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 28일 금요일

[번역] "아마데우스"와 모차르트: 기록 바로 세우기 (1)


"그의 작품들이 음악가들에게 받는 존경이나, 많은 청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는 점을 보면, 그는 아마도 서양음악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일 것이다." 1980년판의 뉴그로브 음악사전은 이와 같은 칭찬과 더불어 베토벤에 대한 글을 위엄있게 시작한다. 이 문장은 10여년 후 독일 골리앗 (역주: 베토벤을 지칭)에게 보다는 모차르트라는 다윗에게 들어 맞게 되었다. 이 해 (1991년)가 모차르트의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순수한 고전적인 이미지가 베토벤의 더 외향적인 표현보다 선호되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라디오 채널을 휴 다운즈나 피터 우스티노프가 모차르트 스페셜을 진행하는 PBS로 돌려보라. 또 채널을 상업방송들 중의 하나로 돌려보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K.466과 "작은" G단조 교향곡 K. 183/173dB가 맥킨토시 컴퓨터를 팔고 있고, 돈지오반니는 Cheer 세탁세제를 선전하고, 피가로의 결혼은 Sirocco 자동차를 팔고 있고, 레퀴엠의 라크리모사는 Lee 청바지를 칭찬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또 다른 피아노협주곡 (K.482)는 맥스웰하우스 커피광고를 장식하고 있다. 모차르트가 어린 시절에 쓴 교향곡의 발견은 뉴욕타임즈의 일면을 장식한다. 딜러와 수집가들은 작은 기록 조각이라도 얻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모차르트의 서명은 명화들과 같은 가격에 팔리고, 언젠가 딜러들은 "Andretter" 세레나데 K.185를 조각내어 각각 따로 팔아 엄청난 이윤을 남기기도 했다. 피가로의 결혼과 돈지오반니는 현재 라보엠과 나비부인과 박스오피스에서 티켓판매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런 모차르트의 대중화는 이로 인하여 가장 많이 이익을 얻고 있는 오페라하우스나 콘서트홀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며, 무대와 영화로부터 온 것이다.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1980년대의 모차르트 열풍은 피터 샤퍼의 연극 '아마데우스'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연극과, 이어서 밀로스 포먼이 감독한 동명의 영화는 다른 어떤 것들이 작곡가 사후 200년 동안 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모차르트를 위하여 한 셈이다. '아마데우스'는 런던, 워싱턴, 뉴욕에서 상연되었고, 비엔나의 부르크극장 (Burgtheater)과 부다페스트의 넴제티 신하즈 (Nemzeti Szinhaz)에서 상연될 때에는 독일어, 헝가리어로 번역되었다. 샤퍼은 무대 버전을 계속적으로 수정했는데, 그는, "분명함, 구조적인 질서 그리고 드라마에의 거의 강박에 가까운 추구..... 런던 버전에서 잘못된 점의 하나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몰락과 거의 관계가 없게 보였다는 것이었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영화에서, 샤퍼와 포먼은 다시 원고를 수정하였는데, 단지 새로운 미디어를 위한 변경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더 순진한 관객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은 객관적인 "볼프강 모차르트의 삶"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하였다. 이 점은 아무리 강하게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분명히, 무대에서의 아마데우스는 작곡가의 전기 다큐멘터리로 의도되지는 않았고 영화는 더욱 더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주제넘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그의 이야기를 픽션으로 장식하는 월권 - 그 중에서도 특히 청중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주제를 강조할 목적으로 - 을 했다고 본다.

영화는 무대에서 보다 훨씬 더 그러한데,  영화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럴법한 드라마를 역사 속의 시간, 장소, 실존인물들로 바꾸어 인식 시켰다. 무대공연에서 경고할 수 있었던 부분은 셀룰로이드 필름에는 넣을 수가 없었고, 픽션은 진실과 분리되지 않았다.

