

겨우내 그렇게 눈이 오고... 이 제 봄이 되는구나 싶어서 겨울의 기억을 잊어 버릴 때 쯤, 한 번 더 눈이 내리곤 했다. 4월에 눈이 오다니... 물론 4월에 내리는 눈은 금방 녹곤 했었다.

창 밖에 내리는 눈을 보고 있으려니 옛날 생각들이 났다. 오늘 밤까지 눈이 올 것 같다는데... 기상청일 믿기도 어렵고... 눈이 내릴 때 나가서 놀아야 재미있는데, 우리 아이들은 오늘 밖에서 놀았나 모르겠다. 지윤이는 미국에서 눈이 오면 그렇게 좋아 했었는데 말이다. 내일은 아이들과 좀 놀 수 있으려나....

2008년 1월 10일 목요일

[공연]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 성시연, 티엠포 2008.1.9 (수)

갑작스레 이번 주 일정에 여유가 생겨서 볼 만한 공연을 찾아 보았다. 이번 주는 공연이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았는데 서울 시향의 정기연주회가 있었다. 협연자는 세르히오 티엠포! 성시연이라는 젊은 여성이 지휘를 맡는다고 한다. 일전에 시향에서 날라온 콘서트 미리공부하기 일정이 생각나 찾아 보니, 월요일이다. 그래서 월요일엔 진희숙씨가 진행하는 콘서트 미리공부하기에 참여하고, 수요일엔 바로 그 콘서트에 가기로 결정했다.

Kurtag, Stele Op.33
쿠르탁, 스텔레(석판)
Schumann, Piano Concerto in a, Op. 54
슈만, 피아노 협주곡 a단조, 작품 54
Shostakovich, Symphony No. 5 in d, Op. 47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d단조, 작품 47

월요일의 미리공부하기. 생소한 음악인 죄르지 쿠르탁의 석판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공연에서 음악을 감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아르헤리치의 연주로 들었고, 쇼스타코비치에 관한 짧은 다큐를 보았다.

수요일. 김밥 한 줄을 잽싸게 먹고 공연장으로 들어 갔다. 1층 뒷쪽에 자리를 잡았다. 2층을 예매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나 보다. 지윤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쌍안경을 빌려 왔는데 생각보다 별로 유용할 것 같진 않다. 무대는 잘 보이는데 소리가 걱정이었다. 세종문화회관은 회사에서 가깝다는 점 이외에는 장점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이다.

자그마하고 젊은 아가씨가 머리를 하나로 묶고 턱시도 비슷한 옷을 입고는 무대에 등장했다. 지휘자는 여자라도 남자처럼 입어야 하는 것인가? 하긴,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포디엄에 올라가는 것도 좀 이상할 것 같긴 하다. 어쨌거나 여성 지휘자는 처음이라서 호기심이 생겼다.

첫 곡인 쿠르탁의 석판.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며 1994년에 작곡한 곡이라고 하는데, 그런 대로 들을 만했다. (연주의 quality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음악을 잘 모르는 내가 듣기에 큰 불편은 없었다는 뜻) 좋은 연주였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콘서트 미리공부하기에서 들었던 3악장의 장송행진곡 에서 느꼈던 무게감이 잘 느껴지지는 않았다. 세종문화회관이라서 그런 건지, 목욕탕에서 음악을 듣는 것 처럼 물먹은 소리로 들려왔다. 얼마 전의 건강검진 결과에 따르면 내 귀는 정상이라고 하니 귀가 이상한 것은 아니고.. 자리가 무대에서 너무 먼 탓인가?

두번째 곡에는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동시에 등장. 슈만의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이 시작되었다. 쌍안경으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는 모습을 보느라 중요한 시작 부분에서 살짝 집중을 못했다. 티엠포는 아르헤리치의 애제자라고 하던데... 그 둘의 연주가 내 귀에는 꽤 다르게 들렸다. 공연장의 물먹은 음향상태에도 불구하고 티엠포의 피아노는 노래하고 폭발하고 우울하다가 또 노래하면서 슈만을 정말 멋지게 연주했다. 앵콜로는 피아졸라의 '천사의 죽음'. 계속 박수가 이어지자 피아노 앞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하며 어떤 곡을 연주할까 하는 표정을 짓다가 연주를 시작했었다.

마지막 곡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성시연씨의 손동작과 제스쳐가 오케스트라를 휘어 잡으는 듯 하면서 연주가 진행되었다. 현의 연주가 좋았고 타악기도 괜찮았었던 듯 하다. 문제는 아마도 금관... 물먹은 듯한 음향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서너번의 삑사리가 들려왔다. 4악장에서는 보다 확실하게 곡의 흐름을 주도해야 할 금관이 뭔가 불안불안하게 들려 생각보다 시원치 않은 결말을 가져온 듯 했다. 그래도 그런대로...

곡이 끝나자 관객들이 환호를 하기 시작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티엠포에게 보다 두세 배는 더 많은 환호가 쏟아졌다. 그렇게 연주가 훌륭했었나... 살짝 다시 생각해 보기까지 할 정도..;; 결국 앵콜곡이 나왔는데 2악장 왈츠의 일부분. 긴장이 풀렸는지 너무 지쳤는지 앵콜은 본 연주보다 별로였다. 그냥 앵콜 안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좀 들었다.

음향 상태 때문인지, 오케스트라 때문인지, 지휘자 때문인지... 전에 두어번 실황으로 들었던 다른 5번의 연주보다는 터져나오는 폭발력이 약했고, 물론 우울하고 느려야 하긴 하지만 3악장은 살짝 지루한 느낌도 있었긴 했다. 그래도 젊은 지휘자의 활기에 찬 모습, 오케스트라를 힘있게 이끌어 가는 여성 지휘자의 모습은 보기가 좋았다. 좋은 지휘자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할 능력은 없지만... 앞으로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램도 생겼다.

저녁시간이 늘 자유롭지가 못하기 때문에, 놓치고 나면 정말 땅을 치고 후회 할 것 같은 연주회만 가거나 (그런 연주회가 요즘 너무 많아져서 고민이다) 주말공연을 선호한다. 사실 이번 주에 시간이 없었으면, 관심은 있지만 이번 공연은 가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공연장이 세종인데다가... 프로그램도 딱히 끌리지는 않았었고... 지휘자도 잘 모르는 사람이고. 티엠포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공연의 거의 유일한 매력이었었으니... 하지만 별 기대없이 갔어도 보면서 나름 즐거운 기분이 되었었다. (아마 기대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편안하게 바이올리니스트들의 비브라토도 구경하고, 젊은 지휘자의 한국 데뷔무대도 보고, 처음 듣는 현대음악도 감상해 보고, 쌍안경 성능도 테스트 하면서 말이다.

