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 27일 목요일

Max Bruch, Romance in F major for Viola and Orchestra, Op. 85

막스 부르흐는 후기 낭만파의 작곡가로 분류되어 지며, 그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아름답고, 상상력이 넘치고, 고상하게 들리지만, 비평가들은 종종 그를 비주류 작곡가로 분류하곤 한다. 브루흐는 비제가 태어난 해와 같은 1838년에 쾰른에서 출생했다.

브루흐는 어린 아이 시절부터 비상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 주며 피아노를 배우고 작곡을 했다. 1852년 그는 교향곡과 현악사중주를 작곡하였는데, 그 현악사중주로 그는 푸랑크푸르트의 모차르트 재단으로 부터 장학금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1858년에는 쾰른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오페라인
Scherz, List und Rache를 작곡하였다. 그는 1861년에서 1862년 사이에 독일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들을 방문했었다. 1862년부터 64년까지 브루흐는 만하임에 거주하면서 칸타타Frithjof를 작곡했고 청중들을 열광하게 했었다. 만하임의 자리를 떠난 수 브루후는 파리와 브뤼셀을 방문했었고 1865년에는 결국 코블렌츠의 음악감독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867년, 브루흐는 Sonderhausen에서 궁정의 카펠마이스터가 되었고 1870년까지 머무르게 된다. 그 해, 브루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의 3번째 오페라인 Hermione를 작곡한다. 이 곡은 1872년 출판되었다. 1873년에서 1878년사이에, 브루흐는 뛰어난 독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누리면서 본에서 독립적으로 작업을 했다. 1881년, 그러나 그는 Julius Benedict를 이어 영국의 리버풀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지휘자로서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하지 못했던 연주자들과 잘 지내지 못하였다. 1883년 브루흐는 리버풀을 떠나 브레슬라우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그 곳에서 1890년의 시즌까지를 보내게 된다.

그해 가을 브루흐는 베를린 음대의 작곡교수로 임용되었고, 1911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을 하였고 1920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교수로서의 직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레스피기, 본 윌리암스가 그의 학생들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의심할 바 없이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g단조 (1868년작)이다. 이 작품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부터 몇가지 테크닉을 차용하는데, 이것은 악장간의 연결이나, 그리고 관습적인 관현악 전개와 이전의 협주곡의 완고한 형식으로 부터 벗어나는 점들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언급하듯이 낭만적인 전통의 정점을 대표하는 이 곡의 특징은 단선적인 선율이 쓰였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자주 연주되는 곡은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단악장 작품인 콜니드라이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히브리 멜로디에 의한 아다지오)이다. 이 사랑스러운 작품은 이질적인 민속적 그룹에서 유래한 선율적인 소재를 이용하는 그의 취향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를 유태계로 생각하지만, 브루흐가 유태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는 러시아, 스웨덴, 스코틀랜드, 켈틱 선율들을 이용하여 곡들을 쓰기도 했다. 이들 작품들과 그의 교향곡은 그다지 잘 연주되지는 않으나 가끔은 콘서트홀이나 레코딩에서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이런 경우에, 청중들은 그 아름다움과 세련된 솜씨에 놀라 매료되곤 한다.

브루흐는 자신의 작품을 고치고 또 고치는 부지런한 작곡가였으며, 그는 3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하여 200여곡의 작품을 썼다.

오늘날 브루흐는 바이올린 작품들의 작곡가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생전에 현재는 잊혀진 큰 스케일의 합창곡들 - Odysseus, Frithjof 또는 Das Lied von der Glocke 같은- 로 유명했었고 그 같은 곡들이 그에게 생전에 브람스를 능가하는 명성을 가져다 주었었다. 그는 독일의 낭만주의 전통에 따라 보수적으로 그의 작품을 구성했었고 그 스스로를 리스트나 바그너와 같은 "신음악"으로 보기 보다는 브람스와 같은 낭만적 고전주의 학파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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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는 오케스트라 앙상블에서 뻗어나가는 소리를 얻는데에 따른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서 솔로 악기로서 그다지 대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었다. 몇몇의 비평가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같은)에 따르면, 협주곡의 핵심은 비루투오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해결을 보여주는데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에 대해 비올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은 피아노나 또는 바이올린으로 하는 것보다 적합하지 않아 작곡가들은 비올라협주곡을 많이 쓰지 않아왔다. 과거에는 비올리스트들은 순위에서 밀려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그렇기 때문에 비올라 솔리스트들은 최근까지 찾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윌리엄 왈튼, 랄프 본 윌리암스, 폴 힌데미트는 새롭고 더 능력있는 비올리스트들을 위하여 비올라 솔로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들이었다. 이들 새로운 연주자들은 또한 원래는 다른 악기들을 위하여 작곡되었던 곡들을 비올라곡으로 편곡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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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브루흐 (1838 - 1920)의 이 아름다운 곡은 1911년에 작곡되었고 같은 해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작곡자는 이 곡에 Andante con moto 라고 적고, Q=69, 72라고 메트로놈의 표시도 적어 넣어놓았다.

브루흐는 이 사랑스러운 작품을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위한 첫번째 스케치를 시작한 것과 동일한 시기에 완성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보수적인 작곡가였는지 알 수 있다. 브루흐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믿을 수 없지만, 브람스 같은 부드러운 음악들도 바이로이트 야수의 새끼악마들로 여겼었다. 그의 우상은 베토벤 - 또는 비창소나타와 바이올린 협주곡의 베토벤이었으며, 후기 현악사중주곡의 미심쩍어하는 모험가인 베토벤은 아니었다. 로망스는 파리 오페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모리스 비외(Maurice Vieux)에게 헌정되어졌다. 그러나, 1911년 제국주의 베를린에서의 성난 반프랑스적인 정서로 말미암아 이 곡은 베를린 음악학교에서 부르흐와 같이 교수로 재직하던 독일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빌리 헤스 (Willy Hess)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헤스는 브루흐의 작품을 많이 초연하였었고,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 피스 Op. 84는 그에게 헌정되어 졌었다.

단순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비올라의 깊은 음역의 그윽함이 로망스에서 두드러지도록 한다. 굳건하지만 우아하게 끌어 내온 음색으로 이 작품은 자제되어지고 모든 감정적인 긴장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작곡가의 솔직하지만 충분한 반주와 완전히 융합되어 진다. 이 곡은 브루흐의 어느 다른 작품들과도 겨룰 수 있을 만한 랩소디적인 테마를 보여주고 있으며, 간절한 열망과 멜랑콜리한 풍부함을 가지고 있다. 투명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매우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러브레터라고 할 수 있다. 곡은 열정적인 웅변으로 시작하여 고요한 엔딩에 이르게 된다.

참고:
http://gbyo.com/behindthemusic.php
http://www.wooster.edu/music/twood/bruchcatalog.html#85
http://www.wooster.edu/music/twood/maxbruch.html
http://wm06.allmusic.com/cg/amg.dll?p=amg&sql=41:7108~T1
http://www.naxos.com/composerinfo/148.htm
http://www.violinman.com/Violin_Family/history/composer/biography/bruch/Bruch.htm
http://en.wikipedia.org/wiki/Max_Bruch
http://www.musicweb-international.com/classrev/2005/July05/Bruch_Fifield_book.htm
http://www.h-net.org/reviews/showrev.cgi?path=208071159992206
http://en.wikipedia.org/wiki/Viola_concer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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