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5일 토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4)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저를 사랑합니다"

만약 레오폴드가 볼프강의 세계에서 "하느님 다음"이었다면, 그의 아내 콘스탄체는 같은 별자리의 어디 쯤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아마데우스에서 잘 보여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자신의 독립성을 보여주고 강화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었다. 이런 점에서, 강박적 외설어증, 분변기호증, 그리고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비엔나 저택에서 음악수업과 리셉션 직전 장면에 성적인 등장 부분을 넣는 등,  그녀를 볼프강의 유치한 말장난을 같이하는 "머리가 빈" 사람으로 묘사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역시 샤퍼와 포먼의 목적에 맞게 시간의 흐름이 바뀌어져 있다. 그는 대주교를 알현하는 것을 끝낼 때까지는 콘스탄체와 같이 까불고 놀고 있었을 수가 없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살리에리가 지켜보고 있는 중에는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차르트는 그의 아버지에게 영화와는 다른 순서로 일이 벌어졌음을 설명한다: "제가 한 가지 더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는데, 그건 제가 대주교 밑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건 제가 그녀의 집에서 머물렀을 때 받은 부드러운 배려와 관심에서 시작된 것이지요."

결국, 우리는 콘스탄체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녀의 성격에 대한 부정적인 면들은 아마도 레오폴드와 모차르트의 누이인 난넬로부터 나온 것일 것이다. 미망인으로서의 콘스탄체의 모습을 보면, 그녀는 상당한 정도로 음악적인, 그리고 사업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슴에 틀림없다. 그녀는 죽은 남편과 그녀 자신의 명성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페미니스트 시대 이전의 문헌에서는 그녀가 남편의 천재성 덕에 부를 누리지도 못했고 그 천재를 이해하지도 못했다고 쓰여져 있으나 이것은 분명히 공정한 평가는 아니다. 볼프강이 누구와 결혼을 했었어도 이런 비난은 퍼부어졌을 것이다. 아서 슈리그 (Arthur Schurig)는 그녀에 관한 유일한 책에서 그녀가 "인색하고, 속이 좁으며, 허영심이 많고, 탐욕스러우며, 미신적이고 수다럽다"고 말했다. 모차르트 가족의 서신들을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모든 형용사들이 그녀의 시댁식구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편견이 들어 있을 지라도, 콘스탄체를 가장 완벽하게 묘사하는 것은 바로 볼프강 그 자신의 설명이다. 그는 결혼 전에 그녀에 대하여 레오폴드를 설득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자꾸 말씀을 드려서 귀찮으시겠지만 제가 말씀을 마치기 전에, 아버지께서 콘스탄체의 성격을 더 잘 아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못생기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라고는 작고 검은 두 눈과 귀여운 모습 뿐이지요. 그녀는 위트가 있지도 않지만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완수할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상식이 있어요. 그녀가 낭비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반대로, 그녀의 어머니가 적으나마나 있는 것들을 다른 두 자식들에게 해주었고 콘스탄체에게는 해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녀는 소박하게 옷을 입는데에 익숙해져 있어요. 사실 그녀는 깨끗하고 말쑥하게 옷을 입고 싶어하지만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아요. 보통 여자들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것을 그녀는 스스로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그녀는 머리도 매일 스스로 하지요. 더구나 그녀는 집안일을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고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어요. 저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도 온 마음을 다해 저를 사랑합니다. 제가 어떻게 이보다 더 나은 아내를 가질 수가 있겠어요?"