2008년 1월 9일 수요일

[공연] 정명화·김선욱 신년음악회 2008.1.6 (일)


(사진 출처: 호암아트홀 공연안내)

프로그램:
드뷔시_첼로 소나타
브람스_첼로 소나타 2번 F장조
라흐마니노프_첼로 소나타 G단조



공연 소식을 듣고 예매가 쉽지 않겠구나 싶어서, 티켓 오픈되고 바로 예매했었는데, 역시나... 먼저 일정이 잡혔던 6일 공연이 매진되고, 4일 공연이 추가되고, 그 마저도 매진되었던 것 같다. 김선욱 인기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여러가지 이유에서 이 공연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첫번째는 첼로, 그것도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정명화의 공연이므로 남편과 같이 갈 수 있을만 하겠다는 것. 나름대로 흥미를 가지고 공연을 볼 수 있을 듯 했다. 두번째는 이 공연이 '신년음악회'로 기획되어졌다는 점. 1월6일이면 새해기분이 남아 있을 것이고, 수많은 신년음악회들 중 하나는 봐줘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세번째는, 김선욱이 피아노를 맡았다는 점. 2006년 부천필의 송년음악회 이후 1년간 그의 연주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궁금했고, 무엇보다 그는 피아노를 아주 맛깔나게 치니까.

일요일 6시. 기흥에 있는 아이들 큰아버지댁에 아이들이 며칠 머무르게 되어 데려다 주고, 고속도로를 질주하여 1시간도 안 걸려 호암아트홀에 도착했다. 일요일 오후라 고속도로가 밀릴까봐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는 양호하여 지각을 면했다. 전날 고향친구와 술을 진하게 마셨던 남편은 이미 비몽사몽 헤매고 있는 듯 했다. 아무리 유명 연주자가 나오는 공연이라도 별 수 없겠다 싶었다.

연주자들이 모두 검은 색 복장으로 무대에 나와 앉고 약간의 조율을 하고 나서 드뷔시가 시작되었다. 꽤 짧은 첼로 소나타였다. 드뷔시가 첼로 소나타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피아니스트는 연신 첼리스트를 돌아 보며 연주했고 (악보는 펼쳐져 있고 페이지터너도 있었지만 거의 보지 않는 듯 했다), 그의 연주는 튀지 않고 첼로와 잘 어울렸다.

이어지는 브람스는 큰 특징이 없었던 듯 했는데, 첼리스트는 조율에 신경을 쓰고 있는 듯 했다. 우리 좌석은 호암아트홀 2층 맨앞이었는데, 2층은 사실 처음 가본 것이었다. 1층에서는 음향이 나쁘다는 생각을 거의 한 적이 없었는데, 그 날 나에겐 첼로의 소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리 때문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 의도적으로 그렇게 들리도록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정명화씨의 악기가 어떤 악기인지도 좀 궁금했다. 나중에 찾아 보니 1731년 스트라디바리 "Braga"를 30년간이나 사용해 왔다고 한다. 아마 연주회에 들고 나온 악기도 스트라드일 것 같다.

인터미션이 끝나고 시작된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의 역할 때문에 처음부터 좀 기대를 했었던 곡이다. 원래 정명화의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라고도 한다. 감미로운 라흐 특유의 멜로디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이젠 첼로 소리가 훨씬 아름답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 첼로 자체의 음색이 내가 좋아하는 음색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까는 역시 브람스가 낯설어서 그랬던 것일까...;; 김선욱의 피아노도 훌륭했고... 물론 베토벤이 아니라 라흐마니노프이기 때문이겠지만, 그의 피아노는 더 유연해 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옆에서는 아직도 술을 못 깬 남편이 아름다운 첼로와 피아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열심히 자고 있었고, 전반부보다 마음이 더 편안해진 나도 조금씩 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몽롱해져 있다가, 4악장에 들어서니 정신이 맑아졌다. 나이든 첼리스트와 너무나 젊은 피아니스트가 멋지게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라흐마니노프가 만들어 지고 있었다. 작년 미샤 마이스키와 세르지오 티엠포가 같은 곡을 연주했을 때는 첼로보다 피아노가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두 악기가 모두 멋지게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곡의 앵콜이 이어졌다. 슈베르트의 미뉴엣과 안톤 루빈스타인의 멜로디. 미뉴엣은 피아노도 첼로도 깔끔했다. 멜로디는 워낙 유명한 곡이어서 정명화씨가 곡명을 말하지 박수가 쏟아졌었는데, 박자가 조금 느리고 브람스에서 거슬렸던 악기 소리가 또 들리는 것 같아서 썩 좋지는 않았다. 역시 1층으로 예매를 했었어야 했나...;

시내에 나온 김에 삼청동에서 수제비를 먹고 집으로...

공연리뷰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1/07/2008010700072.html

2008년 1월 5일 토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6)

연극 Amadeus, 1993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Amadeus, 1984



그릇된 해석들

아마데우스는 지난 230년 동안 계속되어온 모차르트에 대한 환상을 이용하려고 했던 최근의 몇 가지 시도들 중 하나이다. 최근 많이 읽혀지는 두 권의 책들도 역시 모차르트의 일대기와 정신를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볼프강 힐데샤이머 (Wolfgang Hildesheimer)의 '모차르트'와 프란시스 카 (Francis Carr)의 '모차르트와 콘스탄테'가 그것이다. 힐데샤이머는 서신들을 자세히 독해하여 많은 통찰력있는 견해를 제공하고는 있으나, 모차르트의 사랑과 삶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감정적인 분리에 대한 추측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 그는 모차르트의 표현이 인위적이고 무감각하다고 보았고 주어진 상황에 대한 오늘날의 반응방식으로 모차르트를 왜곡되게 평가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오래된 픽션 중 몇몇을 사용하고 그 자신이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마데우스처럼, 그의 모차르트는 환상적인 캐릭터이고 작품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더불어 그릇된 해석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다른 음악애호가이며 전기작가인 프란시스 카도 역시 서류들을 검토하고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의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역사적 진실을 찾으려는 인상을 준다. 카는 독살설을 다시 제기하는데, 그는 살리에리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프란츠 호프데멜(Franz Hofdemel)의 아내이고 그의 피아노 학생 중 하나였던 막달레나와 가졌던 관계 (카에 의하여 꾸며내어진) 때문에 호프데멜을 의심한다. 호프데멜은 모차르트의 사망 며칠 후에그의 아내를 상해하고 본인은 자살했다. 호프데멜의 슬픈 운명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모차르트와의 또 다른 연관관계는 그가 프리메이슨 형제였고 작곡가에게 돈을 빌려줬었다는 것 밖엔 없다. 반면에, 모차르트의 죽음과 호프데멜의 자살이 같은 시간 대와 공간에 있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이다. 카의 책은 서류들에 기반을 둔 것처럼 보이는 타블로이드 (선정적인) 전기에 지나지 않는다.

힐데샤이머와 카의 책들 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의심할 수 없는 환상으로부터 성공을 이루어 냈다. 모차르트의 이름이 없었다면, 우리 자신의 문화가 만들어 낸 이런 인위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해석하기 위하여 편지, 회상, 그리고 다른 직접적인 자료들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런 자료들을 쉽게 구하여 질 수 있으나, 편지나 회상의 작성자들 그리고 소문을 퍼뜨렸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각각의 의도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단지 사실들"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신화가 번성하는 것은 바로 서류 자체들과 그것들에 대한 해석에서 부터인 것이다.

