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5일 토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6)

연극 Amadeu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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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Amadeus, 1984



그릇된 해석들

아마데우스는 지난 230년 동안 계속되어온 모차르트에 대한 환상을 이용하려고 했던 최근의 몇 가지 시도들 중 하나이다. 최근 많이 읽혀지는 두 권의 책들도 역시 모차르트의 일대기와 정신를 멋대로 해석하고 있다. 볼프강 힐데샤이머 (Wolfgang Hildesheimer)의 '모차르트'와 프란시스 카 (Francis Carr)의 '모차르트와 콘스탄테'가 그것이다. 힐데샤이머는 서신들을 자세히 독해하여 많은 통찰력있는 견해를 제공하고는 있으나, 모차르트의 사랑과 삶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감정적인 분리에 대한 추측은 그다지 근거가 없다. 그는 모차르트의 표현이 인위적이고 무감각하다고 보았고 주어진 상황에 대한 오늘날의 반응방식으로 모차르트를 왜곡되게 평가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오래된 픽션 중 몇몇을 사용하고 그 자신이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마데우스처럼, 그의 모차르트는 환상적인 캐릭터이고 작품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더불어 그릇된 해석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다른 음악애호가이며 전기작가인 프란시스 카도 역시 서류들을 검토하고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의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역사적 진실을 찾으려는 인상을 준다. 카는 독살설을 다시 제기하는데, 그는 살리에리가 아니라, 모차르트가 프란츠 호프데멜(Franz Hofdemel)의 아내이고 그의 피아노 학생 중 하나였던 막달레나와 가졌던 관계 (카에 의하여 꾸며내어진) 때문에 호프데멜을 의심한다. 호프데멜은 모차르트의 사망 며칠 후에그의 아내를 상해하고 본인은 자살했다. 호프데멜의 슬픈 운명이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모차르트와의 또 다른 연관관계는 그가 프리메이슨 형제였고 작곡가에게 돈을 빌려줬었다는 것 밖엔 없다. 반면에, 모차르트의 죽음과 호프데멜의 자살이 같은 시간 대와 공간에 있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이다. 카의 책은 서류들에 기반을 둔 것처럼 보이는 타블로이드 (선정적인) 전기에 지나지 않는다.

힐데샤이머와 카의 책들 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지고 있는 의심할 수 없는 환상으로부터 성공을 이루어 냈다. 모차르트의 이름이 없었다면, 우리 자신의 문화가 만들어 낸 이런 인위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해석하기 위하여 편지, 회상, 그리고 다른 직접적인 자료들을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런 자료들을 쉽게 구하여 질 수 있으나, 편지나 회상의 작성자들 그리고 소문을 퍼뜨렸던 사람들 거의 모두가 각각의 의도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단지 사실들"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모차르트의 신화가 번성하는 것은 바로 서류 자체들과 그것들에 대한 해석에서 부터인 것이다.

왜 모차르트는 이토록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가? 아마 그것은 그 음악 뒤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영원히 잘못된 시도들로부터 나오게 된 것일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종종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되곤 하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예를 들어, 교향곡 40번 g단조 K.550에 대한 비평은 찬사로 일관되어 있지만, 그 성격은 파악하기 어려운 채로 남아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은 그 곡이 엄격한 의미에서 고전파 양식이고 그리스식의 "가벼움과 우아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았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은 그 곡이"실내악의 숙명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젠스 피터 랄센(Jens Peter Larsen)은 그 곡은 사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고 믿었다. 로빈스 랜던(Robbins Landon)은 그 곡이 모차르트의 조울증적 경향의 악화를 보여주는 일련의 작품 중 하나라고 말한 반면에, 잭 웨스트럽(Jack Westrup)은 오페라 부파의 정신을 그 곡에서 발견했다. 아마도 어떠한 교향적 캐논 작품도 학식있는 비평가들로 부터 이렇게 다양한 정서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의 음악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반응이야 말로 이 사람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설명해 주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이 사람을 설명하는 전기들이 그의 음악에 대한 반응들과 비교할 만한 것이다. 역사 기록을 올바로 세우려고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샤퍼와 포먼의 살리에리는 어떤 면에서 보면 이미 옳다: 모차르트라는 천재는 설명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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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eter Brown 은 인디애나대 음대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는 "요세프 하이든의 건반음악: 원전과 스타일" 그리고 "하이든 '창조'의 연주"의 저자이다. 브라운판의 "창조"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와 the Academy of Ancient Music에 의하여 레코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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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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