아마데우스는 궁정 작곡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의 작곡가로서의 신적인 재능에 대한 깊은 질투심에 중점을 둔다. 모차르트의 세련되지 못한 태도와 미성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이 그의 인격으로 내려와서 만든 것과 같은 작품들을 하나하나 만들어 내었다. 그는 그의 이름대로 진실로 "아마데우스"의 축복으로 신의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연극과 영화 둘 다 작곡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10년, 즉 1781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에 의해 해고된 후로부터 사망 시까지의 10년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에 모차르트는 비엔나에 거주하였고, 궁정 작곡가로서의 일상업무로부터 자유로운 작곡가가 되었으나, 재정적인 안정성을 위협받게 되었다. 이 10년동안 모차르트는 많은 곡들을 작곡하였는데, 모두 놀랄만큼 우수한 곡들이었다. 아마데우스는 살리에리의 모차르트에 대한 경쟁관계에 촛점을 맞추기 위하여 비엔나 궁정의 장면들을 많이 설정한다. 몇몇 상황들이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많은 부분들은 궁정 생활에 대한,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삶에 대한 비현실적인 왜곡이다.

영화가 개봉한지 7년 이상이 지난 오늘날, 음악학자들은 여전히 볼프강, 콘스탄체 그리고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요세프 2세 황제, 그리고 안토니오 살리에리에 대하여 질문을 받는다. 그들은 정말 그러했었는가? 1991년 '모차르트의 해'는 이런 문화 아이콘의 초상을 검토하여 기록 바로 세우기를 시작할 시기이다.

'장식으로의 픽션' (역주: 사실이 아닌 내용을 극에 삽입하여 주제를 부각시키는 것을 말함)은 작가들에 의한 창조와 역사적인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심연을 과소평가하게 한다. 샤퍼와 포만 둘 다 모차르트의 전기적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역사적인 논란거리들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들이 모차르트의 삶을 변형시킨 것은 다폰테가 보마르셰의 연극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 대본으로 바꾼 것과 유사했다. 길이는 매체의 형식에서 주어진 시간에 맞도록 만들어졌고, 등장인물의 수는 감소되었으며, 상황은 재정비되고 결합되어졌다.

그러나, (극에서의) 등장인물들의 설정과 동기는 18세기 삶의 재창조일 수도 있다. 만약 샤퍼와 포먼이 그렇게 했다면, 또 그것을 의도했었다면, 그들의 영화의 힘이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감소했을 것이다. 동기, 목표 그리고 감정 또는 적어도 모차르트 시대의 사람들이 표현하고 유지했던 방식은 확실히 우리와는 달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볼프강과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6명의 아이들을 낳았지만, 생존하여 어른으로 성장한 것은 둘 뿐이었는데, 이러한 비율은 그 당시에는 통상적인 것이었다. 만약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1990년대에 볼 수 있는 반응과 같은 크기였다면, 그들은 결혼생활 내내 거의 계속적으로 슬퍼만 하고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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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Amadeus" and Mozart: Setting the Record Straight By A. Peter Brown
Reprinted from The American Scholar, Volume 61, Number 1, Winter 1992.

번역에 쓰인 글:
© 1992 by the author. By permission of the publisher.
Steve Boerner steve@mozartproject.org
Revised November 22, 2001
출처: http://www.mozartproject.org/essays/brown.html

2007년 12월 27일 목요일

그냥 끄적... 그리고 건강검진

고작 크리스마스 이브 하루 휴가를 내고 쉬었을 뿐인데 - 물론 그래서 연 4일을 놀긴 했지만... - 계속 몸도 찌뿌둥하고 피곤하고 영 회사에 나오는 것이 괴롭다. 오늘 아침에도 간신히 일어나서 출근을 했다. 꽤 오래 전부터 계속된 '회사가기시러'병이 절정에 달한 것인가?

내 이력서에는 남들 보다 두서너배는 많은 직장들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데, 나는 내가 직장을 자주 옮겼던 이유가 결코 진득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모두 외부적인 사정에 의해서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가만히 있어도 회사가 합병이 되었던 적도 있었고..... 하지만 꼭 외부사정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 직장이 내 앞날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뭔가 좀 더 나은 오퍼가 오는 쪽으로 움직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변화는 항상 흥분과 긴장감을 주니 인생도 더 즐겁고....ㅡㅡ;; 결국 나는 철새였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별다른 대안이 없다. 대안이 없는 한 무턱대고 움직일 수는 없으니 내 철새 생활은 이제 종언을 고할 때가 된 것도 같다. 하지만, 근본이 철새였던 탓에 텃새인 척하는 생활은 별로 입맛에 맞지가 않는다. 그래서 올해 내내 '회사가기시러'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어쩌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계속 "병마"와 싸우며 출근을 할 수 밖에...ㅡㅜ