왜 모차르트는 이토록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가? 아마 그것은 그 음악 뒤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영원히 잘못된 시도들로부터 나오게 된 것일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종종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예를 들어, 교향곡 40번 g단조 K.550에 대한 비평은 찬사로 일관되어 있지만, 그 성격은 파악하기 어려운 채로 남아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그 곡이 엄격한 의미에서 고전파 양식이고 그리스식의 "가벼움과 우아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은 그 곡이"실내악의 숙명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젠스 피터 랄센(Jens Peter Larsen)은 그 곡은 사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믿었다. 로빈스 랜던(Robbins Landon)은 그 곡이 모차르트의 조울증적 경향의 악화를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한 반면에, 잭 웨스트럽(Jack Westrup)은 오페라 부파의 정신을 그 곡에서 발견했다. 아마도 어떠한 교향적 캐논 작품도 학식있는 비평가들로 부터 이렇게 다양한 정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음악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반응이야 말로 이 사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설명해 주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이 사람을 설명하는 전기들이 그의 음악에 대한 반응들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역사 기록을 올바로 세우려고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샤퍼와 포먼의 살리에리는 어떤 면에서 보면 이미 옳다: 모차르트라는 천재는 설명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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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eter Brown 은 인디애나대 음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는 "요세프 하이든의 건반음악: 원전과 스타일" 그리고 "하이든 '창조'의 연주"의 저자이다. 브라운판의 "창조"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the Academy of Ancient Music에 의하여 레코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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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5)

"젊고 순수한 모차르트"

연극과 영화 둘 다에서의 중심적인 문제는 모차르트의 행동인데, 그가 귀족저택의 응접실에서 콘스탄체와 시시덕거리는 것,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 과도하게 술을 마시고, 황제와 대주교에게 버릇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 살리에리를 흉내내며 놀리는 것, 잘난 척을 하고, 계속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것 등이다. 만일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황제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였다면 모차르트는 궁정에서 추방당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민중의"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 격식이 느슨해 졌기는 하지만, 요세프2세에게 그가 말했던 것 처럼 "바보같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랬다면) 결과적으로 빈 오페라의 어떤 작품도 의뢰되거나 작곡될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어떤 작품도 공연될 공간이 주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모차르트는 황제나 그의 측근들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대접해야만 했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주 장면은 아마데우스에서 부주제로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마지막 1-2년간 음주량이 늘긴 했었지만, 사실 그가 과도하게 음주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콘스탄체가 바덴에 있었던 1791년 여름에, "그는 쉬카네더 (Schikaneder)와 함께 아침 내내 샴페인을 마시곤 했고 밤새도록 펀치를 마셨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그를 직접적으로 알 지 못했던 이그나츠 페르디난드 칼 아놀드(Ignaz Ernst Ferdinand Karl Arnold)로부터 온 것이다. 술마시기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은 반면, 작곡가들의 경우에는 그런 상황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위대한 음악이 알콜의 영향 하에서 작곡되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토록 일관성있게 많은 작품들에서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데우스는 또한 모차르트의 혼외관계 문제도 제기한다. 그 장면은 후궁으로의 탈출의 초연 후에 나온다. 콘스탄체 베버는 모차르트의 약혼녀로 황제에게 소개된다. 그 때, 프리마돈나이며 사실 살리에리의 연인인 카발리에리 (Cavalierri)는 모차르트에게 한 방 날린다. 살리에리는 숨을 죽이며 "모차르트가 그녀를 가졌군."이라고 답한다. 콘스탄체를 제외한 모차르트의 관계에 대하여는 단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몇몇 전기작가들은 모차르트가 거의 모든 그의 건반악기 제자들, 프리마돈나들 그리고 그가 일련의 저급한 편지들을 보냈었던 사촌 "Bäsle"(역주: 사촌동생을 뜻하는 슈바벤 지방 애칭)과 사랑에 빠졌었다고 말한다. 모차르트가 연애에 빠져 있었는지, 모든 여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었는지 아닌지는 어느 한 가지 방향으로  증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했다면, 모차르트와 관계한 여인의 목록은 돈지오반니의 목록에 비견될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고 제한적인 견해를 보여 주는 두 장의 편지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첫번째는 보헤미아 작곡가인 요세프 미슬리베체크(Joseph Mysliwecek)의 매독에 관한 것인데, 그의 코에는 궤양이 생겨서 거의 없어질 것 같은 지경이었다. 모차르트는 직접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런 변형이 생긴 원인을 잘 알고 있었으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그런 끔찍한 모습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불쌍한 소녀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단어인 애인(maitresse)은 우리의 혀 위에서는 (wh--e in our tongue) 정말 지나치게 매력적이군요. 그러나 저는 브루네티(Brunetti)도 미슬리베체크(Mysliwechek)도 아닙니다. 저는 모차르트, 젊고 순수한 모차르트입니다."

1781년 12월에 그는 다시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저는 끝맺기 전에 제가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유들을 말씀 드려야만 합니다. 자연의 음성은 저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만큼, 그리고 아마 많은 크고 힘쎈 시골뜨기 친구들에게 보다도 더 크게 들립니다. 저는 단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요즈음 하는 것처럼은 살 수가 없을 뿐입니다. 첫째로, 저는 그러기엔 너무나 종교적이고, 둘째, 저의 이웃을 너무도 사랑하며 순진한 소녀를 유혹하기에는 너무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째로, 저는 병에 걸리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구역질 나며 끔찍하고 공포스럽고, 그런 창녀들과 놀아 나는 바보짓을 하기에는 건강을 너무나 염려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그런 척하는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도 확실히 있는데, 그는 파리여행 중이나 그 후에 그리고 1777-78년에도 가끔 그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슬리베체크와의 만남은 방탕한 생활의 위험성에 관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슴에 틀림이 없고, 특히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인정되지 못한, 이해되지 않은

