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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22일 일요일

제1회 노관객 연주회 2009년 3월 21일

관객없는 연주회인데 뭐.... 라면서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긴했는데.... 막상 연주회가 다가오면서 조금씩 불안해졌다. 연습도 많이 못했고 (아마추어들이야 늘 하는 변명이지만)... 앙상블 연습날 모여 연습해보면 잘 안맞는 것 같은데다가, 나름 독주곡 준비한 것도 집에서 할 때와는 달리 버벅대기만하고... 하여간, 불안하기는 하지만, 즐거운 놀이하는 기분으로 아침 10시에 연주 장소 근처의 모 교회에서 모였다.

생판 모르는 남의 교회를 빌려서, 2시간 연습을 했는데, 연습장소가 뜻밖에 너무 울림이 좋아서... 이런 울림이 있는 장소라면 소리는 괜찮게 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밥을 먹고, 연주장소인 메종드라뮤지크로...


이건 우리가 찍은 사진은 아니고, 메종드라뮤지크 까페에 올라와 있는 사진을 퍼왔다. (사진은 많이 찍'히'긴 했는데 아직 못받았다) 전에도 여러번 봤던 사진이기는 했는데... 막상 가보니 사진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멋진 곳이었다. 연주회 생각이 싹 사라지고 이런 홀에서 매일매일 음악회하면서 살면 진짜 행복하겠다는 생각만 가득....;;

홀에서 맞춰 본다고 몇 번 해봤는데.. 영 만족스럽지가 않다. 특히 오보이스트랑은 한 번 맞춰보고 바로 연주회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인데, 막상 해보니 오보에소리도 잘 안들리고. 오보에따로 우리따로 따로국밥 연주가 되고 있었다. 게다가 꼬마 오보이스트가 다른 스케쥴이 있어서 맨 첫 순서로 우리가 연주해야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어쨌거나, 자학당 당원들이 속속 모여들고... 시작시간인 4시가 되자 아침부터 모여 있던 우리들은 이미 엄청 지치고 피곤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첫 순서로 무대로 올라가 연주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긴장이 되고 말았다. 바이올린을 할 때 긴장이 되면... 몸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에 보잉이 엉망이 된다. 가뜩이나 평소에도 소리를 크게 내지 못해서 걱정이었는데, 활이 떠서 밀착이 안되니 소리가 붕붕 뜬다..그걸 무시하지 못하고 "헉..."하고 생각하다 보니 더욱 긴장이 되고 활이 더 뜨고...;;;

가브리엘즈 오보에는 오보이스트도 떨고... 뒤에서 오보이스트의 박자에 맞추며 우리끼리 박자도 맞추다 보니 역시 예상했던 대로 따로국밥이 된 모양이다. 끝나고 내려와서도 한동안 긴장이 안 풀려서.. 지금 독주곡을 해야 하면 난 죽었다... 라는 생각만 들더라는... 희한하게도, 무대에 올라가기 전보다 연주를 시작하고 좀 지나서 그리고 끝나고 나서가 더 긴장이 되는 걸 보면, 생각했던대로 연주가 되지 않자 당황하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연주한 사람이 그 다음 차례를 제비뽑기로 정하는 식으로 연주순서가 정해지는 방식이어서, 내가 언제 나가서 연주하게 될 지 모르는 상황... 그래도 다행이 바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어서 몇 차례가 지나자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 대부분이 일찍 와서 한 번씩 반주랑 맞춰보고 했었는데, 거의 본 연주가 리허설만 못했다. 노관객이어도 긴장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인가보다. 차분하게 연주를 하던 사람들도 가끔씩 당황도 하고.

내 순서가 되니 또 긴장... 떨린다기 보다는... 몸에 들어간 긴장감을 덜어내어 보잉을 안정시키는 것이 잘 되질 않았다. 박자도 나도 모르게 급해지고... 비브라토는 경련이고..;;;;; 대강 끝내고, 세원씨 차례에 세컨으로 한 번 더 연주해 주고나서 연주회가 끝났다. 홀 옆에 있는 회의실겸 티파티룸에서 캐이터링한 식사를 하고 얘기만 들어왔던 듣던 자학당당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은하네 선생님도 만나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 앙상블과는 커피 마시고 연주에 대한 자학을 좀 하고..;;; 다음 곡을 무얼할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앙상블 규모는 당분간 늘리지 않기로 했고... (사실 바이올린 잘하시는 분이 같이하신다면 언제나 환영이기는 하지만..ㅎㅎ) 이제 솔리스트를 초빙하는 일도 안하기로 했다. 늘 같이 호흡을 맞추는 것이 아니고 갑자기 만나서 연주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 무대공포증은 별 답이 없지만... 자주 연주를 하다보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집에 와서 뒤포르의 한 회원이 찍어 놓은 내 독주곡 연주 동영상을 봤는데.... 음... 소심하기 짝이 없는 연주였다. 연주할 때도 소리가 영 힘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역시 생각했던 대로였다. 활 밀착에 문제가 있고 자신감 부족까지... 보잉연습이 확실히 많이 필요하다.