또한 샤퍼와 포먼은 콘스탄체가 장기 요양을 위하여 바덴에 머무르는 동안 모차르트에게 충실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점을 암시한다. 다른 곳에서도 그녀가 그 당시에 역시 바덴에 있었던, 모차르트의 제자이며 카피스트라고 알려진 프란츠 자버 쥐스마이어와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나와 있다. 이 주장의 근거로 몇몇 작가들은 모차르트 사후에 그녀의 건강이 돌아와 이후 쭉 나빠지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후 다시는 임신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1791년 7월 26일에 태어난, 그들의 아들, 프란츠 자버 볼프강은 쥐스마이어의 아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었다. 이 가설은 프란츠 자버 볼프강이 그의 합법적인 아버지의 가장 독특한 유전적인 특징 - 기형적인 왼쪽 귀 -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결국, 콘스탄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는 별로 없다. 비난은 주로 그녀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나 남성적인 편견을 가진 음악학자 그룹으로부터 온다. 당연하게도, 콘스탄체가 가족 간의 편지를 조작했다는 점은 학자들을 혼란하게 만들었고 그녀의 동기에 대한 의심을 가중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의심은 어떤 사람의 일대기에 대하여 더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이전 시대에 맞는 견해라기 보다는 오히려 20세기적인 관점에 해당하는 것이다. 아마 모차르트의 일생에서 콘스탄체는 그의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 월버거 페틀과 가장 잘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우리가 아는 한, 능력이나 성향의 양면에서, 그녀는 가장 확실한 비교대상이 될 것이다. 두 여인들은 상황에 맞게 행동했으나 눈에 띄지 않았었다.

평범한 기질, 시시한 농담들

아마데우스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묘사는 바로 볼프강 자신이다.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형상화했을까?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시대의 많은 작곡가들을 연구하는데에 있어서 문제점은 개인적인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인데, 이에 반해 모차르트와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일기, 광범위한 편지, 쪽지, 언론에서의 리뷰, 회상, 음악 목록와 압보의 서명 등을 포함하여 자료가 과다할 정도이다. 그러나, 알란 타이슨(Alan Tyson)은 그의 통찰력있는 글에서 이렇게 묻고 있다. "우리가 모차르트에 대하여 진실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우리가 그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많은 자료들이 음악천재의 마음을 우리에게 열어 보여  줄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의 전기가 그의 음악을 설명할 수 있는가? 또 음악가의 인간됨과 그의 예술성 사이에는 관계가 없는가? 마지막 질문에 대하여, 샤퍼는 철저히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샤퍼의 볼프강은, 살리에리의 말을 빌면, "낄낄 웃어 대는 음탕한 놈"이다. 그리고 샤퍼의 살리에리가 "기적같은" 천재과 "숭고한" 음악에 관하여 번민할 때, 음악가와 그의 음악 간의 괴리는 깊어 진다. 그러므로, 아마데우스에서 암시되어진 중심적인 질문은, 모차르트의 성격과 그의 예술적인 작품들이 관계가 있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역시 18세기가 아닌 19세기에나 나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시대에는 작곡가로서의 조건은 천재가 되어야 하는 것도, 독창적인 예술적 견해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재능의 문제이며 (음악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맞는 새로운 음악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당시에는) 표현의 종류에 따라 디자인되어지고 사용되어 지는, 음악적 아이디어가 들어있는 사전이 존재했다. 작곡가는 이들 중에서 골라서 청중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을 생산했다. 모차르트는 새로운 깊이있는 표현을 창조하기 위하여 이런 음악적 어휘들을 기술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조작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가 이렇게 활동했었던 것은 18세기 종반에 주로 유행하던 형식의 범위 내에서였다. 그러므로, 그 사람과 그의 음악이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비더마이어(Biedermeier)식의 여류작가인 캐롤린 피츨러 (Karoline Pichler)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차르트와 하이든은 내가 잘 아는데, 개인적인 교류에서 범상치 않은 지적능력을 보여 준 적이 전혀 없고 지적인 문화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어떤 학식이나 고급스러운 흥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기질적으로 좀 평범하고, 시시한 농담들을 하고, 모차르트의 경우엔, 생활에 책임감도 없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깊이가, 환상의 세계가, 화음이, 멜로디가 그리고 감정이 이 가망없는 외양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는 악보에 고친 흔적이 없는 모차르트의 자필악보를 보자, "기적이야"라고 말했다. 이런 묘사도 역시 올바른 것이 아니다. 그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모차르트는 비범한 속도로 곡을 써나가는 재능이 있었지만, 잘못 시작된 부분과 1-2년에 걸쳐서 작곡이 진행 중이었던 곡들이 꽤 많이 있었다. 몇몇의 작곡 스케치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런 스케치들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것들 보다 원래는 더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이든에게 헌정되어진 6개의 사중주에 관하여, 모차르트는 출판된 악보에 부친 편지에서, "사실 이 곡들은 길고 고생스러웠던 작업의 결과이다."라고 인정하고 있다. 샤퍼의 볼프강이 시카네더 (Schikaneder)에게 마술피리가 그의 "국수 (역주: 머리)"에 들어 있고 단지 적어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절반도 진실이 아니다. 확실히, 곡의 개념과 작곡의 상당부분은 이미 형성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표들을 종이에 적는 행동은 분명히 변화를 야기한다. 오페라의 경우에는, 리허설이 시작되고 나면, 드라마와 배역들을 위하여 온갖 종류의 수정이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샤퍼가 아마데우스에서 보여준 18세가 오페라에 대한 생각은 몇몇의 경우에서는 정확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역사적 사실을 잘못 전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오페라를 만드는 것은 주제의 선정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시인이 고용되어 가사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작곡가가 선임되어 이미 선정된 가수들에 맞게 아리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미 완성된 오페라를 궁정에서 연주하는 것은 정확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아마데우스에서 궁정 오페라의 감독인 프란츠 자버 오르시니-로젠버그 (Franz Xaver Orsini-Rosenberg)는, 모차르트가 주제넘게도 이미 무대에 올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던 대본 - 이 경우에는 피가로 - 을 선택한 것을 놀라워 하는데 이는 정상적인 관례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아마데우스는 또한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이 터키식이고 하렘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특별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배경은 특이한 것이 아니었고, 사실 모차르트는 이전에도 자이데(Zaide)로 알려진 작품에서 비슷한 장소를 선정하여 작업한 적이 있다. 모차르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려고 했을 때, 그는 오페라 부파라는 장르를 오페라 세리아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마치 오페라 부파가 요세프 2세와 빈 사람들에게 전혀 친숙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었다. 이것도 역시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오페라 부파는 비인의 극장들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상연되었었다. 그가 "헤라클레스" (오페라 세리아에서 등장인물의 전형)의 엄격함을 "이발사" (즉, 피가로)의 코믹한 가벼움에 비교할 때, 그는 "이발사"가 훨씬 더 호소력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것은 파이지엘로(Paisiello)의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성공한 이후로 이미 빈의 청중들에게 인지되어 있는 사실이었는데, 피가로의 결혼은 그 속편이었다. 오페라 세리아는 1780년대에 죽은 장르로 알려져 있다. 모차르트의 입에서 나오는 말처럼 하자면, 그것은 "대리석 똥"이었다.

