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30일 화요일

更新 - 갱신과 경신

요즘 유가는 계속 오르고, 환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주가는 무슨 이유인지 또 계속 오르고 있다. 그래서 경제뉴스에서는 경신, 또는 갱신이라는 말이 연일 나오고 있는데, 이걸 경신으로 읽어야 하는지 갱신으로 읽어야 하는지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옛날옛날 학교에서 배웠는데 말이다...ㅡㅜ

그래서 네이버 국어 사전의 도움을 받아봤다.

갱신



경신


즉, 주가, 유가, 환율 등의 경제지표에는 갱신이 아니라 경신을 써야 하고, 운전면허증이나, 임대차계약을 바꿀 때에는 갱신을 써야 한다는 것... 그런데 왜 같은 한자를 두 가지로 읽어야 하는 걸까?

[공연] 엠마 커크비, 야콥 린드베리 2007.10.28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어찌하여 마지막에 표를 한 장 더 구할 수 있었다. 도윤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지윤이와 같이 공연을 보면 가능할 것 같았다. 비록 자리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괜찮을 것 같았다. 공연이 시작되고 전반부가 끝날 때까지 나는 뒷쪽 자리에 지윤이는 내가 원래 예매했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인터미션에 지윤이 뒷자리의 여자분이 오더니 자리를 양보해 주시겠다고 한다. 정말 괜찮다고 했지만, 아이가 혼자 앉아 있는 모습이 영 마음에 걸리시나 보다...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는데... 거절하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그 분 덕에 후반부는 지윤이와 바로 앞뒤에 앉아서 공연을 볼 수 있었고, 무대에서 보다 가까운 좋은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사람이 무척 많았다. 거의 매진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크로스오버 성악을 하는 임형주던가.. 그런 사람도 보였고... 몇 시간 전에 영산아트홀에서 연주했던 존 버트도 보였다. 시간이 되자 커크비와 린드베리가 나왔다. 10현류트인 것으로 보이는 류트를 들고 나온 린드베리와 커크비가 잠깐 마주보더니 바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올페우스 - 다울랜드와 퍼셀. 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는 연주회. 그들은 전반부에 다울랜드의 서정적인 곡들을 연주했다. 한 두곡을 빼고는 모두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곡들인 것 같았다. 제목과 간략한 곡 해설이 프로그램 책자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성악 연주회에 가사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중간에 류트 솔로가 두 곡 정도 들어가 있었다. 엠마 커크비는 음반에서 듣던 것처럼 바로 그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했고, 중간의 몇 곡은 일어서서 마치 오페라를 하는 것 처럼 제스처를 쓰며 노래했다. 후반부는 퍼셀의 곡들. 다울랜드의 곡들 보다 더 귀에 익은 곡들이었다.

정말 넋을 잃고 듣고 있노라니 순식간에 공연이 끝났다. 류트도 매력적이었지만, 커크비의 목소리가 주는 흡인력이 대단했다. 정말 고음악에 맞는 목소리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창법도 일반적인 오페라나 성악가수들과는 달리 단순했다. 그것이 그녀의 음악을 청아하게 들리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은 열광했고, 류트와 소프라노의 듀오는 앵콜을 3곡 들려주었다. An Evening Hymn을 부르겠다고 이야기했을 때에는 관객석에서는 기쁨의 탄성이 나왔었다. 숨쉬기 힘들 정도로 연주에 집중하고... 이어지는 Farewell unkind, farewell은 본 연주보다 앵콜이 더 좋았다^^

30일에도 엠마 커크비를 만날 수 있다. 타펠무지크에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커크비를 다시 만나는 것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긴 했지만.... 그녀의 공연이 무척 재미있는 것은 사실이다..  (불행히도 31일 공연은 오늘 티켓링크에 전화해서 취소해야만 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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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ram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7/10/29/0200000000AKR20071029143800005.HTML

[공연] 존 버트 오르간 독주회 2007.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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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바흐페스티벌의 일환이었던 연주회. 1960년생이라는 존 버트는 무대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무슨 이야길 하는가 했더니, 오늘 연주할 곡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영국 영어로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렉쳐를 할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했던 지라 상당히 놀랐었다. 내용은, 프로그램 책자에 쓰여 있던, 버트 본인이 작성한 내용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버트는, learner, teacher, performer, composer로서의 바흐의 모습을 발견해 보라는 말로 설명을 마치고는 오르간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영산아트홀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 것은 보았지만, 그 오르간이 연주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파이프오르간은 교회 이외의 장소에선 직접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교회가 아니어서 그런지, 울림은 덜한 듯 했다. 지금까지 바흐페스티벌의 고음악 공연에서 상대적으로 음량이 적은 악기들만 듣다가 갑자기 큰 오르간 소릴 들으니... 오르간이 매우 현대적인 악기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버트는 다양한 오르간의 음색을 보여줬다. 곡마다, 또 악장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오르간의 음색은 오르간이라는 악길 잘 모르는 내게는 마치 신기한 전자악기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다. 바흐의 오르간 곡들은... 오르간이야 말로 바흐가 그가 가진 재능을 남김없이 보여줄 수 있었던 악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도 만들었다. 내가 앉은 2층 윗쪽 좌석에서는 버트의 손가락과 건반이 너무나 잘 보였는데, 오른손과 왼손 그리고 발로 연주되는 부분들이 각기 다른 3개의 악기가 연주되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거이상 화려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한 곡부터 매우 성스럽게 느껴지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곡들까지... 약 1시간 반동안의 연주회에 불과했지만, 버트는 바흐의 오르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연주될 수 있는지, 어떻게 연주되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이어지는 박수와 환호에 버트는 두 곡의 앵콜을 더 연주했는데, 역시 어떤 곡인지 설명을 해주었다. 첫 곡은 프렐류디엄과 푸가. 작품번호까지 또박또박 불러 주었다. 두번째 곡은.. the piece I am able to play is the 1st movement of 5th sonata, C major again이라고 말해 주었다. 두번째 곡이 더 좋았다.

악기 탓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버트가 BWV594의 카덴차부분을 연주할 때 손가락이 건반을 건드리는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렸었다. 내가 너무 악기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버트가 발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버트의 구두는 어떤 것일까도 궁금했던 것 중의 하나였다^^ 또, 잘은 모르겠지만, 그는 매우 신사적이고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일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친절한 설명들도 그랬지만, 페이저터너가 악보를 넘길 때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하거나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하는 모습도 그런 느낌이 들게 했다.

원래 연주회 티켓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거나, 예매를 취소하려고 했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가 끝나고 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세종 체임버홀에서의 저녁연주회엘 갔었는데, 그 곳에 버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첫번째 열의 끝쪽에 앉아 진지하게 엠마커크비와 린드벨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싸인을 받을 걸 그랬나.. 살짝 후회가 들기도 한다^^


Program

2007년 10월 28일 일요일

정기연주회를 앞두고 다녀온 뮤직캠프

원래 2박 3일의 일정으로 계획되어 있던 뮤직캠프이지만, 금요일 퇴근 후 출발해서 일요일 낮에야 돌아오는 그 일정은 나에게는 아무래도 무리여서, 나는 토요일 아침 일찍 떠나서 밤에 연습이 끝나면 돌아오는 편을 선택했다.

