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5일 토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5)

"젊고 순수한 모차르트"

연극과 영화 둘 다에서의 중심적인 문제는 모차르트의 행동인데, 그가 귀족저택의 응접실에서 콘스탄체와 시시덕거리는 것, 부적절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 과도하게 술을 마시고, 황제와 대주교에게 버릇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 살리에리를 흉내내며 놀리는 것, 잘난 척을 하고, 계속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것 등이다. 만일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황제 앞에서 그런 행동을 보였다면 모차르트는 궁정에서 추방당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민중의" 황제가 다스리던 시절에 격식이 느슨해 졌기는 하지만, 요세프2세에게 그가 말했던 것 처럼 "바보같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랬다면) 결과적으로 빈 오페라의 어떤 작품도 의뢰되거나 작곡될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어떤 작품도 공연될 공간이 주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모차르트는 황제나 그의 측근들을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대접해야만 했었을 것이다.

모차르트의 음주 장면은 아마데우스에서 부주제로 계속 등장한다. 그러나 마지막 1-2년간 음주량이 늘긴 했었지만, 사실 그가 과도하게 음주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콘스탄체가 바덴에 있었던 1791년 여름에, "그는 쉬카네더 (Schikaneder)와 함께 아침 내내 샴페인을 마시곤 했고 밤새도록 펀치를 마셨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그를 직접적으로 알 지 못했던 이그나츠 페르디난드 칼 아놀드(Ignaz Ernst Ferdinand Karl Arnold)로부터 온 것이다. 술마시기 좋아하는 작가들이 많은 반면, 작곡가들의 경우에는 그런 상황이 많지 않은 것 같다. 그의 위대한 음악이 알콜의 영향 하에서 작곡되었을 가능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토록 일관성있게 많은 작품들에서 그렇게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데우스는 또한 모차르트의 혼외관계 문제도 제기한다. 그 장면은 후궁으로의 탈출의 초연 후에 나온다. 콘스탄체 베버는 모차르트의 약혼녀로 황제에게 소개된다. 그 때, 프리마돈나이며 사실 살리에리의 연인인 카발리에리 (Cavalierri)는 모차르트에게 한 방 날린다. 살리에리는 숨을 죽이며 "모차르트가 그녀를 가졌군."이라고 답한다. 콘스탄체를 제외한 모차르트의 관계에 대하여는 단지 추측만이 가능할 뿐이다. 몇몇 전기작가들은 모차르트가 거의 모든 그의 건반악기 제자들, 프리마돈나들 그리고 그가 일련의 저급한 편지들을 보냈었던 사촌 "Bäsle"(역주: 사촌동생을 뜻하는 슈바벤 지방 애칭)과 사랑에 빠졌었다고 말한다. 모차르트가 연애에 빠져 있었는지, 모든 여인들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었는지 아닌지는 어느 한 가지 방향으로  증명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그러했다면, 모차르트와 관계한 여인의 목록은 돈지오반니의 목록에 비견될만 할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고 제한적인 견해를 보여 주는 두 장의 편지가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첫번째는 보헤미아 작곡가인 요세프 미슬리베체크(Joseph Mysliwecek)의 매독에 관한 것인데, 그의 코에는 궤양이 생겨서 거의 없어질 것 같은 지경이었다. 모차르트는 직접 그의 얼굴을 보았고 그런 변형이 생긴 원인을 잘 알고 있었으며 아버지에게 이렇게 썼다: "그런 끔찍한 모습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불쌍한 소녀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력적인 단어인 애인(maitresse)은 우리의 혀 위에서는 (wh--e in our tongue) 정말 지나치게 매력적이군요. 그러나 저는 브루네티(Brunetti)도 미슬리베체크(Mysliwechek)도 아닙니다. 저는 모차르트, 젊고 순수한 모차르트입니다."