몇몇 사후의 조사 (또는 검시결과)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마지막 몇 년간의 생활방식이 그가 사망을 앞당겼다고 생각되며 - 비록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 이러한 결론은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역시 인용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독살설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의학적으로 그리고 단순한 관찰로서 모차르트가 최후에 앓았던 병을 진단하려는 시도들에서는 독이 아니라 티푸스에서 류마티즘 열병에 이르는 다양한 원인들을 지목했다. 피터 데이비스 박사 (Dr. Peter J. Davies)가 했던, 가장 철저했던 조사에서는 모차르트가 11월 18일에 있었던 프리메이슨 지부 집회에서 연쇄상 구균에 감염 (streptococcal infection)되어 발생한 알레르기성 자반증(Schonlein-Henoch syndrome)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후의 진단이므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독살설이 없었다면 죽음의 원인에 대해 이토록 의견이 분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차르트 최후의 병명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무엇이 성년의 모차르트를 작곡하게 했는가에 관한 데이비스 박사의 결론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는 어떤 시기에는 너무나 많은 작곡을 했으며, 다른 시기에는 거의 하지 않았는가? 데이비스 박사는 모차르트가, 정신병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기분이 상승했다가 침체하곤 하는 정서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는 "예술가들은 창조적인 활동을 놀랍도록 폭발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모차르트는 극단적인 예이다."라고 지적한다. 1770년대 후반부터, 데이비스 박사는 다섯 번의 그 같은 폭발을 찾아 낸다: (1) 만하임, 1777-1778년; (2) 뮌헨, 1780-81년; (3) 빈, 1786년 전반; (4) 빈, 1788년 여름; (5) 빈, 1791년 1분기. 예를 들어, 데이비스가 말한 세번째 폭발에서,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극장지배인,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K.488과 491, 피아노 사중주 K.493, 혼협주곡 K.495, 그리고 몇 개의 작은 작품들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는 생산성의 시기들 (즉, 작품이 완성된 시기)만 보고 내부적인 준비작업의 시기들이 없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피가로 같은 작품의 초연 시의 흥분한 모차르트는, 데이비스에 따르면, 궤도를 좀 벗어나는 것 같았을 것이다. 데이비스는 또한 "존경받는 사랑의 객체로부터의 정기적인 사랑의 공급"을 필요로 하는 나르시즘적인 의존성도 찾아냈다. 이런 심리적인 요소와 프리랜서 음악가로서 일반적으로 직면했을 불안정함의 결합을 모차르트는 때때로 잘 극복해 내기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를 진가가 인정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이해되지도 못하며, 재정적으로 힘들어 동전 몇 푼만 남은 가난한 천재로 19세기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샤퍼와 포먼의 영화 버전에서, 그는 1781년 이후 내내 빈 중심의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실, 모차르트는 자주 거주지를 바꾸었고 그의 수입은,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음악가로는 특이하게 높았으며, 몇 년간은 전 빈 시민들 중 상위 10%에 속했었다. 또한, 모차르트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가난한 작곡가라는 개념은 그가 그의 프리메이슨 형제인 미카엘 펀치버그(Michael Puchberg)에게 1788년에 1791년에 돈을 빌리려는 목적으로 쓴 일련의 편지로 부터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1789년 7월12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친애하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며 가장 존경하는 B.O. 에게

위대한 신이시여! 저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적이라고 지금 저의 상황에 놓이게 하고 싶지 않군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며 형제인 당신이 저를 버린다면, 불행하고 결백한 저 자신과 불쌍한 병든 제 아내와 아이는 모두 갈 곳이 없게 됩니다. 지난번 당신을 만났을 때 저는 제 사정을 터놓고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만,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지요 - 사실 지금도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네요. 그래서 간신히 글로 쓰고 있을 뿐이고 쓰면서도 떨고 있습니다 - 그리고 당신이 저를, 제 상황을 아시고 있고, 저의 불행과 최악의 비참한 상황에 관하여 저의 결백함을 믿고 계시다는 것을 제가 확신하고 있지 않다면 감히 편지를 써서도 안되지요. 자비로운 신이시여! 저는 당신께 감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애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빚을 갚는 것 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다른 자료들은 없지만 이러한 편지들로부터, 모차르트가 빈에서 환영받지 못했었다고 결론 지어진 것이다.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 여러가지 요소들이 그의 재정적인 상황을 악화시켰다. 모차르트는 5군데에서 수입을 얻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공공 또는 사적인 연주, 정기공연, 교습, 수수료, 그리고 음악의 출판.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경제사정이나 관련된 요소들에 의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80년대 종반에 오스트리아는 터키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고 많은 모차르트의 후원자들은 군복무를 하거나 빈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었다. 심지어 황제도 1788년에 전쟁터로 나갔다. 콘스탄체는 병들어 바덴으로 요양을 떠나야만 했다. 한 때는 그녀의 발목 궤양이 매우 심해졌었다. 온천욕을 통한 치료는 부유층들만이 사용했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슴에 틀림없다. 1780년대 후반 동안 모차르트는 여러가지 활동으로 수입을 벌기보다는 작곡활동을 함으로써 수입을 일정하게 가져 가려고 노력을 했었다. 일반적인 경제상황 뿐 아니라 그들 가족의 특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 가족은 예전 습관대로 생활을 유지하였고 그것이 현금상태에 문제를 야기시켰다. 상황은 그들이 1780년대 초반의 6-7년간 높은 수입을 벌어들였을 때 저축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리고 1791년에 모차르트가 칼 리흐노프스키 왕자 (Prince Karl Lichnowsky)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하여 상당한 돈을 내야 했기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수입은 하이든이 1790년대에 벌어들인 상당한 수입을 능가하거나 비슷했을 것이다.

모차르트 학자인 크레머 (Uwe Kramer)는 1780년대 초 높은 수입과 비용의 불균형이 있었을 텐데 모차르트의 현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크레머는 많은 현금이 당구나 카드게임을 하여 도박자금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이론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에서 부터 이런 이론이 어느정도 가능성은 있다는 수용적인 의견까지 혼합된 반응이 있었다. 증명이 될 수 있건 없건, 모차르트의 생활 습관에 대한 몇몇 증언은 도박을 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피터 데이비스(Peter J. Davies)는 모차르트의 성격적인 특징이 그의 환경적인 요인과 결합되어 그가 그런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을 만들어 내었을 수도 있다고 빋는다.

아마데우스에서는 모차르트의 마지막 나날들과 매장 장면을 상상과 믿을 만하지 못한 전통을 결합하여 보여준다. 상상력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샤퍼와 포먼의 영화 버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살리에리가 1791년 10월 13일 마술피리 공연에 참석했던 것이 12월 5일 모차르트의 죽음과 시간적으로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샤퍼의 버전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짧은 마지막 투병기간에 레퀴엠을 작곡하는 것을 돕는다. 사실, 모차르트의 미망인은 적어도 세명의 작곡가들에게 모차르트 최후의 작품을 돕도록 부탁했었고 마침내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조수로 일하게 되었으며, 모차르트는 단지 몇 시간이 아니라 3주 동안이나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정성껏 돌본 것은 콘스탄체와 그녀의 가족들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나 누이는 이 점을 전혀 인정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과 매장은 고트프리트 반 스비에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에 의하여 준비되었고 그는 요세프식의 매장 지침을 따랐으며 망자의 재정적인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데우스는 매장에 대하여는 꽤 정확한 그림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사망자를 자루에 넣어 공동묘지에 던져넣는 것은 극단적으로 모욕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1791년에는 빈 인구의 약 85%가 이런 방식으로 매장되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던 매장방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규범이었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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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4)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저를 사랑합니다"