토요일 아침이라 길에 차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7시50분에 다른 단원 두 분을 같이 태우고 출발했는데... 생각보다 길이 많이 막혔다. 알고 보니 이번 주에 단풍 놀이객이 엄청났다고 한다. 그 많은 단풍차량 덕에 우리는 예정된 연습시간 보다 1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10시 경부터 시작하여... 브루흐 연습 약 1시간 가량. 드보르작 1, 2 악장을 점심 전까지. 점심먹고 조금 쉰 후, 파트연습 2시간 - 역시 드보르작. 4시부터 다시 드보르작 3, 4악장. 6시에 저녁을 먹고 또 약 1시간 쉰 후, 단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앙상블의 작은 연주회. 8시부터 다시 드보르작 전악장을 연주. 앵콜곡으로 예정된 슬라브 무곡 악보를 받고 약 9시반까지 연습.

11시정도까지 연습을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관 파트분들의 입술이 부르터서 더이상 연습이 곤란하다고 하여 생각보다 일찍 연습을 종료했다. 프로그램 곡 중 하나인 핀란디아는 아예 해보지도 못했는데, 아마 다음날 아침에 연습을 했을 것 같다.

드보르작에 집중한 하루... 결론적으로는... 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할 것인가는 부분은 그동안의 연습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설명도 되고 이해도 되었으나... 개인적인 테크닉도 부족하고, 연습도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혼자 연습할 시간도 부족하고, 집중도 잘 안되는데 이렇게 모여서 같이 연습하니 도움이 많이 된다... (연주회날까지 안까먹어야 할텐데..)

뮤직캠프 장소인 베어스타운에는 처음 가봤는데, 오래된 콘도라 시설은 별로 좋진 않았지만, 손님들이 많지 않아 오케스트라 뮤직캠프 장소로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여러가지 준비한 기획님이 고생을 많이 했을 듯... 음악을 사랑하고,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었다. 싱글이었다면 전 일정동안 같이 지내면서 사람들과도 좀 가까와지면 좋았을 텐데... 조금은 아쉬웠다.

아빠의 사진기와 트랜지스터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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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오빠가 언제인지 찍어놓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진을 보니 옛날 아빠가 가지고 계시던 것이 생각났다. 물론 가운데 있는 니콘은 아빠 것은 아니고... 작은 오빠 카메라던가..?

[공연] 피에르 앙타이 쳄발로 독주회 2007. 10. 26

바흐 페스티벌 공연 중 두번째 관람. 뛰어난 하프시코드 연주자 피에르 앙타이가 온다는 소식에 예매를 안할 수가 없었다. 원래는 27일 공연을 보려고 했으나, 뮤직캠프 때문에 26일 표를 예매했던 어느 분과 표를 교환했다. 사실 프로그램 자체는 26일 것에 더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잘 된 일이었다. 바흐까지 건반악기의 역사적 흐름을 훑는 듯한 곡들로 구성되어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하프시코드 연주는 종종 봤지만, 늘 오케스트라 또는 실내악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되는 것이 었기 때무네, 하프시코드만의 독주회는 처음이었다. 작은 홀, 가까이에서 하프시코드의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실 악기는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고, 홀이 작았슴에도 불구하고 악기의 소리가 별로 크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프시코드는 소리도 작고, 역시 강약의 구별이 두드러지지 않는... 그리고 단조로운 음색을 가지고 있는 악기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 악기가 독주악기로 쓰이는 음악들보다는 오케스트라와 어우러 지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세상에는 하프시코드가 들어가면 100배쯤 아름답게 들리는 관현악곡들이 잔뜩있다. 그러나, 역시 독주만으로는 지나치게 단조롭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앙타이는 이 악기가 매우 흥미로운 연주를 들려 줄 수 있는 악기라는 생각이 드는 연주들을 들려 주었다. 그의 연주는 영국의 오래된 작곡가들의 곡으로 시작되었는데, 그 오래된 음악들은 화려한 장식음들이 고풍스러운 선율과 어우러지면서 그의 손가락을 통해 신선한 느낌을 주는 현대의 연주로 바뀌어 지고 있었다. 쿠퍼랭의 곡은 얼마 전 타로의 연주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같은 프랑스 사람인데, 앙타이의 쿠퍼랭은 몰랑했던 타로의 쿠퍼랭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느낌을 주는 음악이었다.

그가 쉬지 않고 8곡이나 연주한 스카를라띠의 소나타는 (물론 단악장으로 구성된 짧은 곡들이긴 하지만) 음반을 구입하고, 악보를 읽고 싶은 생각이 드는 흥미로운 연주였다. 빠르고 화려한 곡들이 나오는가 하면 느리고 서정적인 곡이 나왔고, 특히 마지막 소나타는 불협화음이 놀랄만큼 많이 쓰여서 굉장히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이어지는 이탈리안 콘체르토도 생동감이 넘치는 연주였다.

앙타이는 예정된 프로그램의 전반부에 바흐의 푸가와 프렐류드를 더했고, 후반부엔 5개를 연주하기로 했던 스카를라띠는 8곡을 연주했으며, 이어지는 박수에 앵콜을 3곡이나 연주했다. 7시반에 시작된 연주회를 마치고 나오니 10시. 독주회로는 이례적으로 긴 연주회였다.

앙타이는 의자에 상당히 어정쩡하게 앉아서 연주했고, 무대에서 인사를 할 때에는 약간 삐딱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실... 7시반 연주회인데 5분전에서야 관객들을 홀로 입장시켰고, 들어가서는 방송멘트 뿐 아니라 직접 관계자가 나와서 전화기 등 소음을 내지 말라고 부탁을 여러번 했었으며, 연주는 관객들이 모두 자리에 앉은 후에도 한참이나 지나서야 시작되었다. 조명기사가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앙타이의 요구가 까다로왔는지 모르겠지만, 홀의 조명은 전반부 내내 왔다갔다 했고, 프로그램에 바흐가 추가되었는데도 불을 환하게 켜 버려서 앙타이가 바로 연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모든 일들이 무엇때문에 벌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주를 듣는 동안 앙타이가 까칠한 것인지 아니면 공연장 측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주 궁금했었다.

인터미션 때 무대로 가까이 가서 악기를 좀 봐야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나는 인터미션이 시작되자마자 홀 밖으로 나와 버렸다...;; 나왔다가 다시 제정신이 들어 다시 홀로 들어갔는데, 앙타이는 도로 무대로 나와 열심히 튜닝을 하고 있었다. 그가 가져온 악기인지, 국내에 있는 악기를 빌린 것인지... 한 음 한음 튜닝을 하고 있는데, 그 쪽으로 다가가서 악기 구경을 하기는 좀 민망해서 그냥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인터미션에 자리에 남아 있던 관객들은 그의 튜닝하는 모습이 신기했는지, 사진을 찍어 대기 시작했다.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는 한 두장 쯤은 이해를 할 수 있겠는데... 플래쉬가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하자... 정말 짜증이 났다. 어떻게 튜닝하는데 저렇게 할 수가 있나 싶은 생각에 공연장 관리자에게 이야기를 할까 생각하던 차에... 입구에 서있던 아가씨가 들어와 제지를 하기 시작했다.

앙타이는 스카를라띠 소나타 마지막 곡을 연주하기 전에 잠깐 한 두 음을 다시 튜닝했다. 보고 있노라니.. 하프시코드 튜닝에 대해 좀 알아 보고 싶어졌다....

또 한 가지 재미있었던 점은 앙타이의 악보.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암보로 연주하고, 일부는 악보를 가지고 나와서 연주를 하기도 하지만, 소위 '클리어 파일'이라고 불리우는 비닐로 된 파일에 악보를 넣어서 들고 나오는 연주자는 처음 봤다. 사실 나는 종종 악보를 인쇄하거나 복사해서 클리어파일에 넣어 놓고 쓴다. 하지만 무대에 그런 악보를 들고 나가면 조명 때문에 상당히 보기가 어렵게 될 것 같다.. (앗... 그러고 보니, 그래서 홀 조명이 그렇게 왔다갔다 했던 걸까? 앙타이는 악기에 별도의 조명도 부착했던데...;;;) 또 보통 연주자들은 인쇄되어 나온 책을 쓰기 때문에 그런 파일을 이용하는 것인 좀 특이해 보이기도 했다.  특별히 최근에 출판되어진 악보를 쓰는 것이 아닌 이상에는 저작권에 문제가 없을 것 같긴 하지만... 하여간 특이했다.

