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2일 수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2)

강박적인 질투심

비록 제목은 아마데우스이지만, 샤퍼의 작품에서 중심에 있는 인물은 안토니오 살리에리 (1750-1825)이다. 살리에리는 1774년에서 1824년까지 비엔나의 궁정음악계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말년에 그는 노인성 치매로 고통을 겪었다. 1824년 경에 비엔나에 떠돌던 루머 중에서 하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것이 었다. 이 이야기는 베토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의 귀에도 전해졌다. 1825년 살리에리의 비서 두 명은 그들의 업무 중에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증언을 했고, 모차르트 담당의의 친구는 볼프강이 당시 비엔나에 퍼져있던 열병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입증되지 않은 가설로부터 샤퍼는 아마데우스의 중심 캐릭터,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살인적인 질투에 사로잡힌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차르트의 아내인, 콘스탄체는 루머의 확산에 부채질을 했는데, 그녀는 살리에리가 그녀의 남편을 모함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설사 뜨거운 적대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살리에리는 궁정 음악계에서 스스로의 영역을 보존하려고 했었을 뿐이 었다는 것이 더 그럴 듯한 설명일 것이다. 만약 궁정음악계의 힘이 매우 강력하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성공을 방해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다면 "후궁으로부터의 도피"나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는 작곡되지도 궁정극장에서 공연되지도 못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나쁜 관계가 둘 사이에 존재했다면, 살리에리는 확실히 1786년 2월에 쉔부른 궁전에서 모차르트와 함께 오페라의 홍보 전단을 같이 사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모차르트는 1787년 12월 궁정 실내작곡가로 임명되었고 그의 사망 즈음에는 성 스테판 성당의 지휘자로 임명되었었다. 살리에리는 심지어 1791년 10월 13일의 마술피리 공연에도 참석했었고 모차르트의 사망 전일에 그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증언에 의하면 12월6일의 장례식에도 조문을 했었다.

만약 살리에리가 아마데우스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강박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러한 질투심은 여러가지로 관찰되었을 것이다. 궁정작곡가로서 제국의 음악감독으로, 그는 많은 재능있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베토벤은 이탈리아 교재들로 그와 공부했고, 살리에리는 슈베르트의 특별한 재능을 일찌기 발겼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오페라, 노래, 4중주, 교향곡, 무엇이던지 작곡을 한다." 1816년 6월에 존경받는 카펠마이스터는 황제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그의 일기장에 슈베르트에 대한 개인적이고 정직한 찬사를 남겼다.

모든 제자들이 주위에 모여 그의 희년을 축하하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연주를 해주는 것을 보며, 요즘의 작곡가들을 얽매는 경향이 있는,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 위대한 독일 음악가 (베토벤)의 덕택으로 우리가 얻게된, 모든 기발한 것들 -로 부터 벗어나 자연의 단순한 표현으로 되어 있는 제자의 작품들을 듣는 것은 어느 음악가에게나 즐겁고 설레이는 일일 것이다. 그런 기발함 (또는 기이함)은 비극적인 것과 코믹함, 성스러움과 세속적임, 즐거움과 불쾌함, 영웅적인 긴장감과 단순한 소음을 구별하지 않고 혼동을 준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아닌 광기를 일으킨다. 그것은 신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가지게 하기 보다는 경멸의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제자들에게 이런 무절제함을 금지시키는 것, 그리고 그들을 자연의 순수한 원천에 머무르게 함으로써, 현재의 부자연스러운 영향에도 불구하고 글룩의 발자취를 좇아,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음악가는 가장 큰 만족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번역이 잘 안되네요..ㅜㅜ)


안셀름 후텐브레너 (Anselm Huttenbrenner)는 살리에리가 항상 모차르트에 대하여 "특별한 존경으로 가지고" 이야기 했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에게 궁정 도서관으로 부터 악보들을 빌려줄 정도로 이 두 작곡가가 친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콘스탄체의 언급을 제외하고는 살리에리와 모차르트가 사이가 나빴었다는 객관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의 관계는 건전한 직업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에 따르면, 살리에리의 질투심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소년이었던 시절 "모차르트처럼 훌륭한 작곡가"가 되고 싶었던 그의 소망에 근거한다. 노년의 살리에리는 고해신부가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자 그 자신을 다시 한번 모차르트와 비교하며 그 경구를 의심하는 장면은 탁월한 장면이다. 그러나 1760년경에 이탈리아의 젊은이에 의하여 주장되어진 "위대한 작곡가"라는 개념은 거의 반세기나 앞선 것이며 사실은 거의 전적으로 19세기의 독일의 개념이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역사적인 실질에 부합하는 것은 그가 궁정작곡가와 제국의 카펠마이스터로서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그가 비엔나 봉봉을 즐겼다는 것 밖에는 없다.