오페라 세리아에 관한 그러한 생각은, 새로운 장르인 오페라 부파의 첫번째 독일인 대가로서 모차르트의 역사적 위상을 높이려는 독일의 음악학자들에 쓸데없는 시도에 의하여 생겨났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 역시 오페라 세리아 였다. 티토왕의 자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작곡가들인 마이어, 로시니, 도니제티, 벨리니 그리고 베르디에 의하여 대표되는 이 장르의 후대 작곡가들의 대중적인 인기가 증명하듯이 오페라 세리아는 19세기까지 계속 살아 숨쉬고 있었다.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는 황제에게 피가로의 위대한 피날레에 대하여, 길이와, 레시타티브가 없는 점, 이중창에서 전체 배역으로 확장되는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새로운 아이디어인 것처럼 설명한다. 사실, 이것은 작사가인 로렌조 다 폰테 (Lorenzo da Ponte)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나, 다 폰테는 청중들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이렇게 쓴 것이며 이런 설정의 드라마틱한 생동감과는 관계없이 그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었다. 심지어 피가로에 대한 관객의 반응도 영화의 의도를 위하여 바뀌어 졌는데, 아마데우스에서는 이것을 실패로 그렸다. 사실은, 황제는 이미 길어진 오페라의 공연이 결말없이 계속 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앙콜을 금지시켜야만 할 지경이었다. 

마지막으로, 오페라 공연이 진행되는 방법 자체에 대하여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둘 다 오늘날 청중들이 익숙해져 있는 방법으로 오페라를 지휘했다. 그것은 18세기의 사실에는 맞지 않는다. 지휘의 책임은 오케스트라를 책임지고 있는 악장과, 성악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며 오케스트라 음악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건반악기 연주자로 양분되어 있었다. 오페라의 첫 몇 번 정도의 공연에는 작곡가가 하프시코드나 포르테피아노를 연주하면서 가수들을 향해 약간씩 제스쳐를 써가면서 지시를 하기도 했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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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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