Pro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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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menico Scarlatti (1685-1757), Sonatas K535 and K371
<-- 동영상을 가장한 음악파일

(유튜브에는 앙타이의 유명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가 올라와 있기도 하다. )

관련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0/29/2007102900025.html (다음날이었던 세종체임버홀에서의 공연에 관한 기사와 사진)

2007년 10월 26일 금요일

[번역] 예외들의 초상: 난넬 모차르트, 파니 멘델스존, 클라라 슈만

Portraits of Anomaly:
Nannerl Mozart, Fanny Mendelssohn, Clara Schumann

Connie Sunday © 2006
(Women's Studies essay on the lives of three eminent women in music)
"여성의 교육은 항상 남성에 상대적인 것이어야 한다. 즐겁게하고, 우리에게 유용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게 만들어야 하고, 어린시절에 우리를 교육해야 하고, 성장했을 때는 우리를 돌보아야 하며, 충고하고, 위로하고, 우리의 삶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것 -- 이것이 전 시대를 통틀어 여성의 의무인 것이고 그들이 유년기에 배워야 할 것들이다" 루소

"100명의 훌륭한 여성 작곡가들 중에서, 합리적이고 좋은 아내, 세심하고 유능한 주부, 그리고 사려깊은 어머니로서의 모든 의무를 동시에 만족시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어렵다." 요한 캠페 (Johann Campe)


우리들의 문화를 점검하고 성 정체성에 대하여 비교 문명적인 비교를 하면, 우리는 이제, 약 10년전까지는 남성의 편견이 거의 모든 질서의 문헌들을 "특징지우고" 있었슴을 알 수 있다. 특정한 극도로 비정상적인 예외들을 제외하고는, 여성은 가족 구성원을 생산해낸다는 기능으로 말미암아, 핵가족 안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온실" 그리고 집안의 영역의 존재로 격하되어 왔었다. 남성들은 문화의 지배자들이었고, 남성적인 세계관이 압도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주변의 인물로 보여졌으며, 남성들이 대표하고 있는 체제에는 위협이었다. 권력은 남성의 손에 있었고 여성은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교육을 받았다. 이 글에서, 나는 3명의 예술가들이 어떻게 그들의 인생 궤도를 통하여 사회적인 편견이라는 쉽지 않은 바다에서 어떻게 항해했었나 하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것이다.

여성들은 중세시대부터 작곡을 해왔으나,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언론의 인정과 더 많은 청중과 더불어 여성음악가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남성과 관련이 있었던 영역에서 여성이 가장 많은 참여도를 보여 준것은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인 조류가 가져다 준 결과이며 특히 피아노의 발명의 결과이기도 하다. 솔로와 실내악 작품 (특히, 가곡 또는 노래)의 분위기는 여성들이 연주자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집안이라는 공간과 편안하게잘 맞았다. 이는 큰 규모의 작품이 연주되던 공공장소의 경우와 대조적인데, 그 곳에서 오페라, 종교음악, 관현악 음악들은 점잖은 여성들에게는 금지되어졌었다. 19세기의 여성의 창조적인 성취 - 주로 가곡에서 - 는 남성 작곡가들과 비교하여도 우수한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몇몇의 작품들은 이 시기 최고의 작곡가들에 필적할 만하다.

여성들은 직업적으로 자리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어떤 여성도 바흐가 했던 역할을, 정기적으로 종교의식에 사용되는 작품을 작곡해야 하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성 바흐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현대의 음악학에서는 전통적인 주류에서 여성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것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음악학의 본성이 문헌들 (여성들의 음악에 대한 문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나, 가장 진보적이고 음악 유형의 변화를 이끌어갔던 예술가들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인데, 그 곳에서 (금세기까지) 여성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적인 편견은 1750년 -1900년까지 여성음악천재가 결핍되어 있었던 이유의 중심적인 요소이다. 18세기에는, 여성들은 배울 수 있는 지적, 감정적인 역량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여성이 지식을 획득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며 여성으로서의 진실한 직업인 아내와 엄마의 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믿어졌었다. 모세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은 그 시대에 계몽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으로 생각되어졌지만, 그의 약혼녀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적당히 배우는 것은 숙녀를 만들지만, 학자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눈이 충혈될 정도로 독서를 하는 소녀는 웃음거리가 되어 마땅하지요."

여성들은 에스코트없이 돌아다니는 것이 허락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주회를 여는 것은 어린 소녀의 품행이나, 성격에 위해가 된다고 생각되어졌다. 이는 소녀들이, 명성을 얻기 위하여 필수적인, 도움을 줄 수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파니 멘델스존은 19세기초에 가장 지적이고 문화적으로 재능이 있는 가문들 중의 하나에서 태어났지만, 그녀가 32세가 될 때까지 대중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작곡은 출판되지만 않는다면 더 많은 대중들의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여성들은 그들의 작곡을 과소평가하였고, 계속하기 위하여는 과도할 만큼 칭찬을 받아야만 했다.

여성들의 활동범위와 성취가 집안일로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업적인 교육은 부족했다. 여성이 교육을 받을 때에는, 높은 수준의 교육과 부정적인 사회의 태도 사이에 날카로운 불일치가 있었다. 여성의 일은 전문가의 눈에는 유감스러운 것이었다. 여성이라는 것은 아마추어라는 것을 뜻했고, 딜레땅띠즘의 분위기가 여성들의 작품에 대한 토론에는 항상 함께했다. 여성들은 그들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을 감정적으로 보조하는 것이나 집안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순화시켜야만 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거나 매력적인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양보해야만 했던 것이 전체 여성들에게 맞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여성이 스스로를 부양하려는 필요는 여성의 일에 대한 권리와 직업을 가질 권리의 문제를 경제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변화되었다.
 
19세기 중에는 충분히 교육받은 소녀들이 여성스러운 부분을 담당하도록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희곡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그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와 18세기의 새로운 운동 중의 하나는 소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여성 음악학도들은 집에서 개인교습을 받거나 또는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고 수녀가 되곤 했다.) 여성들은 가톨릭 학교에서 공부하거나, 거장음악기들 밑에서 도제수업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이같은 사정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여성들은, 주로 가수들인데, 하층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었다.