어제 오후에는 건강검진을 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건강검진 전문 병원이었는데, 이 병원 직원들은 'sympathy 기반 친절'을 모토로 삼고 있는 듯했다. 사실 절차적인 면이나 효율성은 엉망이었다. 예약과정부터 삐그덕거렸는데, 같이 검진받고자 했던 남편은 받기로 했던 약을 못받아 결국 검진도 못받았고, 대통령선거일도 예약을 받았다가 나중에 바꾸느라 일정이 엉망이 되는 등 문제가 많았다. 어제도 수검자가 많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대기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또 작년의 모 병원에서는 혈관 주사를 한번만 놓아서 채혈도 하고 나중에 주사도 맞게 했지만 여기서는 두번이나 혈관에 주사바늘을 꽂아야 했었다. 구강검진이 오후에는 없다는 사실도 미리 이야기 해주지 않았었고.... 그런데, 거기 직원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사람들을 다루는 기술을 가지고들 있었다.

"많이 힘드시죠? (사실은 하나도 안 힘들었다)"
"너무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ㅠㅠ (엄청 기다리긴 했었다)"
"어지러우시죠?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어지럽다)"
"너무 시끄러우셨죠? (견딜만 했었다)"
"제가 안내해 드릴께요 (그러고는 옆의 직원에게 떠 맡긴다....)"

상대방의 감정을 오버하여 짐작하고는 호들갑을 떠는 류의 친절이라고나 할까. 문제는 그 웃는 얼굴과 걱정하는 듯한 표정에다가는 불평 불만을 늘어 놓기가 힘들다는 점. 그래서 결국은 나도 웃으면서 나왔는데.... 곰곰히 생각해 보니 병원이라는 곳의 특성상 이런 식의 sympathy기반 친절 정책은 일반적으로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은 같다. 몸이 아프면 누군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느낌만으로도 많이 나아지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러나... 업무의 효율성이 받쳐 주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요 근래 여기저기 가끔씩 아파왔기 때문에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일단 당일의 결과는 말짱했다. 며칠 후에 결과지를 받아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시력은 1.0, 1.5에 안압도 정상이고 청력도 매우 좋으며 혈압도 정상... 내시경 및 초음파도 멀쩡하다. 음.... 그럼 그간에 아팠던 것은 다 꾀병이었던가...; 직원들의 태도는 매우 sympathetic했으나, 검진 결과는 상당히 apathetic하다고나 할까...

수면 내시경을 했었기 때문에 좀 졸렸으나, 대충 밥을 챙겨먹고 레슨을 갔다. 내가 생각해도 어찌나 음정이 안맞고 손가락이 몰리는지... 정말 안습이다. 올해의 마지막 레슨인데...  연습부족이 여실히 들어나는 레슨이었다..ㅡㅜ

2007년 12월 24일 월요일

[공연] 뮤지컬 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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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전... 크리스마스에 아이들에게 보여줄 공연을 찾다가 애니를 발견했다. 클럽발코니에서 회원할인을 해준다기에 2층 제일 앞쪽 자리를 예매했다.

평소 정도의 교통량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공연 4-50분전에 집에서 출발했는데... 1호터널 중간부터 꽉막혀버린 도로는 뚫릴 생각을 하질 않고 있었다. 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 어느새 6시가 훌쩍 넘고...ㅡㅜ 공연을 아예 포기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생각하다가 그래도 중간부터라도 보고 싶다는 지윤이 말에 계속 갔다. 시청 주변과 청계천 주변으로 접어 드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크리스마스 이브도 아니고, 이브의 이브지만 일요일인 탓에 사람들이 모두들 시내로 몰려든 모양이다. 일요일 저녁에 시내가 이렇게 밀릴 줄은 몰랐다...

전반부 공연을 포기하고 인터미션에 들어가서 후반부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뮤지컬이라서 그런지 중간입장을 시켜 주었다. 애니가 워벅스씨네 집으로 가서 환영을 받게 되는 장면부터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단순한 미국적인 줄거리였지만, 애니역을 맡은 꼬마와 고아원 소녀들을 연기한 아이들이 너무나 노래도 무용도 잘해서 신기하고 귀여웠다. 지윤이와 도윤이도 생각보다 훨씬 즐겁게 보고 있었다.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어도 줄거리가 워낙 단순한 덕에 별 어려움없이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고.