(그나저나... 연주회 다음 날인 오늘 아침에 현을 갈았다. 연주회 끝나고 줄을 갈아 주는 이 황당한 센스란...ㅡㅡ;;; 미리 사 놓은 줄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 줄을 주문할까하고 책장을 뒤져 보니 도미넌트 한 세트에 골드 e, 그리고 인펠트 한 세트가 나오더라는... 요즘 줄 값도 비싼데 돈 굳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연주회 다음날 줄을 갈아 주는 것은 뭔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고 버스 떠난 후에 손 흔드는 듯한 느낌...ㅡㅜ)

관련글: 주최측인 자학당 당수의 공연 후일담

프로그램 보기


2009년 1월 15일 목요일

[번역] Homage 해설 by James Ehnes

(허접 날림으로 쭉 써봤다... 이 해설 말고도 제작자 계보도도 한 페이지 들어 있고, 바이올리니스트, 피아니스트, 풀턴에 대한 설명도 한 페이지씩 들어 있으나... 일단 손가락 아파서 생략... 번역이 이상한 점이 있으시면....  번역자에게 연락하시지 마시고... 그냥 알아서 생각들 해주셈...)

불펌은 절대 금지....



음악은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고 악기도 그러하다. 현악기, 관악기, 타악기의 분류는 변함이 없지만, 악기들 그 자체는 계속적으로진화해왔다. 오늘날의 플룻은 고대 그리스에서 연주되던 플룻과는 거의 관련이 없고, 오늘날의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를 만약 바흐가보게된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나 현악기들은 예외이다. 가장 탐나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들은 수백년전에 북부 이태리의작은 지역에서 몇 명의 전설적인 제작자들이 만든 것들이다.

가장 좋은 현악기들은 음의 아름다움, 폭넓은 다양한 음색, 선명한 음과 뻗어나가는 힘의 완벽한 결합을 이루고 있다. 많은 악기들중에서 이런 특징들 중 하나 혹은 심지어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 악기를 찾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을 한악기가 모두 가지고 있는 경우를 찾는 것은 정말로 드믄 일이다. 이 음반에서 연주되는 악기들의 제작자들은 누구도 뛰어 넘지 못한바이올린과 비올라들을 제작했다. 왜 현악기 제작이 역사 속에서 이 특별한 시기에 정점을 이루었었는지는 미스테리로 남아있다.아마도 단 하나의 합리적인 설명은 현악기의 제작이 단순한 공작이 아니라 예술의 형태를 라는 것일 것이다. 많은 예술들과마찬가지로 바이올린의 제작도 훌륭한 예술가들이 악기에 대한 수요가 높았던 때에 가까운 거리에 살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쳐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작품들을 창조하게 되는 "황금기"를 가졌던 것이다.

수 세기동안, 이 지역의 악기들은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이 훌륭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들로 중요한콜렉션을 만들었던 개인들이 있었고, 그런 콜렉션들을 통하여 악기들을 이야기 맥락에 맞게 감상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를 가질 수있었고, 연주자들이 단지 개인적으로 악기들을 감상할 뿐만 아니라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비드 풀턴박사는 역사상 가장 멋진 개인 콜렉션을 모아왔는데, 세계에서 가장 알려진 현악기들이 그 콜렉션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음반은 지금시점에서 이 악기들에 대한 기록을 남기려는 그의 비전의 결과물이다.

바이올린은 1500년대에 지금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안드레아 아마티(대략1505년 - 1578년)는 "근대" 바이올린의아버지로 여겨진다. 아마티는 현재의 북부 이탈리아의 포 계곡에 있는 도시인 크레모나에서 작업했다. 비록 현재까지 전해내려오는그의 악기는 얼마되지 않지만, 크레모나가 이탈리아에서 현악기 제작의 중심지가 되고, 과르네리가,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카를로베르곤지와 아마티 자신의 후손들 - 히에로니무스, 니콜로와 히에로니무스 2세 - 을 포함한 많은 다른 훌륭한 제작자들의 그 곳에살게된 것은 그의 성공 때문이다.