살리에리가 역사적으로 위대하다는 평가를 얻지는 못했슴에도 불구하고, 그는 궁정을 위하여 오페라를 작곡하고 의심할 수 없는 음악성을 가지고 있던 매우 존경받는 성공적인 작곡가였다. 대조적으로 아마데우스에 나오는 살리에리의 음악은 그의 진정한 재능에는 못 미치는 단순한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즉흥성과 연주 기술이 예외적으로 뛰어난 것이었슴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살리에리의 재능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살리에리를 최소한의 재능만 있는 음악가로 묘사함으로서 음악적인 재능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보여 주었고, 그럼으로서 샤퍼의 계획대로 드라마를 진행시켰다. 살리에리의 음악은 불멸성을 획득할 수는 없었을지는 모르나 늘 올바르고, 재능이 있으며, 적절한 것이었다.

주변인물들의 성격

살리에리의 고용주였던 요세프 2세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낮게 평가되어 있다. 샤퍼와 포먼은 황제를 순진하고 잘 교육받지 못한 음악가로 그려내었다. 그가 살리에리의 쉬운 행진곡 소품을 가지고 고생하는 장면이 바로 이런 점이다. 그러나, 요세프 2세는 음악적으로 세련된 사람이었고 꽤 수준 높은 연주가였다. 황제는 그의 극장 관리에 참가했었고 거의 매일 저녁 실내악을 위한 시간을 가졌고 가끔은 거기에서 적극적으로  첼로나 건반악기 파트를 연주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는 벤첼 라이문드 비르크 (Wenzel Raimund Birck, 1718-63)의 학생이었고, 1762년에는 요한 아돌프 핫세 (Johann Adolf Hasse)가 황제의 가족들을 위하여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는 연도곡을 오르간으로 연주했었다. 모차르트의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요세프의 반응은 "너무 음표가 많다"라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의견을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의견은 18세기에 전문가와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널리 인정되었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하이든에게 헌정된 모차르트의 6개의 현악사중주를 "잘못된 음표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에 불가해하고 연주할 수 없는 곡들로 여겼었다. 몇몇 사람들은 곡에 불만족하여 모차르트의 출판인인 아르타리아 (Artaria)에 악보들을 반품하기도 했었다.

샤퍼가 그린 잘츠부르크 대주교인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Hieronymous Colloredo)는 요세프 2세의 정치적, 이념적인 대척점이었다. 아마데우스에서 요세프는 대주교를 화나게 하고 싶어 했다. 사실 지기스문트 크리스토프 슈라텐바흐 (Sigismund Christoph Schrattenbach)의 사후에 콜로레도를 뽑은 것은 잘츠부르크에서 요세프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두드러진 변화였다. 슈라텐바흐는 자비롭고 콜로레도는 오만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것은 주로 모차르트 일가의 서신교환으로 부터 유래된 것이다. 모차르트 가족의 의견에 근거하여 대주교나 다른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고용과 자유로운 여행을 보장받고 싶어하는 데에 주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매우 편향된 근거로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다. 콜로레도는 재직 시에 계몽주의적인 견해와 행동을 보여주었고, 슈라텐바흐는 모차르트 일가에 대한 자비로움을 보여주었다. 볼크마르 브라운베렌스 (Volkmar Braunbehrens)는 그를 "매우 경건한 척하는 괴벽스럽고, 변덕스러운 고집불통이며 대주교보다는 아이들의 사제가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어머니는 1778년 파리에서 사망했고 그의 장인은 1779년 비엔나에서 사망했다. 샤퍼와 포먼은 영리하게 돈지오반니와 마술피리로의 등장인물들부터 생존해 있던 다른 부모들 (아버지와 장모)의 성격을 비교하여 촛점을 맞추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어두운 화음이 같이 나오면서 기사장이 되고, 마리아 카실리에 베버는 밤의 여왕이 된다. 모차르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프로이 베버를 매우 까다로운 사람으로 묘사했었는데, 밤의 여왕으로 비유한 것은 하는 것은 성격이 어떠했던가를 잘 나타내어 준다. 그러므로, 비록 콘스탄체의 어머니가 영화에서 주변적인 인물로만 머무르고 있기는 하지만, 아마데우스에서의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대체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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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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