Nannerl Mozart모차르트에 대한 기록에서는 어떤 것도 그의 능력있는 누이인, 난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난넬은 어린 천재 남동생과 그들의 부모와 같이 3번의 유럽 순회연주에 동반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여행기록에서는 항상 재능있는 누이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소녀 난넬의 재능은 보통은 기록되어져 있다. 그녀가 부모와 남동생과 함께 했던, 런던과 파리를 포함했던 3번째 서유럽 여행에서 (1766년까지 계속되었다), 프리드리히 마이콰이어 그림(Friedrich Meichoir Grimm) 남작은 그녀가 피아노를 뛰어나게 연주하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어려운 작품들을 놀랍게 정확하게 연주한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남동생에 결코 못지 않은 초기의 재능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로브 음악사전의 다음의 비극적 문장은 사람들의 감적을 자극한다: "1769년부터, 난넬은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오로지 집에서만 보여주도록 허락받았다." 그녀는 18세였다. 그녀의 남동생이 작곡가와 연주의 거장으로 해외에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그녀는 어머니와 같이 잘츠부르크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33세였을때 그녀는 성 길간 (St. Gilgan)의 판사와 결혼했다. 세 아이를 낳고, 남편이 사망한 후에, 그녀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 피아노 선생으로서 단순하고 평온한 인생을 살았다. 사람들은 위대한 모차르트의 누이에 대해 연구하고 싶어했다. 1839년, 그녀가 사망하던 해에 그녀는 가난과 외로움으로 눈이 멀고, 기운이 없었고, 지쳤으며, 약해져서 거의 말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작곡에 손을 대었고 그 작품들은 남동생이 인정할 만한 것들이었으나, 그녀의 작품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역 그녀가 진실로 그녀의 유명한 남동생만큼 능력이 있었다면 난넬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 아마 모든 시대를 통틀어 뛰어난 음악천재가 되었을까? 남매는 각자 결혼을 할 때까지 가깝게 지냈고 그녀의 일기와 편지는 모차르트 가족에 대한 연구의 중요한 문헌들인데, (이러한 난넬의 삶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손실이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파니 멘델스존은 이러한 Fanny Mendelssohn궤도에서 좀 더 발전된 예인데, 그의 남동생에 필적할 만한 음악적 재능을 일찌기 보여 주었고, 동생처럼 베르거(Berger)와 젤터(Zelter)에게서 피아노와 음악이론을 배웠는데, 그 때 그녀는 남동생과 동등한 수준이었다고 알려진다. 옥스포드 사전은 그녀를 두 번 모욕했는데, 한 번은 그녀가 "거의 그녀의 남동생만큼이나 훌륭한 피아니스트"라고 언급했었고, 또 그녀를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라고 칭했었다.

파니 멘델스존은 직업적인 음악가가 되는데 반대하는 그녀의 아버지의 완고한 훈계와 그녀가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집안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작곡을 계속했다. 펠릭스는 그녀를 작곡가로서 호의적으로 평가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에 중심적인 역할을 했었으나, 그런 재능을 가진 사람의 남동생이라는 것을 그는 자랑스러워 했으나, 전반적으로 지지하지 않게 되면서 더이상 자랑스러워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진지한 작품의 출판만을 고려해요... 그리고 인생 전부를 작가로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파니는.... 작가를 하고 싶어하지고 않고, 천직으로 삼으려고도 하지 않아요. 그녀는 그런 면에서 너무나 여성적인데, 그것은 적절한 것이지요. 그녀는 가정을 돌보고 있으며, 우선적인 주부로서의 일을 하고 나서가 아니면 대중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음악세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출판을 한다는 것은 그녀가 이러한 책임을 수행하는 것을 방해할 뿐이고, 저는 이런 점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만약 그녀가 스스로 출판하기로 결정하거나, 또는 헨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말했듯이, 저는 가능한한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제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떤 것을 하도록 그녀를 격려하는 것은 제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파니는 포괄적인 교육을 통하여 세상에 대한 깊이 있고 통찰력있는 이해를 가질 수 있었으나, 그리고 나서는 교육받은 것을 실행하고 바로 그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인당했다. 아브라함 멘델스존은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에게 음악은 장식일 뿐이고 그래야만 한다. 너는 진정한 너의 천직 - 젊은 여성들에게는 유일한 천직 -을 위하여 성실히 열심히 준비해야만 한단다.  그것은 가정주부가 되는 것이란다." 펠릭스의 승인과 지지로 그녀는 작곡한 200곡이 훨씬 넘는 의 리트를 출판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반복적으로 그녀가 직업적인 작곡가가 되는 것이나 그녀의 작품을 출판하는 것을 반대했다. 여성 리트 작곡가들 대부분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1775년에서 1850년까지 이루어 낸 업적은 훌륭하고 존경받을만 하며 진지한 학구적인 연구, 출판 그리고 연주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녀가 24세에 화가인 헨젤과 결혼했을 때, 펠릭스는 이미 작곡가와 지휘자로서의 길을 전도양양하게 시작한 후 였다. 그녀는 남동생의 성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지만 그녀의 삶은 "집에서의" 음악에 바쳐져야만 했다. 일요일에 베를린에서 가족들과 음악회를 하는 것이 고립되어 음악을 하던 그녀에게 단 하나의 출구였고, 그녀는 스스로의 작품들을 작곡하고 지휘할 수 있었다. 빌헬름 헨젤은 그녀를 격려하였으나, 펠릭스는 작품이 출판되어 알려지기를 바라는 누이의 희망과, 제한적으로 대중들을 접하는 것이 그녀의 작품과 자존심에 미칠 영향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창작품에 대하여 아무도 의견을 내지 않거나 아주 조금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그 작품들에 대한 모든 기쁨 뿐만 아니라 그 작품들의 가치를 판단할 힘까지도 잃게 된다."
파니의 초기 작품들 중 3곡은 펠릭스의 Op.8과 9에 포함되어서 출판되어졌는데, 그녀가 작곡한 이중창은 그 모음곡 중에서 최고의 것이었다("An des lust-gen Brunnes Rand"). 이 초기 작품들은 남동생의 작품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개성적인 특징과 표현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녀는 하나의 서곡과 5개의 오케스트라 부분을 포함하는 성악곡도 작곡하였다. 그녀의 작품 대다수는, 대규모의 칸타타들과 오라토리오를 포함하여, 출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작곡가들과 연주자들은 감상적인 살롱음악과 요점없는 기교만 있는 음악의 양극단을 피하기 위하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중 이런 노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두 명이 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이었다.

Clara Schumann클라라 비이크 슈만은 그 세기에 가장 위대한 재능을 가졌던 사람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초기에 그녀에게 일어났었을 지도 모르는 일들은 먼저 일어났던 위의 두 이야기들로 이미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클라라 슈만이 그들과 가지는 공통점은 위대한 예술가와의 관계 또는 교육이다. 모차르트가의 아이들에게는 레오폴드가 있었고, 파니는 주변의 환경이 모두 훌륭했었으며, 클라라에게는 교육자로서의 재능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녀의 아버지가 있었다.

비록 그녀의 남편 로베르트에 뮤즈의 역할을 한 것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클라라 슈만은, 당시 유럽 사회가 일반적으로 여성의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보면 두드러지는 성공을 얻었고, 그 시대의 음악에 결정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 세기의 천재적으로 위대한 음악가와 교육자의 한사람으로서 그녀는 개인적인 그리고 음악적인 영역에서 많은 혁신을 가져왔다. 그녀가 집을 떠나 모험을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심한 과소평가이다. 그녀의 남편이 사망하였을 때, 환경의 변화로 인하여 그녀는 더 많이 사회활동을 할 수 있었고, 그녀는 7명의 아이들을 부양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그녀가 9살 때 시작했었던 전문 연주가로서의 삶을 택했다.

