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5일 토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3)

양면적인 관계

대조적으로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 살리에리, 볼프강, 그리고 콘스탄체와 함께 - 샤퍼의 4명의 주요 등장인물들 중의 하나이다. 기사장으로 비유된 것은 이름의 표면적인 의미에 근거한 것이고, 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죽은 돈지오반니에서의 등장인물과는 큰 상관은 없다. 레오폴드는 아들을 보호하려고 했었지만, 참견꾼, 가혹한 심판관이었다. 샤퍼는 레오폴드가 비엔나에 예상치 않은 방문을 하는 것으로 극에 등장 시키는데 이는 그가 콘스탄체를 처음 만났던 실제 상황과는 다르다. 그 커플은 사실 1783년 말에 잘츠부르크로 여행을 가서 가족들을 만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방문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실 아마데우스에서는 1783년 잘츠부르크 방문에서의 분위기를 1785년에 있었던 레오폴드의 비엔나 방문과 1780년대 후반의 모차르트의 재정적인 어려움과 연결시켰다. 레오폴드가 비엔나의 아파트에 들어오는 장면과, 그가 전날 밤에 먹고 마셨던 와인잔과 접시들이 널려 있는 것과 콘스탄체는 아직 잠자리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심문하는 듯한 질문들- 하녀는 없느냐, 경제적인 상황은 어떠하니, 네가 빚이 있다고 하더라, 학생은 받고 있느냐, 그리고 콘스탄체에게는, 임신을 하고 있느냐 - 을 던지는 것은, 18세기 비엔나의 성공적인 프리랜서 음악가의 생활에 대한 것이 라기 보다는 현대적인 사고방식을 더 많이 보여 주고 있다. 만약 그 질문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그것이 20세기의 남성, 여성들에게 레오폴드에 대하여 전달하는 메시지는 매우 분명한 것이다.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그의 성격은 레오폴드가 비엔나의 폰 발트슈타텐 남작 (Baroness von Waldstadten)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하고 있슴은 확실하다. "어린 시절에 나는 철학자들은 말이 없고 잘 웃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세상을 향해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나 스스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나는 틀림없이 철학자로 보일 것이다."

(영화와는) 반대로, 레오폴드가 1785년 2월11일에서 4월25일까지 아들을 실제로 방문했을 때, 볼프강은 매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풍족했다. 레오폴드가 방문했던 기간에, 모차르트는 6회의 예약제연주회를 가졌었고 (2월 11, 18, 25일, 3월 4, 11, 18일), 요세프 하이든은 2월 12일에 볼프강이 그에게 헌정한 6개의 사중주곡의 첫 3곡을 보기 위하여 방문하여 레오폴드에게 그의 아들이 그가 알고 있는 작곡가 중에서 최고의 작곡가라고 이야기 하였다. 2월 13일에 모차르트는 피아노 협주곡 K.456을 부르크극장 (Burgtheater)에서 연주하였고, 2월 15일에는 다른 협주곡 K.466을 같은 장소에서 연주했으며, 21일에는 지키 (Zichy)백작을 위하여 연주하였다. 3월 10일에는 부르크극장에서 다른 협주곡을 연주하였고, 13일과 15일에는 음악가협회(Tonkünstler Societät)가 모차르트의 오라토리오 '다윗의 회개 (Davide Penitente)'를 부르크극장에서 공연하였다. 3월 20일에 모차르트는 아마 안나 스토라체의 연주회에 갔었을 것이며, 4월 2일에는 6개의 "하이든" 사중주 모두를 베츨라 폰 플랑켄스턴의 저택에서 연주했다. 4월 24일에는 프리메이슨 칸타타 K.471이 "Zur Eintracht"의 별장에서 울려퍼졌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아버지에게는 흥분되는 것들이었다. 1760년대와 70년대 그 가족들의 여행도 이러한 활동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모차르트가 이 시기에 벌어들인 돈은 레오폴드의 연봉의 몇 배나 되었다. 그의 아버지의 반응은 노련한 음악가답게 별로 특색이 없었다. "우리는 1시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9시 전에 일어나지 않는단다. 2시나 2시 반 경에 점심을 먹지. 날씨는 좋지 않아. 매일 같이 연주회가 있고, 나머지 시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작곡을 하면서 보낸단다. 나는 여기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좀 든단다. 연주회들이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이런 야단법석을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내가 도착한 이후로, 네 동생의 포르테피아노는 열두 번도 더 극장이나 다른 사람의 집으로 옮겨졌었단다. 피아노 밑에는 큰 페달이 있는데 2피트나 되고 엄청나게 무겁단다. 그것이 멜그루브로 매주 금요일마다 옮겨졌다가 또 지키 (Zichy) 백작댁으로, 카우니츠 (Kaunitz) 왕자댁으로 옮겨지곤 한단다."

레오폴드가 비엔나에서 떠난 이후로, 그는 그의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와의 관계는 아마데우스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양면적인 것이었다. 볼프강의 부모에 대한 시각은 3가지의, 매우 다르고 상충되는 것들이었다. 그의 어린시절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을 "신이 내린 기적"으로 여겼었고 아들의 음악교육 (바이올린, 건반, 작곡)을 비롯한 교육에 헌신했었다. 레오폴드는 그에게 단지 아버지가 되어준 것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를 교육시켰다. 이러한 어린 시절은 볼프강이 아버지를 가장 좋아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볼프강은 유순한 아이였고 레오폴드는 항상 그를 콘트롤하면서 파리, 런던, 비엔나에 두번, 이탈리아에 세번 여행을 가도록 했었다.