1700년대 초반까지 바이올린 제작은 정점을 이루었다. 그 시절의 논란의 여지 없이 가장 위대한 제작자는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 (1644-1737)이다. 스트라디바리의 초기 라벨은 그가 니콜로 아마티의 제작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나, 오늘날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것은 단순히젊은 스트라디바리가 그가 만든 악기들의 신뢰도를 높여 보이고자 대담하게 꾸며낸 라벨들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의동시대인들처럼 아마티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30대와 40대에 그는 유럽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가문들을 위하여 악기를 만들었는데, 스페인 왕족과 플로렌스의 메디치가들도 포함된다. 1700년대 초에 (대략 1709년 -20년. 몇몇 전문가들은 그 시기를 1703년부터 또는 심지어 1700년부터 시작한다고 확장하기도 한다), ) 그는 소위"황금기"라고 불리우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표준적인 바이올린으로 정의되는 악기들이 바로 이 시기에 제작된 악기들이다. 이 기간의 그의 바이올린들은 완벽한 음질과 디자인의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결합되어졌으며 연주자들과 수집가들이 모두 열망하는 악기가 되었다.

쥬제페 과르네리 "델 제수" (1698-1745)는 역사상 위대한 바이올린 제작자 가문에서 나온 가장 위대한 제작자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안드레아 과르네리 (1626-1698)는 니콜로 아마티의 견습생으로 일을 시작했었으며 이 녹음에 사용된 비올라를 비롯한 많은 뛰어난 악기들을 생산했다. 안드레아의 두 아들, 쥬제페 ("필리우스 안드레아"또는 안드레아의 아들)와 피에트로 ("만투아의 피터")도 또한 뛰어난 제작자들이었다. 그들의 바이올린은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바이올린들보다 더 나은 수준의 악기들로 여겨진다. 쥬제페 필리우스 안드레아도 역시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피에트로 ("베니스의 피터")와 IHS (예수의 그리스식 약어) 라는 문자와 라벨의 십자가 오늘날 우리가 "델 제수"로 부르고 있는 쥬제페이다. "델 제수"는 생전에 스트라디바리와 같은 명성과 부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현재는 스트라디바리와 동급으로 생각되어 진다. 스트라디바리가 유럽의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있는 시민들을 위하여 악기를 만들었던 반면, "델 제수"는 지역의 음악가들을 위하여 악기를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현존하는 델 제수의 악기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점을 설명해 줄 것인데, 약 140대의 바이올린과 한 대의 첼로 (그의 아버지의 라벨을 달고 있지만 확실히 젊은 "델 제수"의 작품이다)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조적으로 스트라디바리의 악기는 600대가 넘는다.

스트라디바리와 과르네리 델 제수의 바이올린에 대한 비교는 꽤 많다. 많은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들은 두 제작자의 바이올린들을 시연하는 것을 즐겼었다 (헨리 비에니압스키, 프리츠 크라이슬러, 야샤 하이페츠, 예후디 메뉴인, 아르투르 그뤼미오, 이작 펄만) 그러나 다른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한 제작자의 악기만을 평생 연주했었다. 1742년 델 제수를 주로 사용하는 연주용 악기로 정하여 델 제수가 마땅히 받아야할 만한 인정을 받게 만들었던 것은 전설적인 니콜로 파가니니였다. 그러나 그는 스트라디바리도 또한 소유하였고 연주하였었다. 이 악기들과이 악기들이 연주회에서 사용될 만한 것인지에 대한 오해들이 많이 있다. 1700년대 초의 스트라디바리는 "연주용"으로는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 되었는데 이 믿음은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바이올린들 중 몇몇의 연주를 듣게 되면 확실히 틀렸다는 것이 나타난다. 스트라디바리의 "롱 패턴" 시기 (몇 가지 현저한 예외들을 제외하고는 대략 1692-99)의 바이올린들은 성공적이지 못한 실험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들 바이올린 중의 몇 대는 훌륭한 연주용 악기들이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소리가 뻗어 나가고 크고 선명한 톤을 가지고 있다. 비슷하게, 1740년 이후의 "델 제수"의 작품들이 더 우수하다는 믿음도 존재한다. 그의 가장 뛰어난 바이올린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악기들이 초기의 가장 우수한 바이올린들보다 정말로 더 높은 수준의 음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증명되지는 않는다. 어느 한 제작자의 다른 제작자에 대한 "우위"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서로 다른 악기들은 각기 다른 연주자들에게 맞을 것이다. 각 제작자의 최고의 바이올린들은 악기가 연주되는 곳의 음향이나 선곡에 따라 다른 악기들보다 더 낫기도 할 것이고 또 연주자가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음악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궁극적으로, 이들 악기들은 표현의 수단이며 두 제작자의 위대한 악기들은 사실 끝없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 악기로 하는 연주에서의 어떤 단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연주자의 잘못이지 제작자의 잘못은 아니다.