그녀는 앞에 악보를 두지 않고 리사이틀을 했고, 보조해주는 음악가들 없이 연주를 했던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즉, 현대의 연주처럼) 그녀의 선곡과 수준은 솔로 피아노 리사이틀의 성격 자체를 변화시켰다. 그녀는 파가니니, 리스트, 탈베르그 그리고 루빈스타인의 동료였고, 그들의 존경을 받았다 - 그리고 그녀의 남편의 작품과 그녀를 사모했던 젊은 브람스의 작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홍보자였다. 그녀는 세련된 연주를 통하여 당시에 거슬리고 이해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베토벤의 음악을 대중화시켰다. 그녀의 연주회들은 매진되었었고, 그녀는 어디에서나 열렬한 환호, 따뜻한 리뷰, 선물들 그리고 존경 속에서 맞아들여졌다. 여전히 그녀는 작곡가로서의 역할을 우선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이미 로베르트가 나에게 적어준 Ruchert의 시로 (곡을 쓰려고) 몇 번 시도를 했다. 그러나 잘 되질 않았다 - 나는 작곡에는 전혀 재능이 없다."
그녀의 국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전기들에서 그녀는 자주 종속적인 - 또는 수치스러운 -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아직 본격적인 학문적인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존엄성을 얻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삶에 대한 많은 세부사항들은 얼버무려져 있고 생략되어 있으며 서신들은 요약되어져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다른 어떤 연주자도, 남자건 여자건 간에 그 만한 시간동안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유지해 온 사람은 없었는데, 그녀는 영국과 유럽에서 1,300회가 넘는 연주회에서 연주했다. 그녀의 동시대 여성들 대다수는 연주자로서의 경력을 반짝이는 데뷔와 빛나는 외모로 시작하곤 하지만, 결혼할 무렵 또는 압력이 너무 강해진다고 생각될 즈음에는 연주생활을 포기하곤 하였다. 클라라는 그녀 자신의 연주들을 관리하는 일도 떠맡았었다. 피아노들을 빌리고, 이동시키고 조율하게 했으며 홀, 조명, 난방들을 준비시켰고, 티켓을 인쇄하고 신문과 포스터에 광고를 실었으며 스스로의 의상을 준비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했고, 그녀의 특별한 재능을 교육의 덕으로 돌렸다. 1816년에, 그는 잘 알려져 있고 성공한 플루티스트의 손녀인 마리안느와 결혼했다. 그는 클라라의 어머니가 딸의 재능에 기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 적이 없으나, 그녀는 비범한 가수이자 피아니스트였다. 비이크 부부가 이혼했을 때, 클라라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기분이 좋을 때에만 아이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은 아이들은 아버지의 소유라는 색슨 법률에 따른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성공적으로 그녀를 신동으로 훈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적당한 작품, 물리적인 훈련, 연주회 관람 그리고 훌륭한 음악가들과의 만남이라는 그의 교육프로그램은 클라라의 여동생에게도 역시 사용되어졌다), 그는 그녀가 결혼하기로 결정했을 때 매우 심하게 대응했다. 그녀와 로베르트 슈만은 이 문제를 법정에까지 끌고 가야했다. 그들이 승소하여 결혼을 허락받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수입으로 된 저금을 모두 앗아가고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해야하는 그녀에게는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남편이 그녀를 사랑하고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둘 다 그녀가 그 주변의 일상적인 일들을 처리해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녀의 일기에서: "나의 역할은 로베르트가 작곡을 하고 있을때 항상 그렇듯이 밀려있는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하루에 한 시간도 낼 수가 없다."

그러나, 클라라 슈만은 피아니스트로서의 그녀 자신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7명의 아이들과 정신병동에서 생을 마감했던 남편 때문에, 그녀는 35세에 그녀의 연주활동을 재개했다. (로버트: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 냈소. 당신은 동료를 데리고 갔고, 나는 아이들과 나의 작업으로 돌아갔소.") 그녀는 그녀 자신을 먼저 예술가로 여겼고, 부모의 역할은 두번째였다. 여행 중에, 아이들은 가족의 친구들, 조부모들 또는 기숙학교에 맡겨졌다. 그녀는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편지를 썼다. 맏아이가 어느 정도 자란 후 그는 가족들의 만남(종종 여름내내)이나, 연주 여행을 주선하고, 교습약속을 잡는 일을 도맡았다. 그들의 14년간의 결혼생활동안, 그리고 8명의 아이들 (하나는 아주 어려서 죽었고, 유산이 한 번 있었다)을 낳는 동안, 서로가 화내고 싸웠다는 이야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사회적인 편견이 이들 세 명의 천재 여성들에게 가하여 져서 그들을 예외적인 위치에 놓이게 했던 각각의 상황의 종류를 이 간략한 전기글이 설명해 주었기를 바란다. 그들의 노력에는 희망적인 것이 있다. 이 삼부작에서 각각의 사람들은 그 이전의 사람들보다는 성공적이었다. 확실히 미래의 여성들은 이러한 추세를 계속해 나갈 것이고, 여성들이 사회에서 예술가로서 덜 예외적인 존재로, 더 많이 받아 들여지게 됨에 따라, 더 평등한 교육적이고 음악적인 기회의 배분으로 부터 혜택을 받을 것이다.  

주석 및 전기, 대표작품은 다음의 링크 참고:
원문 출처
또다른 출처 - pdf 다운로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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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찾아 보고 번역하려는 생각은 파니 멘델스존에 대한 DVD - Requiem for Fanny - 를 보고 나서 들었다. 20세기.. 아니 거의 20세기 후반에 이를 때까지 여성 음악가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연주가들은 종종 있었으나, 여성 작곡가는 정말 찾아 보기 어려웠다. 그래도 그 중에서 알려진 세 명의 인물이 바로 위의 난넬 모차르트, 파니 멘델스존과 클라라 슈만이었고, 나는 이 들 세명, 그리고 더 나아가 알려지지 않은 이전 시대의 여성 음악가들에 대해 알아 보고 싶어 졌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윗 글은 정말 "개론"적인 설명에 불과하다. 더 많은 연구들이 존재하고 진행 중인 것 같다. 클라라나 파니의 경우에는 곡이 남아 있어서 그녀들의 작품이 어떠했는지 알아 볼 수도 있다. (난넬의 경우에는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지만) 심지어 위키피디아에만 가도 위의 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정보들이 있다... 나중에 한 명씩 집중탐구를 해보면 재미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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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25일 목요일

테헤란밸리 오케스트라 2007 가을 정기 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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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시 : 2007년 11월 10일 (토요일), 늦은 6시

2. 장소 : 강남구 압구정동 광림교회 옆, 장천아트홀

3. 곡명 : Jean Sibelius Finlandia, Op. 26
             Max Bruch, Romance in F major for Viola and Orchestra, O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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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termi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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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vorak, Symphony No. 8 in G Major Op. 88

2007년 10월 22일 월요일

[공연] 나이젤 노스 류트 독주회 2007.10.19

 John Dowland "Earl of Derby, his Galliard"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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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바흐페스티벌의 개막공연격으로 준비되어진 공연이었다. 18일에는 바흐의 곡으로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었으나, 목요일은 오케스트라 연습을 가야하기 때문에 예매를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결국 오케스트라 연습도 못하고 해외에서 온 두 아줌마들과 더불어 저녁을 먹어야 했었다...ㅠㅠ

금요일.. 역시 저녁을 먹으러 가자는 압력에도 배째라고 하고는... 금호아트홀로 향했다. 몸살 덕분에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면서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단순하고 청아한 류트의 소리가 약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공연장으로 차를 몰았다.

노스는 처음에는 르네상스 류트를 들고 나왔다. 현의 숫자는 10현보다 많아 보였는데 15현 (8 course?)인지 잘 모르겠다. 존다울랜드와 발레, 로버트 존슨의 곡들이 류트를 타고 흘러 나왔다. 류트의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무척 아름다왔다. 인터미션에 몸살약을 사러 나갈까 했는데, 바람이 너무 차서 그냥 다시 들어왔다. 노스는 이번엔 현이 더 많이 달린 바로크 류트 (위 사진에 있는 것과 동일한 류트)를 들고 나왔다. 아마 24현 류트 (13 course)인 것 같았다. 2부의 두번째 곡인 로지 백작을 위한 똥보는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처음 듣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류트라는 악기가 그토록 감성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어지는 소나타도 정말 좋았다. 나에게는 1부의 곡보다는 2부의 곡이 더 소리도 아름다왔고 곡도 좋았다. 바흐시대의 류트곡 작곡가인 바이스의 곡들.. 단조로와 보이기만 하는 류트에서 노스는 매우 다양한 음색을 뽑아냈고, 류트는 노래하고, 반주도 하고, 다양한 화음을 보여 줄 수 있는 너무나 멋진 악기임을 증명해 주었다.