공연이 끝나고, 근처의 일품당에서 샤브샤브를 먹고, 종로빈대떡에서 부침개를 사고, 오다가 군밤도 사고... 아이들은 구세군 냄비에 돈도 넣어 보고.... 반짝반짝 꾸며놓은 서울 시내를 구경하면서 집으로 왔다. 크리스마스 서울 시내의 모습은 뉴욕 보다도 화려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렇게 차가 밀렸던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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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는 원래 1924년 헤럴드 그레이가 쓴 Little Orphan Annie라는 한 페이지 짜리 연재 만화라고 한다. 만화의 내용은 고아소녀 애니가 샌디라는 개와 함께하는 모험담. 워벅스씨는 애니의 조력자로 중요한 역할을 하면 매우 이상적인 자본가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만화나 오리지널 뮤지컬에서의 워벅스는 대머리인데, 어제의 뮤지컬에서는 머리숱이 많은 젊은 배우가 워벅스 역을 해서 원작의 느낌이 잘 살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애니는 뮤지컬에서 나오는 것보더 훨씬 더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가게 된다. 만화의 공식 웹사이트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있다.

Little Orphan Annie did not sing "The sun will come out tomorrow." She had no time to sing or hang out with the other orphans. She was too busy ducking bullets, dodging hit-and-run vehicles, and blowing up Nazi submarines!
만화는 작가인 그레이가 68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 되었던 것 같고 그 이후에도 다른 작가들에 의하여 계속되었다.

뮤지컬 애니는 1976년에 초연되고, 1977년 브로드웨이에 등장하여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Charles Strouse이 곡을 맡고 Martin Charnin이 가사 그리고 Thomas Meehan의 대본이었다. "Tomorrow"는 뮤지컬을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까지도 널리 알려진 유명한 곡이 되었고, 서정적인 "Maybe"와 "It's the Hard Knock Life"도 대중적인 곡이 되었다. 뮤지컬은 브로드웨이 뿐만 아니라, 런던, 그리고 미국 전역을 돌며 순연을 했고 이제는 세계각지에서 Tour공연도 하고 이번에 내가 본 것처럼 각 나라 말로 번역되어 공연이 되기도 한다.

어제 공연에서는 영어자막이 같이 나왔는데, 한국말 가사 보다는 원래의 영어가사가 훨씬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우 구체적인 표현들을 너무 추상적인 말로 번역되어 단지 예쁘고 아름답기만 한 대사나 가사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영어로 공연을 해도 전부 다 이해하고 느낄 수도 없지만 말이다... 쩝..;

뮤지컬에서는 대공황과 세계대전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 애니가 백악관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오고, 애니가 부르는 Tomorrow를 통해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에 대한 영감을 얻는 과정은 약간의 과장스럽기도 하지만, 일면으로는 리더가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비전과 희망이라는 점 (환상과 기만이던가...;;;)을 생각하게도 하고.. 최근의 대선도 생각나고 해서 흥미로왔다.

뮤지컬 애니의 캐스팅, 지난 공연 동영상들이 있는 공식 사이트:
http://www.annieorphans.com/ (물론 미국공연들이다...)

유튜브에는 애니와 관련된 동영상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 중의 몇 개만 뽑아 봤다.

오리지널 캐스팅이라고 볼 수 있는 Andrea McArdle의 Tomorrow. 그리고 애니로 일약 스타가 된 그녀의 현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웹페이지:
http://www.myspace.com/andreamcardle


Tomorrow, sung by Alicia Morton in the 1999 Disney Version


"It's the hard-knock life", sung by the Original Broadway Cast of 1977


지각한 우리가 들어가서 보기 시작한 장면의 노래인 I Think I'm Gonna Like It Here 와 NYC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노래들...


사라 제시카 파커가 노래한 I Don't Need Anything But You... 1982년 영상~


'ANNIE' orig 1977 broadway show excerpts


Aileen Quinn이 부르는 Maybe 1982

레슨일지 2007. 12. 22 (토)

지난 주 출장으로 레슨에 못갔었는데, 출장에 다녀온 후 선생님에게서 문자가 왔다. 인사 못하고 그만두게 되어 미안하다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바친기에 올라왔던 레슨실 광고가 떠올랐다. 레슨실을 따로 하나 하시는 것 같더니 아예 이제 그쪽으로 전념하려고 이 쪽 레슨을 그만두시나 보다.