만약 레오폴드가 볼프강의 세계에서 "하느님 다음"이었다면,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같은 별자리의 어디 쯤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아마데우스에서 잘 보여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자신의 독립성을 보여주고 강화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었다. 이런 점에서, 강박적 외설어증, 분변기호증, 그리고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비엔나 저택에서 음악수업과 리셉션 직전 장면에 성적인 등장 부분을 넣는 등,  그녀를 볼프강의 유치한 말장난을 같이하는 "머리가 빈" 사람으로 묘사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샤퍼와 포먼의 목적에 맞게 시간의 흐름이 바뀌어져 있다. 그는 대주교를 알현하는 것을 끝낼 때까지는 콘스탄체와 같이 까불고 놀고 있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살리에리가 지켜보고 있는 중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영화와는 다른 순서로 일이 벌어졌음을 설명한다: "제가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는데, 그건 제가 대주교 밑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제가 그녀의 집에서 머물렀을 때 받은 부드러운 배려와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콘스탄체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녀의 성격에 대한 부정적인 면들은 아마도 레오폴드와 모차르트의 누이인 난넬로부터 나온 것일 것이다. 미망인으로서의 콘스탄체의 모습을 보면, 그녀는 상당한 정도로 음악적인, 그리고 사업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슴에 틀림없다. 그녀는 죽은 남편과 그녀 자신의 명성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페미니스트 시대 이전의 문헌에서는 그녀가 남편의 천재성 덕에 부를 누리지도 못했고 그 천재를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쓰여져 있으나 이것은 분명히 공정한 평가는 아니다. 볼프강이 누구와 결혼을 했었어도 이런 비난은 퍼부어졌을 것이다. 아서 슈리그 (Arthur Schurig)는 그녀에 관한 유일한 책에서 그녀가 "인색하고, 속이 좁으며, 허영심이 많고, 탐욕스러우며, 미신적이고 수다럽다"고 말했다. 모차르트 가족의 서신들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모든 형용사들이 그녀의 시댁식구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편견이 들어 있을 지라도, 콘스탄체를 가장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은 바로 볼프강 그 자신의 설명이다. 그는 결혼 전에 그녀에 대하여 레오폴드를 설득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자꾸 말씀을 드려서 귀찮으시겠지만 제가 말씀을 마치기 전에, 아버지께서 콘스탄체의 성격을 더 잘 아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못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라고는 작고 검은 두 눈과 귀여운 모습 뿐이지요. 그녀는 위트가 있지도 않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상식이 있어요. 그녀가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반대로, 그녀의 어머니가 적으나마나 있는 것들을 다른 두 자식들에게 해주었고 콘스탄체에게는 해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소박하게 옷을 입는데에 익숙해져 있어요. 사실 그녀는 깨끗하고 말쑥하게 옷을 입고 싶어하지만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아요. 보통 여자들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그녀는 스스로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머리도 매일 스스로 하지요. 더구나 그녀는 집안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요.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온 마음을 다해 저를 사랑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보다 더 나은 아내를 가질 수가 있겠어요?"

또한 샤퍼와 포먼은 콘스탄체가 장기 요양을 위하여 바덴에 머무르는 동안 모차르트에게 충실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다른 곳에서도 그녀가 그 당시에 역시 바덴에 있었던, 모차르트의 제자이며 카피스트라고 알려진 프란츠 자버 쥐스마이어와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나와 있다. 이 주장의 근거로 몇몇 작가들은 모차르트 사후에 그녀의 건강이 돌아와 이후 쭉 나빠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후 다시는 임신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1791년 7월 26일에 태어난, 그들의 아들, 프란츠 자버 볼프강은 쥐스마이어의 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었다. 이 가설은 프란츠 자버 볼프강이 그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가장 독특한 유전적인 특징 - 기형적인 왼쪽 귀 -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결국, 콘스탄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는 별로 없다. 비난은 주로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나 남성적인 편견을 가진 음악학자 그룹으로부터 온다. 당연하게도, 콘스탄체가 가족 간의 편지를 조작했다는 점은 학자들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동기에 대한 의심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은 어떤 사람의 일대기에 대하여 더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이전 시대에 맞는 견해라기 보다는 오히려 20세기적인 관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마 모차르트의 일생에서 콘스탄체는 그의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 월버거 페틀과 가장 잘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능력이나 성향의 양면에서, 그녀는 가장 확실한 비교대상이 될 것이다. 두 여인들은 상황에 맞게 행동했으나 눈에 띄지 않았었다.

평범한 기질, 시시한 농담들

아마데우스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묘사는 바로 볼프강 자신이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형상화했을까?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을 연구하는데에 있어서 문제점은 개인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인데, 이에 반해 모차르트와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일기, 광범위한 편지, 쪽지, 언론에서의 리뷰, 회상, 음악 목록와 압보의 서명 등을 포함하여 자료가 과다할 정도이다. 그러나, 알란 타이슨(Alan Tyson)은 그의 통찰력있는 글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우리가 모차르트에 대하여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가 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많은 자료들이 음악천재의 마음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의 전기가 그의 음악을 설명할 수 있는가? 또 음악가의 인간됨과 그의 예술성 사이에는 관계가 없는가?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샤퍼는 철저히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샤퍼의 볼프강은, 살리에리의 말을 빌면, "낄낄 웃어 대는 음탕한 놈"이다. 그리고 샤퍼의 살리에리가 "기적같은" 천재과 "숭고한" 음악에 관하여 번민할 때, 음악가와 그의 음악 간의 괴리는 깊어 진다. 그러므로, 아마데우스에서 암시되어진 중심적인 질문은, 모차르트의 성격과 그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역시 18세기가 아닌 19세기에나 나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시대에는 작곡가로서의 조건은 천재가 되어야 하는 것도, 독창적인 예술적 견해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재능의 문제이며 (음악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음악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당시에는) 표현의 종류에 따라 디자인되어지고 사용되어 지는, 음악적 아이디어가 들어있는 사전이 존재했다. 작곡가는 이들 중에서 골라서 청중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생산했다. 모차르트는 새로운 깊이있는 표현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런 음악적 어휘들을 기술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가 이렇게 활동했었던 것은 18세기 종반에 주로 유행하던 형식의 범위 내에서였다. 그러므로, 그 사람과 그의 음악이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비더마이어(Biedermeier)식의 여류작가인 캐롤린 피츨러 (Karoline Pichler)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내가 잘 아는데, 개인적인 교류에서 범상치 않은 지적능력을 보여 준 적이 전혀 없고 지적인 문화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어떤 학식이나 고급스러운 흥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기질적으로 좀 평범하고, 시시한 농담들을 하고, 모차르트의 경우엔, 생활에 책임감도 없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깊이가, 환상의 세계가, 화음이, 멜로디가 그리고 감정이 이 가망없는 외양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는 악보에 고친 흔적이 없는 모차르트의 자필악보를 보자, "기적이야"라고 말했다. 이런 묘사도 역시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모차르트는 비범한 속도로 곡을 써나가는 재능이 있었지만, 잘못 시작된 부분과 1-2년에 걸쳐서 작곡이 진행 중이었던 곡들이 꽤 많이 있었다. 몇몇의 작곡 스케치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런 스케치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들 보다 원래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이든에게 헌정되어진 6개의 사중주에 관하여, 모차르트는 출판된 악보에 부친 편지에서, "사실 이 곡들은 길고 고생스러웠던 작업의 결과이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샤퍼의 볼프강이 시카네더 (Schikaneder)에게 마술피리가 그의 "국수 (역주: 머리)"에 들어 있고 단지 적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절반도 진실이 아니다. 확실히, 곡의 개념과 작곡의 상당부분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표들을 종이에 적는 행동은 분명히 변화를 야기한다. 오페라의 경우에는, 리허설이 시작되고 나면, 드라마와 배역들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수정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샤퍼가 아마데우스에서 보여준 18세가 오페라에 대한 생각은 몇몇의 경우에서는 정확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역사적 사실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페라를 만드는 것은 주제의 선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인이 고용되어 가사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작곡가가 선임되어 이미 선정된 가수들에 맞게 아리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오페라를 궁정에서 연주하는 것은 정확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마데우스에서 궁정 오페라의 감독인 프란츠 자버 오르시니-로젠버그 (Franz Xaver Orsini-Rosenberg)는, 모차르트가 주제넘게도 이미 무대에 올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대본 - 이 경우에는 피가로 - 을 선택한 것을 놀라워 하는데 이는 정상적인 관례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아마데우스는 또한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이 터키식이고 하렘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특별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배경은 특이한 것이 아니었고, 사실 모차르트는 이전에도 자이데(Zaide)로 알려진 작품에서 비슷한 장소를 선정하여 작업한 적이 있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을 때, 그는 오페라 부파라는 장르를 오페라 세리아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마치 오페라 부파가 요세프 2세와 빈 사람들에게 전혀 친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었다. 이것도 역시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오페라 부파는 비인의 극장들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상연되었었다. 그가 "헤라클레스" (오페라 세리아에서 등장인물의 전형)의 엄격함을 "이발사" (즉, 피가로)의 코믹한 가벼움에 비교할 때, 그는 "이발사"가 훨씬 더 호소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파이지엘로(Paisiello)의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성공한 이후로 이미 빈의 청중들에게 인지되어 있는 사실이었는데, 피가로의 결혼은 그 속편이었다. 오페라 세리아는 1780년대에 죽은 장르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하자면, 그것은 "대리석 똥"이었다.