노스는 앵콜로 바흐의 첼로 모음곡 1번에 들어 있는 곡을 연주했다. 어제의 연주회가 어땠을지 짐작이 가게 하는 곡...

공연장에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었는데, 금호아트홀이 소규모의 홀이라서 그런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3번째 줄이었는데도 사람들 때문에 무대가 가려져서 가끔은 잘 보이지 않을 때고 있었다. 내 주위에는 네이버의 모 클래식 동호회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던 듯 한데... 옆엣분이 책상에 프로그램을 펼치고는 공연 내내 무언가를 계속 노트하고 있었더랬다... 뭘 적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류트의 튜닝시간에 내내 들려오던 라디오 방송 진행자의 멘트도 좀 신경이 쓰였고... (아예 안들리게 작게 하던지, 아님 다 들리게 크게 하던지...;;) 노스의 앵콜곡 종료에 딱 맞추어 울려 퍼지던 핸드폰 소리도 인상적...;;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 안좋았던 몸상태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있었던 연주회였다.

http://www.nigelnorth.com/index.html

Program

2007년 10월 21일 일요일

[책] 더 나은 삶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 - 오래된 정원

이 책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상하권 두권을 사왔었다. 그러니 이 책들은 꽤 오랫동안 우리 집 책장에 꽂혀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거의 7년간 나는 이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제목이 무엇이건 내용이 무엇이건 나는 황석영의 소설을 읽고 싶지 않았다. 그의 글은 1987년, 내가 고3이던 그해 여름부터 긴 시간 동안 나를 지배했다. 80년 5월 광주항쟁의 기록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고 나서 부터 였다.

고3 때 읽었던 황석영의 광주기록과 이어 읽게 되었던 전태일평전으로 나는 당시가 얼마나 어두웠던 시대였다는 것을 알았고... 그 해 6월의 길거리에서 항쟁을 눈으로 보았었고.. 그 해 겨울엔 이미 선거가 얼마나 민중을 배신할 수 있는 사기놀음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었다. 80년대의 막바지에 대학에 입학하게 되어 88년부터... 89년 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그 시대의 싸움꾼들과 만났었다. 편안하게 성장했었던 나에게 대학생활과 내가 자의로 타의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 책들, 사건들은 충격을 넘어서 상처가 되었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길게 가지 않았었다. 지금도 그렇게 불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중앙도서관과 대학본부 사이의 아크로폴리스에서 89년 11월에 힘차게 울려 퍼졌던 감동적인 인터내셔널가는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노래였다.

그 시절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오현우가 갇혀서 보낸 18년. 한윤희가 밖에서 보낸 또 그만큼의 세월만큼이, 아니 그 보다 더 긴 세월이 흘렀나 보다. 이 책이 처음 집에 왔을 때는 여전히 상처가 아파서 건드리고 싶지 않았었고... 또 아파할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고 힘들고 그랬었기도 했다. 그러다가는 잊어 버렸다.

며칠전 인터넷에서 오래된 정원이 영화로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를 보고는 영화를 찾아서 봤다. 별다른 생각없이, 아마 영화는 책보다 가볍겠지 하면서... 본, 이 영화는 지진희의 어색한 연기와 염정아와 감독의 지나친 표현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책을 다시 찾아서 이제는 읽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는 내가 알고 있는 황석영의 작품은 아니었고, 어딘지 모를 어설픔이 가득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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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왼쪽을 향한 옆얼굴 (자화상) 1938

책을 다 읽고 나니 임상수 감독이 원작을, 내가 읽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독해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긴 소설을 겨우 한 두 시간의 영상으로 옮겨 놓는 것에는 무리가 있겠지만... 나는 영화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더이상 하지 않으련다.

나는 오현우도, 송영태도 더구나 최미경 보다는 한윤희 쪽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상대적인 비교가 되겠지만... 실제로 그 당시에, 넌 너무 리버럴해...라던가, 2호선만 타지 말고 1호선도 타보지 그래...라는 말 따위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도 오래된 정원의 등장인물들처럼 살 지는 못했었다. 70년대 학번과 80년대 학번의 차이인가? 그들은 아주 쉽게 자신의 20대를 넘어섰던 것 처럼 보인다. 물론 다들 힘들었던 면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또 정말 쉽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8만원짜리 음악회에 다시는 가지 않으리라 결심했었고, 모두가 같이 듣지 못한다면 다시는 클래식을 듣지 않으리라 결심하기도 했었다. 이젠 20년 전의 일일 뿐이지만...

나는 이 소설을 정치에 대한 이야기로 읽지는 않았다. 작가의 의도도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임상수 감독이 그린 것 처럼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80년대와 90년대에 대한 이야기를, 세기가 바뀌는 시간에 종이에 적어 넣고 싶었을 것이다. 혁명은 아스라해지고, 대립은 모호해지고, 이상과 이념은 더럽혀지는 시간 속에서 담담하게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 하고 싶었을 것 같다. 나처럼 정리되지 않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황석영처럼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할 수 있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켄로치 감독의 1995년작 랜드 앤 프리덤을 본 적이 있다. 1995년에 스페인전쟁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다니... 아니 그래도 21세기보다는 스페인전쟁을 이야기하기에 더 나은 시기일지도 모르지... 1995년이라면 그러한 이야기가 적어도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1995년의 랜드앤프리덤에서는 손녀가 죽은 할아버지의 동지들과 할아버지의 무덤가에서 윌리엄 모리스의 시를 읊을 수 있었지만... 오현우는 지금 동지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러도 다만 서글플 뿐이 아니던가...

그래서 등장한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부드럽다. 2000년에 탈고한 소설답게... 80년대처럼, 90년대초반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겠지.  세상을 향해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렇게 살았었다라고 부드럽게 이야기 한다. 오현우처럼, 또 한윤희처럼, 한윤희의 동생처럼,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말 살고 있었던 사람들처럼 숨쉬고 있고, 자연스럽다.

한윤희가 독일에서 가지고 있었던 케테콜비츠의 자화상. 위에 가져다 놓은 그림 말고도 콜비츠의 자화상이 많아서 어느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 케테 콜비츠의 그림들을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이제 과연 이념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고통받는 민중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다면, 또는 어떠한 해결책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그저 가슴 한켠에 쌓아두고 지난 7년동안 이 소설을 외면했듯이, 질문 자체를 외면하면서 사는 것 밖엔 방법이 없는 것일까... 아마 사십이 넘어서도 계속 나는 이런 질문을 가끔씩 던지면서 지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그게 가장 예민했던 시기에 그 어두운 시절의 막바지에 서있어야 했었던 세대의 최소한의 의무이며 운명이 아닐까...

2007년 10월 20일 토요일

[공연] 알렉상드르 타로 피아노 독주회 200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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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에도 타로의 연주회가 있다는 소식에 얼른 예매를 했다. 장소가 예당 콘서트홀이라... 그 큰 홀이 타로의 피아노소리와 별로 맞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별 수 있나.. 이번에는 프랑스 문화축제의 일환으로 연주회가 열리는 모양이다. 연주회 전에 프랑스 문화원에서 프랑스 피아니즘에 관한 강연회가 있어서 가보려고는 했으나... 결국 시간이 되질 않았다. 연주회도 간신히 시간에 맞춰 갈 수 있었으니..