그리하여, 이번 토요일에는 다른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다. 사실 이 선생님은 내가 제일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배웠던 분인데... 2년여만에 배우게 되는 셈이다. 선생님이 바뀌면 자세부터 다시 교정하기 때문에 진도도 거슬러 가기 마련일 듯 했다. 일단 호만2권의 중간 부분을 해보라고 하셨고... 세브직이랑 스즈키를 다시 해보자고 하셨다.

자세에 관하여 몇가지 지적을 받았는데... 3번 손가락이 비스듬하게 짚이지 않고, 지판과 직각에 가깝게 운지가 되어서 음정이 조금 낮게 들린다고 지적을 해주셨다. 왼손 검지의 뿌리 부분이 지판에 닿은 채로 나머지 손가락이 짚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나의 경우에는 그 부분이 붙어 있지 않아서 각 손가락간의 간격이 일정하게 짚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음.. 상당히 근본적인 문제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뭐 어떻든 고쳐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하나는 활 끝까지 쓰려면 악기를 몸 앞쪽으로 돌려서 잡으라는 것이었다. 활을 똑바로 쓰기 위하여 악기를 오히려 뒤로 더 빼야 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터라 이 코멘트는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지 난감했다. 활끝을 쓰기 위하여 악기를 앞으로 돌려야 하는 것인지, 활을 비뚤어 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뒤로 빼야 할지....

또 하나는 손목. 보잉 시에 손목이 계속 유연하게 구부러졌다 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일단 그런 보잉보다는 손목을 고정시키고 더 힘있게 보잉을 하라는 것. 확실히 소리는 더 커지고 힘있게 들려왔다. 팔에 힘을 빼는 것을 의식적으로 노력해왔던 터라... 좀 어색했지만, 다양한 소리를 내는 것에는 다양한 방식의 보잉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들 지판에 다시 스티커를 붙이게 되었다. 이분은 지판에 스티커를 붙이는 것을 선호하시는 쪽이신 듯 하다. 나는 다행히도 스티커 붙임을 당하지 않고 넘어가긴 했는데... 앞으로도 음정이 틀리면 스티커가 붙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시달릴 지도 모르겠다..ㅡㅜ

문제는.... 이제 레슨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 가라는 점이다. 원래 그룹레슨을 받으면서 문제점을 느껴서 개인레슨을 시작했었지만, 여러가지 곡들을 배우는 그룹레슨을 그만두기도 힘들어 두 가지를 병행해 왔던 것인데... 최근들어 이렇게 계속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효율적이지도 않고 또 일주일에 두번이나 레슨 받을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가 않다고 느껴오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둘 중의 하나는 그만두는 것이 맞는 듯하다. 그렇다면 어떤 레슨을 계속해야 하고 어떤 것을 그만두어야 하는가?

그룹레슨은 선생님이나 교재와는 관계없이 개인레슨에 비하면 단점이 많다. 한 사람당 레슨시간이 적은 것도 그렇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주의가 분산되어 학생 한 명에게 집중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그러하다. 또 하나는 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다는 점. 같은 곡을 다 같이 연주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음정이 틀려서 음이 어긋나는 것인지 내가 틀려서 음이 어긋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결국 음정이 헷갈리고, 각기 다른 곡을 연주할 때에도 시끄러워서 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레슨을 받는 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같이 연습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만...;; 그에 비하면 개인레슨은... 더 비싸다는 명백한 단점 이외에는 그다지 큰 문제점은 없다. 선생님이나, 레슨 스케쥴은 그룹이냐 개인레슨이냐의 문제는 아닌 것이고.... 그래서 결론은?

아마 그룹레슨을 그만두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 문제는... 레슨 자체보다 연습시간을 더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그룹레슨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더 받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더구나 이제 그쪽팀과 같이 합주를 계속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에... 남은 레슨비는 다음에 혹시라도 레슨을 다시 시작할 경우를 대비해서 남겨 달라고 부탁드리고 당분간 휴식을 취하겠다고 말씀을 드려야 겠다.