1781년 12월에 그는 다시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저는 끝맺기 전에 제가 상당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유들을 말씀 드려야만 합니다. 자연의 음성은 저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만큼, 그리고 아마 많은 크고 힘쎈 시골뜨기 친구들에게 보다도 더 크게 들립니다. 저는 단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요즈음 하는 것처럼은 살 수가 없을 뿐입니다. 첫째로, 저는 그러기엔 너무나 종교적이고, 둘째, 저의 이웃을 너무도 사랑하며 순진한 소녀를 유혹하기에는 너무나 명예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째로, 저는 병에 걸리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구역질 나며 끔찍하고 공포스럽고, 그런 창녀들과 놀아 나는 바보짓을 하기에는 건강을 너무나 염려하고 있습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그런 척하는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도 확실히 있는데, 그는 파리여행 중이나 그 후에 그리고 1777-78년에도 가끔 그랬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슬리베체크와의 만남은 방탕한 생활의 위험성에 관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슴에 틀림이 없고, 특히 자신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에게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인정되지 못한, 이해되지 않은

몇몇 사후의 조사 (또는 검시결과)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마지막 몇 년간의 생활방식이 그가 사망을 앞당겼다고 생각되며 - 비록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 이러한 결론은 아마데우스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역시 인용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독살설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였다. 의학적으로 그리고 단순한 관찰로서 모차르트가 최후에 앓았던 병을 진단하려는 시도들에서는 독이 아니라 티푸스에서 류마티즘 열병에 이르는 다양한 원인들을 지목했다. 피터 데이비스 박사 (Dr. Peter J. Davies)가 했던, 가장 철저했던 조사에서는 모차르트가 11월 18일에 있었던 프리메이슨 지부 집회에서 연쇄상 구균에 감염 (streptococcal infection)되어 발생한 알레르기성 자반증(Schonlein-Henoch syndrome)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후의 진단이므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독살설이 없었다면 죽음의 원인에 대해 이토록 의견이 분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차르트 최후의 병명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무엇이 성년의 모차르트를 작곡하게 했는가에 관한 데이비스 박사의 결론이다. 왜 그리고 어떻게 그는 어떤 시기에는 너무나 많은 작곡을 했으며, 다른 시기에는 거의 하지 않았는가? 데이비스 박사는 모차르트가, 정신병은 아니지만, 주기적으로 기분이 상승했다가 침체하곤 하는 정서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그는 "예술가들은 창조적인 활동을 놀랍도록 폭발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모차르트는 극단적인 예이다."라고 지적한다. 1770년대 후반부터, 데이비스 박사는 다섯 번의 그 같은 폭발을 찾아 낸다: (1) 만하임, 1777-1778년; (2) 뮌헨, 1780-81년; (3) 빈, 1786년 전반; (4) 빈, 1788년 여름; (5) 빈, 1791년 1분기. 예를 들어, 데이비스가 말한 세번째 폭발에서,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극장지배인,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K.488과 491, 피아노 사중주 K.493, 혼협주곡 K.495, 그리고 몇 개의 작은 작품들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는 생산성의 시기들 (즉, 작품이 완성된 시기)만 보고 내부적인 준비작업의 시기들이 없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피가로 같은 작품의 초연 시의 흥분한 모차르트는, 데이비스에 따르면, 궤도를 좀 벗어나는 것 같았을 것이다. 데이비스는 또한 "존경받는 사랑의 객체로부터의 정기적인 사랑의 공급"을 필요로 하는 나르시즘적인 의존성도 찾아냈다. 이런 심리적인 요소와 프리랜서 음악가로서 일반적으로 직면했을 불안정함의 결합을 모차르트는 때때로 잘 극복해 내기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를 진가가 인정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이해되지도 못하며, 재정적으로 힘들어 동전 몇 푼만 남은 가난한 천재로 19세기 방식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샤퍼와 포먼의 영화 버전에서, 그는 1781년 이후 내내 빈 중심의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고 있다. 사실, 모차르트는 자주 거주지를 바꾸었고 그의 수입은,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음악가로는 특이하게 높았으며, 몇 년간은 전 빈 시민들 중 상위 10%에 속했었다. 또한, 모차르트는 그 시대의 기준으로는 결코 가난하지 않았다. 가난한 작곡가라는 개념은 그가 그의 프리메이슨 형제인 미카엘 펀치버그(Michael Puchberg)에게 1788년에 1791년에 돈을 빌리려는 목적으로 쓴 일련의 편지로 부터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1789년 7월12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친애하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며 가장 존경하는 B.O. 에게