생각보다 홀에 관객들이 많았다. 작년 호암아트홀 연주회에서도 몇몇 빈 자리가 보였었는데, 이번에도 물론 빈자리는 꽤 있긴 했지만, 콘서트홀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온 듯하다. 프랑스대사관 관계자들과.. 프랑스문화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듣는 사람들도 꽤 할인을 받아서 온 모양이었다.

타로는 작년처럼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페이지 터너를 데리고 무대로 나왔다. 쿠프랭과 라벨. 그의 피아노는 여전히 유려하다. 스타인웨이에서 만들어지는 쿠프랭의 음악은 아주 오래전의 음악이 아니라 마치 현대의 뉴에이지 음악인 것 처럼 솜사탕처럼 몰랑몰랑하다. 그러나 그렇게 몰랑한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곡을 쉽게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쿠프랭의 곡이 연주하기 쉬운 건가... 그렇다기 보다는... 그의 독특한 연주법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 같다. 전혀 다른 피아노... 스타인웨이에서 빚어지는 프랑스의 향기.

인터미션이 지나고 라벨이 시작되었다. 200년이 넘는 간격을 두고 다른 시간대를 살았던 두 작곡가는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공간을 살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타로의 연주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어딘지 모르게 비슷했다. 라벨을 들으면서... 타로가 테크닉적으로도 간단히 평가할 연주자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앵콜은 쇼팽 2곡... 그리고 라모. 귀에 익은 쇼팽과 라모의 곡들은 앵콜곡으로 정말 안성맞춤.. 가슴 가득 타로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감기몸살, 회사일, 레슨 땡땡이.....그리고 네스프레소

감기몸살...
추석무렵부터 몸이 안좋더니, 어제는 정말 너무 아팠다. 오늘 아침 레슨도 못가고... 갔었어도 이번 주 내내 바이올린을 건드려 보지도 못했었기 때문에 레슨을 받을 의미가 없긴 했지만... 원래 건강체질은 아니지만, 만성적인 운동부족으로 몸이 환절기를 견뎌내지 못하는게 아닐까 싶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니 근육통과 살갗이 쓰리는 듯한 느낌은 많이 가셨지만 여전히 몸이 노곤하다.

지난 주 금요일 회사에서 행사가 있어서 홍천엘 다녀오느라 계속 운전을 하고, 늦게 오고 (원래는 자고와야 하지만 역시 땡땡이..) 이번 주엔 visitor들과 저녁을 먹어 주느라 또 며칠 늦고... 종일 미팅하고 프레젠테이션하느라 신경쓰고... 그러면서 몸살이 온 것 같다.

어제는 기다리던 나이젤 노스의 류트연주회가 있는 날이었는데, 몸이 너무 아파 하마터면 연주회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올 뻔 했다. 그래도 조용히 앉아 음악을 듣고 있으면 나름 치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픈 몸을 끌고 갔는데... 정말 가길 잘했다. 너무 멋진 연주회여서 못 갔으면 엄청 후회했을 듯 하다. 비록 음악감상이 몸살에 별 도움이 되진 않았지만 말이다.

회사일....
회사라는 곳은 항상 참 많은 일이 일어난다. 본의 아니게 여러회사에서 근무해 본 결과... 어느 회사나 다 그런 것 같다. 내가 관여되지 않아도, 이런 저런 일들이 생기는 것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참 피곤하다. 계속 그런 일들이 머리 속에 담겨 있으니... 정작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을 놓치기도 하고... 정말 비효율적이지만, 사람사는 곳이 그럴 수 밖에 없으니 어쩌랴...

레슨 땡땡이...
이번 주는 회사 일때문에 화요일 레슨도 못가고... 저녁식사에 반드시 가야 한다고 해서 목요일 오케스트라 연습도 못가고... 결국 몸이 아파 오늘 레슨도 못가고... 계속 시달리면서 정리도 안되고 해결도 안된 많은 것들이 산적해 있는 것 같은 느낌... 주말동안에는 머리 속에서 모든 것을 지우고 푹 쉬어야 하는데... 잘 될 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내내 바이올린을 꺼내 보지고 못했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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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지름신이 강림하사... 네스프레소와 에어로치노를 구입했다^^


하도 칭찬 일색이어서 대단한 기대를 했는데, 일단 무척 편리하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런데, 워낙 커피를 진하게 먹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커피가 연하다. 그래도 향이나, 맛은 대체로 좋다. 아직 종류별로 다 시음을 해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먹어본 것들은 연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괜찮았다.

에어로치노로 우유거품을 만드는 것도 재미있다. 아이들이 좋아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커피를 먹일 수는 없어서 우유거품만 줬더니 맛이 없다고 한다..;; 나중에 코코아에 우유거품을 얹어 줘봐야 겠다. 사실 나는 라떼나 카푸치노보다는 그냥 마시는 것을 훨씬 선호하기 때문에 살까 말까 많이 망설였었다. 생각해보니... 순전히 재미삼아 산 것 같기도 하다..ㅡㅡ;; 그래도 순식간에 우유거품이 생기는 걸 보니 신기하긴 하다^^

원래 가지고 있는 커피메이커가 110볼트이고, 커피 한잔을 먹기 위해서 이것 저것 꺼내야 하는 것이 귀찮았던...  게으름의 극치를 달리는 우리 부부에겐 딱 좋은 기계인 것 같기는 하다. 어차피 커피는 집에서 주말에만 마시니까... 물론 좀 더 써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2007년 10월 3일 수요일

오케스트라 연습 (2007. 9. 27) 및 레슨관련 잡담

지난 주는 추석 연휴가 있었다. 연휴 바로 다음 날은 오케스트라 연습날이었다. 악장님을 픽업해야하는데... 바로 처리해야하는 메일을 7시가 다되어서 받았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이 구제불능의 기억력... 회사 안짤리고 다니는게 정말 다행이다..ㅠㅠ) 하여간, 7시반이 다되어서야 악장님에게 전화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일은 대충 45분-50분에 끝났다. 추석 연휴에서 복귀한 사람들이 많지 않아선지 다행히 거리가 한산했다. 생각보다 빨리 연습실에 도착...

드보르작, 교향곡 8번 1악장
브루흐, 비올라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로망스


드보르작.... 간만에 하는 1악장은 역시 생소하다... 정말 매일 조금씩이라도 연습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말도 한 두번이지.. 매번 일지마다 쓰려니 이제 민망하다;;) 브루흐도 끝까지는 못했다. 그러나 물론 드보르작보다야 훨씬 낫다...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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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잡담.

추석 때도 영 몸살기운에 정신을 못 차리겠더니... 여전히 몸이 안좋았다. 금요일 저녁 레슨에선 정말 내가 생각해도 엉망진창이었다... 좌절하고 집에와서 계속 잤다..ㅡㅡ;; 토요일 아침 레슨을 자느라고 빼먹다니...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도저히 일어나서 악기를 챙겨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주말 내내 집 밖으로 한걸음도 못나간 채로 지내다가 일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조금 상황이 나아졌다.

그리고 오늘 또 레슨... 어제 나름 조금 연습을 했더니, 선생님왈..
저번에 레슨 언제 했었죠?
금요일에요..
그 때 정말 컨디션이 안좋으셨나봐요.. 오늘은 확 달라졌는데요...

제 연습이 효과를 본 건지.. 하긴 지난 주 상태가 정말 심각하긴 했었지.. 사실 오늘도 좀 잘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서 보잉에 엄청 힘이 들어가긴 했었다.

Presto까지 땡겨서 레슨 받고 싶으시면 한 번 더하구요..
그렇게 빨리는 절대 못할 것 같은데요..
본인이 연주하면서 만족하는 것도 중요하니까... 전공할 것도 아니고.. 속도 붙이다가 안되서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는 연주에서 만족감을 얻는게 더 중요하죠. 그럼 다음 곡으로 넘어갈께요.