1698 Pietro Guarneri (Peter of Mantua) "Shapiro"
만투아의 피에트로 과르네리 (1655-1720)의 악기들은 매우 드물다. 그는 제작자인 동시에 음악가였고 이러한 두 가지 경력때문에 그가 악기를 많이 만들지 않았다을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알려진 바이올린은 42대, 1대의 테너 비올과 1대의 첼로가 있다) 연주에 쓰인 이 바이올린은 앞판과 뒷판의 각 코너에 모두 아름답게 새겨진 fleur-de-lys 덕분에 특별한 관심을 불러 모은다.

1709 Antonio Stradivari "La Pucelle"
이 유명한 바이올린은 현존하는 가장 잘 보존된 스트라디바리 중의 하나이다. 이 별명은, 위대한 바이올린 제작자이며, 딜러, 수리복원가였던 J.B.뷔욤이 1850년 경에 처음 이 바이올린을 보고 이것은 "comme une pucelle!" ('처녀 같다!')라고 경탄한 데에서 왔다고 한다. 달리 말하자만, 이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의 손에서 떠난 이후로 한번도 열려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뷔욤은 이 악기를 모던 악기로 만들었는데, 넥, 베이스바와 피팅을 바꾸었다. 이 바이올린은 그 때 이후로 어떤 변경이나 수리라고는 전혀 없었다. 이것은 아직도 뷔욤의 펙과 테일피스를 달고 있으며 테일피스는 쟌 다르크 (프랑스에서 "오를레앙의 처녀"로 알려져 있는)의 이미지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이 바이올린은 이전에 녹음이 된 적이 전혀 없다.

1713 Antonio Stradivari "Baron d'Assignies"
이 바이올린은 밝고 강한 음색과 매우 잘 되어 있는 보존 상태가 뛰어난 점이다. 이 바이올린은 아주 많이 사용된 흔적이 보이지 않고 사실 1955년까지 전문가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데이비드 풀턴은 알려져 있던 이 바이올린의 소유자들 중 3번째이다. 구조에서 한가지 주목할만한 면은 앞판의 두께인데, 2.9mm이고 다른 알려진 스트라디바리 바이올린들 보다 1/4mm정도가 더 두꺼운 것이다.

1715 Antonio Stradivari "Marsik"
나는 1999년 9월부터 이 바이올린을 나의 연주용 바이올린으로 이용해왔는데 이는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인 Martin-Pierre Marsik의 이름이 이 악기에 붙어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 악기를 1879년에 취득하여 1880년에 팔았기 때문에 단지 1년만 소유했었다. 악기의 소유자들은 1870년에서 20세기 초까지 알려져 있다. 그 후의 어느 시점에 바이올린은 소련으로 넘어갔고 영국의 딜러인 Peter Biddulph가 1990년에 되살 때까지 그 곳에 머물러 있었다. "Marsik" 스트라드는 하나 더 있는데 1705년에 제작된 것으로 나중에 데이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악기가 되었었다. Marsik은 20세기로 바뀔 무렵에 1726년 스트라드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도 존재한다.

1715 Antonio Stradivari "Baron Knoop"
스트라디바리의 가장 유명한 악기들 중 하나인 이 바이올린은 위대한 수집가였던 Johann Knoop 남작 (1846-1918)의 이름을 받았다. 그는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현악기 콜렉션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유명한 영국의 딜러인 알프레드 힐에 따르면, 이 바이올린은 남작이 가장 좋아하는 악기였다. 이 악기는 힐의 스트라디바리에 관한 책에서 "Bevan" (훗날의 소유자)로 불리워졌었으며 "일급의" 악기로 특별히 언급되고 있다. 야샤 하이페츠는 이 악기를 1936년 12월에서 1938년 1월까지 사용했었다.