위대한 신이시여! 저는 제가 가장 싫어하는 적이라고 지금 저의 상황에 놓이게 하고 싶지 않군요. 가장 사랑하는 친구이며 형제인 당신이 저를 버린다면, 불행하고 결백한 저 자신과 불쌍한 병든 제 아내와 아이는 모두 갈 곳이 없게 됩니다. 지난번 당신을 만났을 때 저는 제 사정을 터놓고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만, 그럴만한 용기가 없었지요 - 사실 지금도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네요. 그래서 간신히 글로 쓰고 있을 뿐이고 쓰면서도 떨고 있습니다 - 그리고 당신이 저를, 제 상황을 아시고 있고, 저의 불행과 최악의 비참한 상황에 관하여 저의 결백함을 믿고 계시다는 것을 제가 확신하고 있지 않다면 감히 편지를 써서도 안되지요. 자비로운 신이시여! 저는 당신께 감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애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빚을 갚는 것 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다른 자료들은 없지만 이러한 편지들로부터, 모차르트가 빈에서 환영받지 못했었다고 결론 지어진 것이다.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 여러가지 요소들이 그의 재정적인 상황을 악화시켰다. 모차르트는 5군데에서 수입을 얻었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공공 또는 사적인 연주, 정기공연, 교습, 수수료, 그리고 음악의 출판.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경제사정이나 관련된 요소들에 의하여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80년대 종반에 오스트리아는 터키 전쟁에 참가하고 있었고 많은 모차르트의 후원자들은 군복무를 하거나 빈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었다. 심지어 황제도 1788년에 전쟁터로 나갔다. 콘스탄체는 병들어 바덴으로 요양을 떠나야만 했다. 한 때는 그녀의 발목 궤양이 매우 심해졌었다. 온천욕을 통한 치료는 부유층들만이 사용했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슴에 틀림없다. 1780년대 후반 동안 모차르트는 여러가지 활동으로 수입을 벌기보다는 작곡활동을 함으로써 수입을 일정하게 가져 가려고 노력을 했었다. 일반적인 경제상황 뿐 아니라 그들 가족의 특정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 가족은 예전 습관대로 생활을 유지하였고 그것이 현금상태에 문제를 야기시켰다. 상황은 그들이 1780년대 초반의 6-7년간 높은 수입을 벌어들였을 때 저축을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리고 1791년에 모차르트가 칼 리흐노프스키 왕자 (Prince Karl Lichnowsky)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하여 상당한 돈을 내야 했기 때문에 더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가 살아있었다면, 그의 수입은 하이든이 1790년대에 벌어들인 상당한 수입을 능가하거나 비슷했을 것이다.

모차르트 학자인 크레머 (Uwe Kramer)는 1780년대 초 높은 수입과 비용의 불균형이 있었을 텐데 모차르트의 현금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크레머는 많은 현금이 당구나 카드게임을 하여 도박자금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이론에 대해 반대하는 의견에서 부터 이런 이론이 어느정도 가능성은 있다는 수용적인 의견까지 혼합된 반응이 있었다. 증명이 될 수 있건 없건, 모차르트의 생활 습관에 대한 몇몇 증언은 도박을 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읽힐 수 있다. 피터 데이비스(Peter J. Davies)는 모차르트의 성격적인 특징이 그의 환경적인 요인과 결합되어 그가 그런 강박적인 행동을 하는 경향을 만들어 내었을 수도 있다고 빋는다.

아마데우스에서는 모차르트의 마지막 나날들과 매장 장면을 상상과 믿을 만하지 못한 전통을 결합하여 보여준다. 상상력은 모차르트의 마지막 나날들에 대한 샤퍼와 포먼의 영화 버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살리에리가 1791년 10월 13일 마술피리 공연에 참석했던 것이 12월 5일 모차르트의 죽음과 시간적으로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샤퍼의 버전에서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짧은 마지막 투병기간에 레퀴엠을 작곡하는 것을 돕는다. 사실, 모차르트의 미망인은 적어도 세명의 작곡가들에게 모차르트 최후의 작품을 돕도록 부탁했었고 마침내 프란츠 크사버 쥐스마이어(Franz Xaver Süssmayr)가 조수로 일하게 되었으며, 모차르트는 단지 몇 시간이 아니라 3주 동안이나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를 정성껏 돌본 것은 콘스탄체와 그녀의 가족들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나 누이는 이 점을 전혀 인정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아이러니다. 모차르트의 장례식과 매장은 고트프리트 반 스비에텐(Gottfried van Swieten) 남작에 의하여 준비되었고 그는 요세프식의 매장 지침을 따랐으며 망자의 재정적인 상황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아마데우스는 매장에 대하여는 꽤 정확한 그림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사망자를 자루에 넣어 공동묘지에 던져넣는 것은 극단적으로 모욕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1791년에는 빈 인구의 약 85%가 이런 방식으로 매장되었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던 매장방식이 아니라 일반적인 규범이었다.


(6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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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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