흑... 전공할게 아닌 것은 맞고.. Presto로 땡기는 것은 내 상황에서 거의 불가능할 것 같긴 하지만... 뭔가 속이 쓰리다.. 그래도 일단 진도는 나갔으니 만족해야 하나...;; 빨리 연주하는 것이 문제다.. 늘... 정확하게 빠르게.. 둘 중 하나 밖에 안되는 것이 문제...; 더구나 혼자서는 그럭저럭인데.. 선생님 앞에선 왜 버벅이는 것인지...


[곡해설]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Op. 26

Jean Sibelius Finlandia, op. 26


핀란디아는 시벨리우스의 작품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으로 로운 세기가 도래하기 바로 직전인 1899년에 작곡되었고 1900년에 수정되어 오케스트라곡으로 완성되었다.


1899년 2월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스 2세는 핀란드공국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2월의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선언은 핀란드의 문화예술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시벨리우스도 그의 음악으로 정치적인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를 원했다. 1899년 11월, 표면적으로는 핀란드 언론인들의 연금기금 마련을 위한, 실제로는 자유언론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한 민족적 역사극의 공연을 위하여,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역사적인 장면들을 묘사하는 6곡의 표제음악과 짧은 서곡을 작곡했다. 끝에서 두번째 곡인 “Great Hate”는 러시아 정복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파괴를 보여주며 어머니 핀란드가 추위에 떨고 있는 아이들과 함께 눈보라 속에서 전쟁, 추위, 기아,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시벨리우스는 이를 위하여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어둡고 가장 고통스러운 음악을 작곡했다. Great Hate에서 이어지는 마지막 곡인 “핀란드의 각성”은 그간의 고난이 승리의 영광으로 바뀌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 곡은 스웨덴에 이어 러시아의 지배를 받으면서 독립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던 핀란드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바로 이 마지막 곡이 현재 핀란디아의 초기버전이었다.


역사극의 공연 후, 수개월 동안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로베르트 카야누스와 시벨리우스는 표제음악 중 좋은 곡들을 뽑아 핀란드에서 연주했으며, 이 모음곡의 피날레 부분을 유럽 순회공연 시에 연주하기도 하였다. 오케스트라가 파리 국제 박람회에서 이 곡의 피날레 (“핀란드의 각성”)을 연주함으로서 곡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시벨리우스는 핀란드 내에서 만의 유명세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핀란디아라는 이름은 1900년 이 표제음악의 피아노 편곡에 악셀 카펠란이 제목을 붙이면서 나오게 되었고, 핀란디아라는 이름으로 1900년 시벨리우스에 의하여 재작업된 이 곡의 오케스트라 버전은 1901년 카야누스의 헬싱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러시아의 검열 때문에 이 곡은 핀란디아라는 이름을 불리워지지 못하고 1차대전 후 핀란드의 독립이 있기 전까지는 “즉흥곡” 등 다른 이름으로 감추어져 공연되기도 하였다.

 

곡의 대부분은, 핀란드 민중들의 투쟁정신을 고취하는, 열렬하면서도 휘몰아치는 듯한 음악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끝부분으로 가면서 고요함이 오케스트라를 장악하고 장엄하게 핀란디아의 찬가가 들려온다. 종종 전통적인 민속선율이라고 잘못 인용되기도 하나, 이 찬가 부분은 시벨리우스 자신의 곡이다.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찬가의 멜로디에 가사를 붙였었는데 시벨리우스 자신은 이 곡이 원래 오케스트라 곡을 위하여 쓰여진 것이라며 불평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제 멜로디는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전세계를 위한 국가로 쓰자고 제안했을 만큼 호소력이 있는 것이었다. 핀란드에서는 1940년 코스켄니에미에 의하여 쓰여진 가사가 가장 유명하고 현재는 핀란드의 준국가처럼 불리워진다. 이 노래는 “오 핀란드여 보아라 너의 날이 밝아오는 것을, 험난한 밤의 장막은 이제 걷히었도다”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핀란디아는 곧 포르테에서 포르티시모로 커지게 되는 금관의 우울한 고난의 동기로 시작한다. 목관은 성스러운 느낌으로 답하며 현들은 더 "인간적인" 목소리를 들려 주기 시작한다. 템포는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바뀌며 금관의 팡파레는 투쟁 정신을 보여주고 알레그로의 템포는 승리의 자신감을 나타낸다. 유명한 찬가의 동기는 처음 목관으로 연주되며, 현이 이어서 찬가의 주제를 연주한다. 템포는 빨라지고 금관 팡파레가 다시 나오면서 금관이 찬가의 주제로 곡을 고조시키며 짧은 교향시는 승리를 선언하는 종결로 달려간다.

 

연주시간은 약 8분.


참고:

http://www.sibelius.fi/english/musiikki/ork_finlandia.htm

http://www.sfsymphony.org/templates/pgmnote.asp?nodeid=3772&callid=792

http://immaculatasymphony.org/past/Apr03.html

http://www.symphonypromusica.org/notes/9211.html

http://www.daytonphilharmonic.com/content.jsp?articleId=506

http://www.strathmore.org/eventstickets/calendar/programnotes.asp?id=2767

http://www.asianyouthorchestra.com/public_html/ayo%20new%20site%202/Note%20--%20Finlandia.html

http://www.kalamazoosymphony.com/concerts/2006/sibelius-notes.htm
 

2007년 10월 2일 화요일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Secret, 不能說的秘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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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친기의 누군가가 이 영화를 봤다고 하면서 피아노 배틀 장면이 나온다고 하길래... 찾아서 봤던 영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런 저런 장면이 잔뜩 나온다. 캠퍼스가 아름다운 예술학교라는 배경과 주걸륜이 전학생으로 나온다는 점은 올훼스의 창이라는 오래된 고전만화를 연상시켰고... (이자크가 전학생이었다..)

영화를 찾아 보는 계기가 되었던 피아노 배틀 장면은, 예상했던 대로 역시나 피아노의 전설이라는 영화 속에서의 장면을 연상시켰다. 물론 연주되는 곡은 달랐고.. 피아노의 전설의 장면이 훨씬 독창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둘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장면들이나... 기타 등등의 연애 장면들은.. 어디서 봤었는지도 생각이 잘 안날 정도로 진부한 설정... 그렇긴 해도 그다지 보기 힘들다거나 하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없이 보기엔 딱이다..;;)

후반부에는 샤오위의 비밀이라는 것이, 정말 많은 영화나 만화에서 소재로 쓰였던 시간여행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최근에 봤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요 소재이기도 했던...

마치 짜집기를 하여 만들어진 것 같은 영화이긴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영화는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다! 나에게 가장 큰 흥미를 불러 일으켰던 부분은 주걸륜의 피아노 연주. 주걸륜 뿐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연주하고.. 배우들도 어색하지 않게 연주장면을 연기하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음악 자체도 재미있었고... 피아노 배틀에서 쇼팽곡들을 대만식으로 변주하는 것도 흥미로왔다.

주인공인 주걸륜과 샤오위도 상당히 매력이 있었고... 그림같은 학교와 동네 배경도... 보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된 음악실의 오래된 피아노도 그렇고... 비밀의 악보와 오래된 피아노를 통해서 시간여행을 한다는 설정도... 특히 집으로 돌아갈 때는 빨리 치라는..;; 그런 환타지적인 내용이 재미를 가중시켰다^^

대만영화 뿐만 아니라 중국계 영화들을 별로 많이 보진 않았는데...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좀 시끄럽게 들린다는 점 (ㅡㅡ;;)을 제외하면 추천할 만한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