1719 Antonio Stradivari "Duke of Alba"
이 악기의 소유자들은 1788년까지 알려져 있는데, 그 때 Duke of Alba가 마드리드의 Vicenzo Ascensio에게 수리를 맡겼었다 (아직도 라벨에는 Ascensio의 글씨가 적혀있다). 많은 위대한 바이올린들처럼, 이 악기도 1850년 프랑스의 딜러인 뷔욤에게 가게 되었고 그 후 독일의 귀족인 Wilhelm von Booth의 가족에게 판매되었으며 1911년까지 그 가족이 악기를 소유했다. Otto Booth (Wilhelm의 아들)가 20세기초까지 소유하고 있었으나 바이올린은 남미에 있었고 아서 힐에 따르면, 그 시기 그 쪽에 있었던 유일한 스트라디바리였다.

1733 Antonio Stradivari "Sasson"
스트라디바리 말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이 악기는 보존이 매우 잘되어 있고 그동안 대부분 아마추어 연주자들과 수집가들의 손에서 전해져 왔다. 이 바이올린은 1892년 Roussy가 (Nestle 우유의 창업자) 구입하였고 75년동안 그들의 소유였다. 이 시기의 대부분 이 바이올린 사실상 전혀 연주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1924년에서 1966년까지 악기는 런던의 창고에 있었다. 스트라디바리의 후기 악기들의 전형으로, 뒷판, 옆판과 스크롤의 메이플은 평범한 무늬이고 바니쉬는 "황금기"의 악기들보다는 더 갈색이다.

1737 Giuseppe Guarneri 'del Gesu' "King Joseph"
이 바이올린은 델 제수의 중후반기의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장인으로서의 솜씨가 보여주는 위대한 아름다움이 놀라운 음색과 결합되어 있다. 뒷판은 원피스 슬랩컷의 메이플인데 델 제수의 작품으로는 약간 특이한 모습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첫번째 델 제수 바이올린으로 알려져 있는데, 별명처럼 그의 가장 위대한 걸작으로 종종 평가된다. 흥미롭게도, 이 바이올린은 이 전에 "킹" 조셉 과르네리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킹 조셉" 과르네리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역시 "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1735년 델 제수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한 목적인 것 같다.

1742 Giuseppe Guarneri 'del Gesu'"Lord Wilton"
이 유명한 바이올린은 예후디 메뉴인의 마지막 연주악기였다. 그는 1940년대부터 이 악기를 연주해왔고 1978년에 구입했다. 악기의 상태는 완벽하고 수 세대동안 가장 음색이 뛰어난 델 제수로 인식되고 있다. 이 악기는 힐가문이 특히 좋아했던 악기였는데, 그들은 과르네리가문의 제작자들에 대한 1931년의 책에서 이 악기를 특별히 언급했었다.

ca. 1560 Gasparo Bertolotti (Gasparo da Salo)
안드레아 아마티가 크레모나에서 근대 바이올린을 발전시켰다면, 가스파로 다 살로 (1540-1609) - 가스파로 베르톨로티로 보통 알려져 있는 - 는 브레시아에서 울퉁불퉁하기는 하지만 음색은 뛰어난 악기들을 제작하고 있었다. 가스파로 다 살로가 만든 비올라들은 깊고 멋진 울림의 음색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큰 사이즈 때문에 비올리스트들이 긴 팔과 손가락이 없이는 연주하기가 힘들다. 슬프게도, 많은 그의 악기들은 작은 연주자들에 좀 더 "실용적"이 되도록 수년동안 크기가 줄여져 왔다 (이것은 스트라디바리의 초기 첼로의 운명과도 같은 것인데, 그 첼로들은 현재의 기준으로는 비정상적으로 크게 만들어졌었다). 이 악기는 원래의 크기를 유지하고 있다. 비올라의 바디 길이는 결코 표준화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악기의 바디길이인 17과 5/8인치는 일반적으로 '풀사이즈' 비올라라고 여겨지는 길이보다는 1인치 정도 더 긴 것이다.

1676 Andrea Guarneri "Count Vitale, ex Landau"
현존하는 가장 사랑받는 비올라로 이 제작자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5대의 비올라 중 하나이다. 200년동안 아마추어와 수집가들의 손에 있었으며 거의 완벽한 보존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악기는 유명한 제작자인 카를로 만테가자에 의하여 모던악기로 바뀌어지기는 했지만, 원래의 넥을 가지고 있는 크레모나 악기로서는 드믄 예이다. 이 악기의 기록은 코지오 디 살라부에 백작의 1816년 4월1일의 일기인데, 그때 밀라노의 비탈레 백작에게 소유권이 넘겨졌고 그의 이니셜 (S.V)는 뒷판의 버튼에 새겨졌다. 이어서 윌리엄 커티스 경 (1790년에서 1826년까지 런던시 의회의 멤버였으며 1795년에는 Lord Mayor)에게로 소유권이 넘겨졌고 조지 4세의 실내악 음악 공연에서 종종 사용되었다고 보고되고 있다.