오페라 세리아에 관한 그러한 생각은, 새로운 장르인 오페라 부파의 첫번째 독일인 대가로서 모차르트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려는 독일의 음악학자들에 쓸데없는 시도에 의하여 생겨났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 역시 오페라 세리아 였다. 티토왕의 자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작곡가들인 마이어,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그리고 베르디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장르의 후대 작곡가들의 대중적인 인기가 증명하듯이 오페라 세리아는 19세기까지 계속 살아 숨쉬고 있었다.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는 황제에게 피가로의 위대한 피날레에 대하여, 길이와, 레시타티브가 없는 점, 이중창에서 전체 배역으로 확장되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새로운 아이디어인 것처럼 설명한다. 사실, 이것은 작사가인 로렌조 다 폰테 (Lorenzo da Ponte)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다 폰테는 청중들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렇게 쓴 것이며 이런 설정의 드라마틱한 생동감과는 관계없이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었다. 심지어 피가로에 대한 관객의 반응도 영화의 의도를 위하여 바뀌어 졌는데, 아마데우스에서는 이것을 실패로 그렸다. 사실은, 황제는 이미 길어진 오페라의 공연이 결말없이 계속 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앙콜을 금지시켜야만 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오페라 공연이 진행되는 방법 자체에 대하여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둘 다 오늘날 청중들이 익숙해져 있는 방법으로 오페라를 지휘했다. 그것은 18세기의 사실에는 맞지 않는다. 지휘의 책임은 오케스트라를 책임지고 있는 악장과, 성악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며 오케스트라 음악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건반악기 연주자로 양분되어 있었다. 오페라의 첫 몇 번 정도의 공연에는 작곡가가 하프시코드나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가수들을 향해 약간씩 제스쳐를 써가면서 지시를 하기도 했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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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3)

양면적인 관계

대조적으로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 살리에리, 볼프강, 그리고 콘스탄체와 함께 - 샤퍼의 4명의 주요 등장인물들 중의 하나이다. 기사장으로 비유된 것은 이름의 표면적인 의미에 근거한 것이고,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죽은 돈지오반니에서의 등장인물과는 큰 상관은 없다. 레오폴드는 아들을 보호하려고 했었지만, 참견꾼, 가혹한 심판관이었다. 샤퍼는 레오폴드가 비엔나에 예상치 않은 방문을 하는 것으로 극에 등장 시키는데 이는 그가 콘스탄체를 처음 만났던 실제 상황과는 다르다. 그 커플은 사실 1783년 말에 잘츠부르크로 여행을 가서 가족들을 만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방문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실 아마데우스에서는 1783년 잘츠부르크 방문에서의 분위기를 1785년에 있었던 레오폴드의 비엔나 방문과 1780년대 후반의 모차르트의 재정적인 어려움과 연결시켰다. 레오폴드가 비엔나의 아파트에 들어오는 장면과, 그가 전날 밤에 먹고 마셨던 와인잔과 접시들이 널려 있는 것과 콘스탄체는 아직 잠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심문하는 듯한 질문들- 하녀는 없느냐, 경제적인 상황은 어떠하니, 네가 빚이 있다고 하더라, 학생은 받고 있느냐, 그리고 콘스탄체에게는, 임신을 하고 있느냐 - 을 던지는 것은, 18세기 비엔나의 성공적인 프리랜서 음악가의 생활에 대한 것이 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더 많이 보여 주고 있다. 만약 그 질문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그것이 20세기의 남성, 여성들에게 레오폴드에 대하여 전달하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그의 성격은 레오폴드가 비엔나의 폰 발트슈타텐 남작 (Baroness von Waldstadten)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하고 있슴은 확실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철학자들은 말이 없고 잘 웃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세상을 향해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나 스스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나는 틀림없이 철학자로 보일 것이다."

(영화와는) 반대로, 레오폴드가 1785년 2월11일에서 4월25일까지 아들을 실제로 방문했을 때, 볼프강은 매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했다. 레오폴드가 방문했던 기간에, 모차르트는 6회의 예약제연주회를 가졌었고 (2월 11, 18, 25일, 3월 4, 11, 18일), 요세프 하이든은 2월 12일에 볼프강이 그에게 헌정한 6개의 사중주곡의 첫 3곡을 보기 위하여 방문하여 레오폴드에게 그의 아들이 그가 알고 있는 작곡가 중에서 최고의 작곡가라고 이야기 하였다. 2월 13일에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K.456을 부르크극장 (Burgtheater)에서 연주하였고, 2월 15일에는 다른 협주곡 K.466을 같은 장소에서 연주했으며, 21일에는 지키 (Zichy)백작을 위하여 연주하였다. 3월 10일에는 부르크극장에서 다른 협주곡을 연주하였고, 13일과 15일에는 음악가협회(Tonkünstler Societät)가 모차르트의 오라토리오 '다윗의 회개 (Davide Penitente)'를 부르크극장에서 공연하였다. 3월 20일에 모차르트는 아마 안나 스토라체의 연주회에 갔었을 것이며, 4월 2일에는 6개의 "하이든" 사중주 모두를 베츨라 폰 플랑켄스턴의 저택에서 연주했다. 4월 24일에는 프리메이슨 칸타타 K.471이 "Zur Eintracht"의 별장에서 울려퍼졌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는 흥분되는 것들이었다. 1760년대와 70년대 그 가족들의 여행도 이러한 활동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모차르트가 이 시기에 벌어들인 돈은 레오폴드의 연봉의 몇 배나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반응은 노련한 음악가답게 별로 특색이 없었다. "우리는 1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9시 전에 일어나지 않는단다. 2시나 2시 반 경에 점심을 먹지. 날씨는 좋지 않아. 매일 같이 연주회가 있고, 나머지 시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곡을 하면서 보낸단다. 나는 여기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좀 든단다. 연주회들이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이런 야단법석을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내가 도착한 이후로, 네 동생의 포르테피아노는 열두 번도 더 극장이나 다른 사람의 집으로 옮겨졌었단다. 피아노 밑에는 큰 페달이 있는데 2피트나 되고 엄청나게 무겁단다. 그것이 멜그루브로 매주 금요일마다 옮겨졌다가 또 지키 (Zichy) 백작댁으로, 카우니츠 (Kaunitz) 왕자댁으로 옮겨지곤 한단다."