볼프강이 20대 초반이었을 때, 이러한 관계는 두 가지 방향에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레오폴드는 그의 거주지를 대주교가 제한했었기 때문에 더이상 아들과의 긴 여행을 위하여 잘츠부르크를 떠날 수 없었고, 볼프강은 이제 더 이상 말 잘 듣는 아이가 아니었으며 자기 고집이 있는 어른이 되었다. 만약 레오폴드가 같이 있지 않았다면, 볼프강은 아마 그렇게 잘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오폴드는 좀처럼 아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볼프강이 파리와 다른 지역에 있는 동안, 첩자가 그의 아들의 활동을 염탐하여 레오폴드에게 보고 했었다. 파리 여행의 목적은 볼프강의 직업을 찾는 일이었는데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행은 볼프강이 여자에 약하다는 점과 돈을 잘 관리하지 못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최고의 충격은 그의 어머니의 사망이었는데, 그 때 이후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레오폴드는 볼프강이 어머니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부모님과 잘츠부르크로부터의 자유를 맛 본 이후로, 식구들의 영역을 떠나는 것이 볼프강의 가장 강한 소망이 되었다. 볼프강은 문자 그대로 대주교의 관할에서 문 밖으로 쫓겨남으로서 자유롭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레오폴드를 더욱 고립시켰는데, 그는 볼프강이 독립적으로 스스로 자기관리를 할 능력이 있다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볼프강이 잘츠부르크로 돌아오기를 바랬었다. 레오폴드는 비엔나의 대중들이 궁극적으로 볼프강의 음악을 싫증낼 것으로 생각했고, 볼프강은 그 자신을 관리할 능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볼프강이 궁정의 직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자기 파멸의 징조로 여겼다.

더구나, 레오폴드 보다 더 모차르트를 잘츠부르크로부터 몰아 내었던 것은 대주교와 지역의 음악가 들이었다. 또한 이 도시는 오페라를 작곡하고 싶은 작곡가를 위한 공간도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볼프강이 태어난 도시에 남아 있는 한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던 신동이라는 굴레가 그곳에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작은 기적"으로 생각했고 1770년대 중반까지도 젊고 재능있는 음악가로 여기지 않았다. "하느님 다음은 아빠"였음에도 불구하고, 볼프강은 비엔나에서 자립했고,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에 완전한 독립을 향한 그의 투쟁은 결국 승리했다.

볼프강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조율하는 것에는 확실히 레오폴드 만큼 유능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레오폴드의 관리스타일은 찌꺼기를 남겨서 볼프강이 일종의 직위를 얻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것 같다. 1769년에 이미 요한 아돌프 하쎄는 반기을 들었다. "그 모차르트 선생은 아주 예의바르고 세련된 분입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매우 잘 교육받았지요. 아들은 더없이 잘생기고, 생기있고 우아하며 예의가 바릅니다. 그리고 그를 알면 알 수록 사랑스러워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나는 만약 그가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제대로 발전을 한다면, 그는 신동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아버지가 아마 너무 그를 응석받이로 키우거나, 과도한 칭찬으로 그를 망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제가 우려하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1771년에 다시, "젊은 모차르트는 그의 나이에 비하여 확실히 훌륭하고, 나는 그를 정말로 끝없이 사랑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모든 면에서 불만족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같은 불평을 여기에서도 늘어 놓기 때문이지요. 그는 그의 아들을 좀 심하게 우상화하고, 그래서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들을 망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소년이 본래 가지고 있는 좋은 감성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아버지의 알랑거림에도 그가 망쳐지지 않고 정직한 친구로 자라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같은 해의 12월에,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는 밀라노 총독인 그의 아들 페르디난드에게 다음과 같은 우려를 이야기 하고 있다. "네가 나에게 젊은 잘츠부르크인을 써도 좋은지 묻는구나. 나는 네가 작곡가를 원하는 것인지 쓸모없는 사람들을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만약 그 일이 너에게 기쁨을 준다면, 나는 너를 방해할 생각은 없단다.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네가 쓸모없는 사람들에게 직위를 주고 채용해서 부담이 늘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 싶어서란다. 만약 그들이 채용된다면, 그들이 거지들처럼 세상을 돌아다녀 궁정음악가들의 품위를 더 떨어 뜨리게 만들 것이란다."

모차르트라는 이름은 볼프강이 1777년에서 1778년에 새로운 자리를 찾고 있을 때 이미 그 골치아픈 명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기사장과, 레퀴엠을 주문한 사신의 역할로서의 야누스의 얼굴을 한 검은 카니발 가면을 레오폴드가 연기하도록 한 것은 샤퍼의 빛나는 연극적인 아이디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이 작곡을 그의 아버지를 추모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그 곡은 발세그-스투파흐 (Walsegg-Stuppach) 백작이 그의 아내를 위하여 주문한 것이고, 그는 그것을 자신의 작곡으로 보이게 했는데, 이것은 당시에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4편에서 계속)

---------------------------------------------------------------------------------

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