1793 Giuseppe Guadagnini "Rolla"
쥬제페 과다니니 (1753-1805)는 뛰어난 제작자인 J.B.과다니니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도 생전에 많은 도시들을 다니며 일했는데, 이 비올라는 파르마에서 제작되었다. 이 악기는 상대적으로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졌고 바디의 길이는 15와 5/8인치에 불과하다.

현악기에 맞는 활을 짝 맞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활이 바이올린이나 비올라에 만들어 내는 차이는 현저한 것이어서 쉽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훌륭한 활은 밝은 악기에 깊이를 더해줄 수도 있고 부드러운 악기에 밝은 톤을 더해줄 수도 있으며, 더 선명하고 강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위대한 바이올린에 위대한 활을 매치시키는 것만으로 좋은 결과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결합은 악기의 음색을 억누르거나 바람직한 수준을 넘어서서 음색의 특정 측면만을 과장해 버릴 수도 있다.

이 녹음에 사용된 활은 두 명의 가장 걸출한 활 제작자인 프랑소와 자비에르 투르트 (1747-1835)와 도미니크 페카트 (1810-1874)에 의해 제작된 것들이다. 데이비드 풀턴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활 콜렉션도 아지고 있는데, 나는 서로 다른 활들을 서로 다른 악기에 비교해보면서 완벽한 매치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보냈다. 9대의 바이올린들에서, 나는 4대의 서로 다른 활을 사용했다. 두 대의 델 제수 바이올린에는 투르트활, "Baron Knoop", "Pucelle" 그리고 "Duke of Alba" 스트라디바리에는 또 다른 투르트, 그리고 "Sassoon" 스트라디바리에는 또다른, 초기의 투르트를 썼고, "Marsik"과 "Baron d'Assignies"스트라디바리와 피에트로 과르네리에는 페캇을 사용했다. 나는 각각의 비올라에 모두 다른 활을 사용했는데, 과르네리와 가스파로 다 살로에는 투르트들을, 과다니니에는 페캇을 사용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한 선곡은 특별한 과제였다. 이 녹음이 음악적인 장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과 많은 악기들이 사용된다는 점에 관계없이 흥미있고 즐거운 프로그램이 되도록 하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나는 또한 개별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특별한 장점을 잘 보여주는 곡들을 고르고 싶었다. 데이비드 풀턴과의 우정 덕분에 나는 이 녹음을 하기 전 수 년동안 이들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꽤 잘 알 수 있었다. 이 녹음의 모든 선곡은 특정한 악기를 염두에 두고 고른 것이며 문제의 악기의 음색을 잘 보여 줄 수 있게 하려는 생각에서 된 것이다.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의 일부와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이 기상곡의 일부는 내가 몇 년간 바이올린과 비올라들을 시연해보면서 연주했었던 곡들이다. 악기의 전 음역을 커버하면서 이 음악들은 특정한 악기의 음색의 가능성을 알아 볼 수 있는 빠른 길이 된다. 악기들 간의 서로다른 음색은 사실 매우 미묘하고 물론 연주자의 특질이 어느 바이올린이나 비올라가 만들어 내는 소리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청중들은 이 엄청난 악기들 각각의 독특하고 개별적인 목소리를 들게 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제임스 에네스

2008년 12월 23일 화요일

앙상블 첫 연습 2008년 12월 22일

드디어 앙상블을 구성했다. 뒤포르와 바친기에서 첼로, 비올라, 피아노까지. 퍼스트 바이올린까지 영입하면 금상첨화일 듯 한데... 일단은 이 멤버로 연습을 해보기로 했다. 피아노 전공자 (유일한...) 경희씨는 나중에는 바이올린으로도 연주하실 계획.

급하게 약속 날짜를 잡느라, 연습실도 급하게 구했는데, 가보니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5명이 2시간 정도 있으려니 좀 좁긴하더라..;;;

은하가 스즈키 쿼텟 악보와 여인의 향기 악보, 경희씨가 가브리엘즈 오보에 악보를 가져왔다. 스즈키 악보는 쭉 살펴보니 무지 쉬워 보였는데.....;;;;

정말 본의 아니게 허접한 실력으로 (그것도 며칠 간 연습 한 번도 안했는데...) 멜로디 라인을 내가 연주하려니 엉망이 되어 버렸다..ㅠㅠ 더구나 오래 전에 배운 곡들을 해보려니 음정에 삑사리 장난 아니고... 원래 레슨샘 앞에서도 긴장해서 잘 못하는데, 처음 만나서 연주를 하려니 긴장 긴장... 이래서야 남들 앞에서 연주를 어찌하나 싶다.