레오폴드가 비엔나에서 떠난 이후로, 그는 그의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마데우스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양면적인 것이었다. 볼프강의 부모에 대한 시각은 3가지의, 매우 다르고 상충되는 것들이었다. 그의 어린시절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신이 내린 기적"으로 여겼었고 아들의 음악교육 (바이올린, 건반, 작곡)을 비롯한 교육에 헌신했었다. 레오폴드는 그에게 단지 아버지가 되어준 것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를 교육시켰다. 이러한 어린 시절은 볼프강이 아버지를 가장 좋아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볼프강은 유순한 아이였고 레오폴드는 항상 그를 콘트롤하면서 파리, 런던, 비엔나에 두번, 이탈리아에 세번 여행을 가도록 했었다.

볼프강이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러한 관계는 두 가지 방향에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레오폴드는 그의 거주지를 대주교가 제한했었기 때문에 더이상 아들과의 긴 여행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날 수 없었고, 볼프강은 이제 더 이상 말 잘 듣는 아이가 아니었으며 자기 고집이 있는 어른이 되었다. 만약 레오폴드가 같이 있지 않았다면, 볼프강은 아마 그렇게 잘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오폴드는 좀처럼 아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볼프강이 파리와 다른 지역에 있는 동안, 첩자가 그의 아들의 활동을 염탐하여 레오폴드에게 보고 했었다. 파리 여행의 목적은 볼프강의 직업을 찾는 일이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행은 볼프강이 여자에 약하다는 점과 돈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최고의 충격은 그의 어머니의 사망이었는데, 그 때 이후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레오폴드는 볼프강이 어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부모님과 잘츠부르크로부터의 자유를 맛 본 이후로, 식구들의 영역을 떠나는 것이 볼프강의 가장 강한 소망이 되었다. 볼프강은 문자 그대로 대주교의 관할에서 문 밖으로 쫓겨남으로서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레오폴드를 더욱 고립시켰는데, 그는 볼프강이 독립적으로 스스로 자기관리를 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볼프강이 잘츠부르크로 돌아오기를 바랬었다. 레오폴드는 비엔나의 대중들이 궁극적으로 볼프강의 음악을 싫증낼 것으로 생각했고, 볼프강은 그 자신을 관리할 능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볼프강이 궁정의 직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자기 파멸의 징조로 여겼다.

더구나, 레오폴드 보다 더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로부터 몰아 내었던 것은 대주교와 지역의 음악가 들이었다. 또한 이 도시는 오페라를 작곡하고 싶은 작곡가를 위한 공간도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볼프강이 태어난 도시에 남아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던 신동이라는 굴레가 그곳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작은 기적"으로 생각했고 1770년대 중반까지도 젊고 재능있는 음악가로 여기지 않았다. "하느님 다음은 아빠"였음에도 불구하고, 볼프강은 비엔나에서 자립했고,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에 완전한 독립을 향한 그의 투쟁은 결국 승리했다.

볼프강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조율하는 것에는 확실히 레오폴드 만큼 유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레오폴드의 관리스타일은 찌꺼기를 남겨서 볼프강이 일종의 직위를 얻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것 같다. 1769년에 이미 요한 아돌프 하쎄는 반기을 들었다. "그 모차르트 선생은 아주 예의바르고 세련된 분입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매우 잘 교육받았지요. 아들은 더없이 잘생기고, 생기있고 우아하며 예의가 바릅니다. 그리고 그를 알면 알 수록 사랑스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나는 만약 그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제대로 발전을 한다면, 그는 신동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마 너무 그를 응석받이로 키우거나, 과도한 칭찬으로 그를 망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제가 우려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1771년에 다시, "젊은 모차르트는 그의 나이에 비하여 확실히 훌륭하고, 나는 그를 정말로 끝없이 사랑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모든 면에서 불만족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같은 불평을 여기에서도 늘어 놓기 때문이지요. 그는 그의 아들을 좀 심하게 우상화하고, 그래서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들을 망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소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좋은 감성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아버지의 알랑거림에도 그가 망쳐지지 않고 정직한 친구로 자라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같은 해의 12월에,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밀라노 총독인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에게 다음과 같은 우려를 이야기 하고 있다. "네가 나에게 젊은 잘츠부르크인을 써도 좋은지 묻는구나. 나는 네가 작곡가를 원하는 것인지 쓸모없는 사람들을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만약 그 일이 너에게 기쁨을 준다면, 나는 너를 방해할 생각은 없단다.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네가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직위를 주고 채용해서 부담이 늘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 싶어서란다. 만약 그들이 채용된다면, 그들이 거지들처럼 세상을 돌아다녀 궁정음악가들의 품위를 더 떨어 뜨리게 만들 것이란다."

모차르트라는 이름은 볼프강이 1777년에서 1778년에 새로운 자리를 찾고 있을 때 이미 그 골치아픈 명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기사장과, 레퀴엠을 주문한 사신의 역할로서의 야누스의 얼굴을 한 검은 카니발 가면을 레오폴드가 연기하도록 한 것은 샤퍼의 빛나는 연극적인 아이디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이 작곡을 그의 아버지를 추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그 곡은 발세그-스투파흐 (Walsegg-Stuppach) 백작이 그의 아내를 위하여 주문한 것이고, 그는 그것을 자신의 작곡으로 보이게 했는데, 이것은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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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2008년 1월 2일 수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2)

강박적인 질투심

비록 제목은 아마데우스이지만, 샤퍼의 작품에서 중심에 있는 인물은 안토니오 살리에리 (1750-1825)이다. 살리에리는 1774년에서 1824년까지 비엔나의 궁정음악계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말년에 그는 노인성 치매로 고통을 겪었다. 1824년 경에 비엔나에 떠돌던 루머 중에서 하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이 었다. 이 이야기는 베토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귀에도 전해졌다. 1825년 살리에리의 비서 두 명은 그들의 업무 중에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을 했고, 모차르트 담당의의 친구는 볼프강이 당시 비엔나에 퍼져있던 열병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입증되지 않은 가설로부터 샤퍼는 아마데우스의 중심 캐릭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살인적인 질투에 사로잡힌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는 루머의 확산에 부채질을 했는데, 그녀는 살리에리가 그녀의 남편을 모함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설사 뜨거운 적대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살리에리는 궁정 음악계에서 스스로의 영역을 보존하려고 했었을 뿐이 었다는 것이 더 그럴 듯한 설명일 것이다. 만약 궁정음악계의 힘이 매우 강력하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성공을 방해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후궁으로부터의 도피"나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는 작곡되지도 궁정극장에서 공연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나쁜 관계가 둘 사이에 존재했다면, 살리에리는 확실히 1786년 2월에 쉔부른 궁전에서 모차르트와 함께 오페라의 홍보 전단을 같이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모차르트는 1787년 12월 궁정 실내작곡가로 임명되었고 그의 사망 즈음에는 성 스테판 성당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었다. 살리에리는 심지어 1791년 10월 13일의 마술피리 공연에도 참석했었고 모차르트의 사망 전일에 그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증언에 의하면 12월6일의 장례식에도 조문을 했었다.