일단, 바흐 가보트, 가브리엘즈 오보에 (오보에를 한 명 구할 예정), 베토벤 미뉴엣을 하는 것으로 했는데, 끝나고 생각해 보니, 영화음악이나 애니음악 중에서 골라도 괜찮을 듯 하다. 물론 열심히 연습을 해야 겠지만..;;;;

연습을 마치고 나오니 눈이 펑펑 내린다. 우리의 첫 모임을 축하해주는 瑞雪일 듯 ^^;; 연습실 바로 앞의 카베하네라는 커피숍에서 다음 연습 일자와 장소를 논의하고는 눈을 맞으며 헤어졌다.

오늘 연습의 take away는... 바이올린만 잘하면 된다...;;;;;

바이올린을 잘하기 위해서는... 긴장을 풀고, 연습도 좀 많이 하고...;;; 그래도 안되면 퍼스트를 적극 영입해 볼 것...^^;;;

2007년 9월 27일 목요일

Max Bruch, Romance in F major for Viola and Orchestra, Op. 85

막스 부르흐는 후기 낭만파의 작곡가로 분류되어 지며, 그의 음악은 일반적으로 아름답고, 상상력이 넘치고, 고상하게 들리지만, 비평가들은 종종 그를 비주류 작곡가로 분류하곤 한다. 브루흐는 비제가 태어난 해와 같은 1838년에 쾰른에서 출생했다.

브루흐는 어린 아이 시절부터 비상한 음악적 재능을 보여 주며 피아노를 배우고 작곡을 했다. 1852년 그는 교향곡과 현악사중주를 작곡하였는데, 그 현악사중주로 그는 푸랑크푸르트의 모차르트 재단으로 부터 장학금을 수여받을 수 있었다. 1858년에는 쾰른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오페라인
Scherz, List und Rache를 작곡하였다. 그는 1861년에서 1862년 사이에 독일의 중요한 문화 중심지들을 방문했었다. 1862년부터 64년까지 브루흐는 만하임에 거주하면서 칸타타Frithjof를 작곡했고 청중들을 열광하게 했었다. 만하임의 자리를 떠난 수 브루후는 파리와 브뤼셀을 방문했었고 1865년에는 결국 코블렌츠의 음악감독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867년, 브루흐는 Sonderhausen에서 궁정의 카펠마이스터가 되었고 1870년까지 머무르게 된다. 그 해, 브루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그의 3번째 오페라인 Hermione를 작곡한다. 이 곡은 1872년 출판되었다. 1873년에서 1878년사이에, 브루흐는 뛰어난 독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누리면서 본에서 독립적으로 작업을 했다. 1881년, 그러나 그는 Julius Benedict를 이어 영국의 리버풀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지휘자로서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하지 못했던 연주자들과 잘 지내지 못하였다. 1883년 브루흐는 리버풀을 떠나 브레슬라우 (현재 폴란드의 브로츠와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고 그 곳에서 1890년의 시즌까지를 보내게 된다.

그해 가을 브루흐는 베를린 음대의 작곡교수로 임용되었고, 1911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일을 하였고 1920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교수로서의 직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레스피기, 본 윌리암스가 그의 학생들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은 의심할 바 없이 열정적이고 낭만적인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g단조 (1868년작)이다. 이 작품은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부터 몇가지 테크닉을 차용하는데, 이것은 악장간의 연결이나, 그리고 관습적인 관현악 전개와 이전의 협주곡의 완고한 형식으로 부터 벗어나는 점들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언급하듯이 낭만적인 전통의 정점을 대표하는 이 곡의 특징은 단선적인 선율이 쓰였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자주 연주되는 곡은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단악장 작품인 콜니드라이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히브리 멜로디에 의한 아다지오)이다. 이 사랑스러운 작품은 이질적인 민속적 그룹에서 유래한 선율적인 소재를 이용하는 그의 취향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를 유태계로 생각하지만, 브루흐가 유태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는 러시아, 스웨덴, 스코틀랜드, 켈틱 선율들을 이용하여 곡들을 쓰기도 했다. 이들 작품들과 그의 교향곡은 그다지 잘 연주되지는 않으나 가끔은 콘서트홀이나 레코딩에서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 이런 경우에, 청중들은 그 아름다움과 세련된 솜씨에 놀라 매료되곤 한다.

브루흐는 자신의 작품을 고치고 또 고치는 부지런한 작곡가였으며, 그는 3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포함하여 200여곡의 작품을 썼다.

오늘날 브루흐는 바이올린 작품들의 작곡가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생전에 현재는 잊혀진 큰 스케일의 합창곡들 - Odysseus, Frithjof 또는 Das Lied von der Glocke 같은- 로 유명했었고 그 같은 곡들이 그에게 생전에 브람스를 능가하는 명성을 가져다 주었었다. 그는 독일의 낭만주의 전통에 따라 보수적으로 그의 작품을 구성했었고 그 스스로를 리스트나 바그너와 같은 "신음악"으로 보기 보다는 브람스와 같은 낭만적 고전주의 학파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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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는 오케스트라 앙상블에서 뻗어나가는 소리를 얻는데에 따른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서 솔로 악기로서 그다지 대중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었다. 몇몇의 비평가들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같은)에 따르면, 협주곡의 핵심은 비루투오즘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갈등과 해결을 보여주는데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케스트라에 대해 비올라로 균형을 맞추는 것은 피아노나 또는 바이올린으로 하는 것보다 적합하지 않아 작곡가들은 비올라협주곡을 많이 쓰지 않아왔다. 과거에는 비올리스트들은 순위에서 밀려난 바이올리니스트였고 그렇기 때문에 비올라 솔리스트들은 최근까지 찾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윌리엄 왈튼, 랄프 본 윌리암스, 폴 힌데미트는 새롭고 더 능력있는 비올리스트들을 위하여 비올라 솔로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들이었다. 이들 새로운 연주자들은 또한 원래는 다른 악기들을 위하여 작곡되었던 곡들을 비올라곡으로 편곡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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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브루흐 (1838 - 1920)의 이 아름다운 곡은 1911년에 작곡되었고 같은 해 베를린에서 초연되었다. 작곡자는 이 곡에 Andante con moto 라고 적고, Q=69, 72라고 메트로놈의 표시도 적어 넣어놓았다.

브루흐는 이 사랑스러운 작품을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위한 첫번째 스케치를 시작한 것과 동일한 시기에 완성했다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보수적인 작곡가였는지 알 수 있다. 브루흐는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믿을 수 없지만, 브람스 같은 부드러운 음악들도 바이로이트 야수의 새끼악마들로 여겼었다. 그의 우상은 베토벤 - 또는 비창소나타와 바이올린 협주곡의 베토벤이었으며, 후기 현악사중주곡의 미심쩍어하는 모험가인 베토벤은 아니었다. 로망스는 파리 오페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인 모리스 비외(Maurice Vieux)에게 헌정되어졌다. 그러나, 1911년 제국주의 베를린에서의 성난 반프랑스적인 정서로 말미암아 이 곡은 베를린 음악학교에서 부르흐와 같이 교수로 재직하던 독일인 바이올리니스트인 빌리 헤스 (Willy Hess)에 의하여 초연되었다. 헤스는 브루흐의 작품을 많이 초연하였었고,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콘서트 피스 Op. 84는 그에게 헌정되어 졌었다.

단순한 오케스트레이션은 비올라의 깊은 음역의 그윽함이 로망스에서 두드러지도록 한다. 굳건하지만 우아하게 끌어 내온 음색으로 이 작품은 자제되어지고 모든 감정적인 긴장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작곡가의 솔직하지만 충분한 반주와 완전히 융합되어 진다. 이 곡은 브루흐의 어느 다른 작품들과도 겨룰 수 있을 만한 랩소디적인 테마를 보여주고 있으며, 간절한 열망과 멜랑콜리한 풍부함을 가지고 있다. 투명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매우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러브레터라고 할 수 있다. 곡은 열정적인 웅변으로 시작하여 고요한 엔딩에 이르게 된다.

참고:
http://gbyo.com/behindthemusic.php
http://www.wooster.edu/music/twood/bruchcatalog.html#85
http://www.wooster.edu/music/twood/maxbruch.html
http://wm06.allmusic.com/cg/amg.dll?p=amg&sql=41:7108~T1
http://www.naxos.com/composerinfo/148.htm
http://www.violinman.com/Violin_Family/history/composer/biography/bruch/Bruch.htm
http://en.wikipedia.org/wiki/Max_Bruch
http://www.musicweb-international.com/classrev/2005/July05/Bruch_Fifield_book.htm
http://www.h-net.org/reviews/showrev.cgi?path=208071159992206
http://en.wikipedia.org/wiki/Viola_concer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