만약 살리에리가 아마데우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강박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질투심은 여러가지로 관찰되었을 것이다. 궁정작곡가로서 제국의 음악감독으로, 그는 많은 재능있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베토벤은 이탈리아 교재들로 그와 공부했고, 살리에리는 슈베르트의 특별한 재능을 일찌기 발겼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오페라, 노래, 4중주, 교향곡, 무엇이던지 작곡을 한다." 1816년 6월에 존경받는 카펠마이스터는 황제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그의 일기장에 슈베르트에 대한 개인적이고 정직한 찬사를 남겼다.

모든 제자들이 주위에 모여 그의 희년을 축하하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해주는 것을 보며, 요즘의 작곡가들을 얽매는 경향이 있는,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 위대한 독일 음악가 (베토벤)의 덕택으로 우리가 얻게된, 모든 기발한 것들 -로 부터 벗어나 자연의 단순한 표현으로 되어 있는 제자의 작품들을 듣는 것은 어느 음악가에게나 즐겁고 설레이는 일일 것이다. 그런 기발함 (또는 기이함)은 비극적인 것과 코믹함, 성스러움과 세속적임, 즐거움과 불쾌함, 영웅적인 긴장감과 단순한 소음을 구별하지 않고 혼동을 준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아닌 광기를 일으킨다. 그것은 신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하기 보다는 경멸의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제자들에게 이런 무절제함을 금지시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자연의 순수한 원천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현재의 부자연스러운 영향에도 불구하고 글룩의 발자취를 좇아,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음악가는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번역이 잘 안되네요..ㅜㅜ)


안셀름 후텐브레너 (Anselm Huttenbrenner)는 살리에리가 항상 모차르트에 대하여 "특별한 존경으로 가지고" 이야기 했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궁정 도서관으로 부터 악보들을 빌려줄 정도로 이 두 작곡가가 친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콘스탄체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사이가 나빴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관계는 건전한 직업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 따르면, 살리에리의 질투심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소년이었던 시절 "모차르트처럼 훌륭한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소망에 근거한다. 노년의 살리에리는 고해신부가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자 그 자신을 다시 한번 모차르트와 비교하며 그 경구를 의심하는 장면은 탁월한 장면이다. 그러나 1760년경에 이탈리아의 젊은이에 의하여 주장되어진 "위대한 작곡가"라는 개념은 거의 반세기나 앞선 것이며 사실은 거의 전적으로 19세기의 독일의 개념이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역사적인 실질에 부합하는 것은 그가 궁정작곡가와 제국의 카펠마이스터로서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가 비엔나 봉봉을 즐겼다는 것 밖에는 없다.

살리에리가 역사적으로 위대하다는 평가를 얻지는 못했슴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을 위하여 오페라를 작곡하고 의심할 수 없는 음악성을 가지고 있던 매우 존경받는 성공적인 작곡가였다. 대조적으로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살리에리의 음악은 그의 진정한 재능에는 못 미치는 단순한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즉흥성과 연주 기술이 예외적으로 뛰어난 것이었슴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살리에리의 재능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살리에리를 최소한의 재능만 있는 음악가로 묘사함으로서 음악적인 재능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보여 주었고, 그럼으로서 샤퍼의 계획대로 드라마를 진행시켰다. 살리에리의 음악은 불멸성을 획득할 수는 없었을지는 모르나 늘 올바르고, 재능이 있으며, 적절한 것이었다.

주변인물들의 성격

살리에리의 고용주였던 요세프 2세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낮게 평가되어 있다. 샤퍼와 포먼은 황제를 순진하고 잘 교육받지 못한 음악가로 그려내었다. 그가 살리에리의 쉬운 행진곡 소품을 가지고 고생하는 장면이 바로 이런 점이다. 그러나, 요세프 2세는 음악적으로 세련된 사람이었고 꽤 수준 높은 연주가였다. 황제는 그의 극장 관리에 참가했었고 거의 매일 저녁 실내악을 위한 시간을 가졌고 가끔은 거기에서 적극적으로  첼로나 건반악기 파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는 벤첼 라이문드 비르크 (Wenzel Raimund Birck, 1718-63)의 학생이었고, 1762년에는 요한 아돌프 핫세 (Johann Adolf Hasse)가 황제의 가족들을 위하여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연도곡을 오르간으로 연주했었다.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요세프의 반응은 "너무 음표가 많다"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의견을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의견은 18세기에 전문가와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널리 인정되었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이든에게 헌정된 모차르트의 6개의 현악사중주를 "잘못된 음표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불가해하고 연주할 수 없는 곡들로 여겼었다. 몇몇 사람들은 곡에 불만족하여 모차르트의 출판인인 아르타리아 (Artaria)에 악보들을 반품하기도 했었다.

샤퍼가 그린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Hieronymous Colloredo)는 요세프 2세의 정치적, 이념적인 대척점이었다. 아마데우스에서 요세프는 대주교를 화나게 하고 싶어 했다. 사실 지기스문트 크리스토프 슈라텐바흐 (Sigismund Christoph Schrattenbach)의 사후에 콜로레도를 뽑은 것은 잘츠부르크에서 요세프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두드러진 변화였다. 슈라텐바흐는 자비롭고 콜로레도는 오만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것은 주로 모차르트 일가의 서신교환으로 부터 유래된 것이다. 모차르트 가족의 의견에 근거하여 대주교나 다른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고용과 자유로운 여행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데에 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매우 편향된 근거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콜로레도는 재직 시에 계몽주의적인 견해와 행동을 보여주었고, 슈라텐바흐는 모차르트 일가에 대한 자비로움을 보여주었다. 볼크마르 브라운베렌스 (Volkmar Braunbehrens)는 그를 "매우 경건한 척하는 괴벽스럽고, 변덕스러운 고집불통이며 대주교보다는 아이들의 사제가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어머니는 1778년 파리에서 사망했고 그의 장인은 1779년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샤퍼와 포먼은 영리하게 돈지오반니와 마술피리로의 등장인물들부터 생존해 있던 다른 부모들 (아버지와 장모)의 성격을 비교하여 촛점을 맞추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어두운 화음이 같이 나오면서 기사장이 되고, 마리아 카실리에 베버는 밤의 여왕이 된다. 모차르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프로이 베버를 매우 까다로운 사람으로 묘사했었는데, 밤의 여왕으로 비유한 것은 하는 것은 성격이 어떠했던가를 잘 나타내어 준다. 그러므로, 비록 콘스탄체의 어머니가 영화에서 주변적인 인물로만 머무르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데우스에서의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대체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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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