1월에는 오케스트라 연습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아직 아주머니가 편찮으셔서 걱정이다. 오케스트라에서 할 슈만 교향곡 1번을 생각하면... 흠흠... 빨리 연주연습으로 복귀하고 싶은데... 회사일만 좀 덜 바쁘면 그럭저럭 매니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렇게 무리하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고.. 어찌 될지... ㅜㅜ

2007년 12월 17일 월요일

뉴욕 출장

출장이 계획되어 있는 것은 몇달 전부터 였는데, 도무지 일정이 나오질 않았다. 일정이 나와야 비행기표도 확정하고 호텔도 잡고 출장 승인도 받을 텐데 말이다. 이번 conference의 준비과정을 (그런게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가만히 지켜 보니, 이번 conference는 도무지 갈 이유가 없어 보였다. 지구 반대편까지 열 몇시간씩 비행기를 타고 가야하는데, 이렇게 이유도 없이 가야한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보스가 가라는 걸 안갈 수도 없는 노릇. 제대로 된 agenda도 없는 상황에서 누굴 대상으로 어떤 미팅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 채로 비행기를 탔다. 이렇게 organize가 안되어 있는 미팅은 정말 난생 처음이다..;;;

월요일 낮에 도착하고 조금 졸다가 저녁을 먹으러 갔다. Carmine's라는 곳으로 나름 유명한 곳이라고 한다. 패밀리 레스토랑같은 분위기에 엄청난 양의 음식이 잔뜩 나온다. 맛은 뭐... 그저 그렇다. 사람이 많아서 한참을 기다려서야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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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채요리라고 나온 오징어 (또는 쭈꾸미?) 튀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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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디쉬 중 하나였던 립. 고기 맛은 괜찮았다... 좀 짠 것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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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은 뉴욕에서 상당히 유명한 곳으로 저녁이면 유명인들이 약속장소로 삼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누가 유명한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인지... 묵는 내내 그다지 인상적인 사람들을 보지는 못했다.

방에서 바라본 호텔 옆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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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호텔에서 그 다음날의 미팅의 내용을 모모씨들과 다시 쭉 훑어 보고... 늦은 오후에 사람들과 같이 나가서 잠깐 쇼핑을 했다. 쇼핑이라고 해봐야... 장난감 몇 개 사는 정도. 뉴욕이 처음도 아니고... 신발이 불편해서 발도 아프고, 곧 비가 오기 시작해서 얼른 저녁을 먹고는 돌아왔다.

2004년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작년 초에 한 이틀정도 Fairfield에 갔다 오고, 작년 여름엔 Orlando에 다녀왔었는데.... 모두 그다지 재미있지는 않았었고.... 최근에는 가끔 미국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출장이 아니라 지윤이랑 같이 예전에 살던 필라델피아랑 뉴저지를 둘러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번 출장이 계획되었을 때, 앞 뒤로 시간을 좀 내어서 필리에 가볼까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지윤이를 데리고 가면 미팅을 하는 동안 방에 혼자 둘 수도 없고... 더구나 아줌마도 편찮은 상황이어서 출장기간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더 낫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미국에서의 생활이 쭉 머리속을 스쳐지나갔다. 자려고 눈을 감고 있었는데, 기억이 갑자기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라서 스스로도 당혹스러워 졌었다. 아파트의 모습, 주차장, 차, 매일 지나던 길들, 가끔 탔던 버스, 지윤이가 다니던 유치원, 아파트 근처의 수퍼.... 어떻게 거기서 그렇게 살았을까. 혼자서 외로왔던 기억, 겨울에 히터가 고장나서 떨며 잤던 기억까지... 역시 그다지 즐거운 기억들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덕분에 잠은 완전히 달아났고 13시간동안 한잠도 자지 못했다.

수요일, 미팅은 30 Rock에서 있었다. 뉴욕에 NBC Universal의 사무실이 있어서 그 곳에서 미팅을 하거나, 아니면 호텔에서 미팅을 할 것이라고 들었었는데, 결국 NBC가 있는 30 Rock에서 하기로 한 모양이다. 바로 앞에 크리스마스 즈음 뉴욕의 명물이 된다는 트리가 있으니, 이번엔 그 유명한 Rockefeller Center의 트리도 볼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크리스마스 즈음에 뉴욕을 가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911 이후로 강화되었다는 까다로운 방문절차를 밟아 30 Rock의 25층 회의실로 올라갔다. 오전 미팅은 나름 괜찮게 진행되었는데, 오후에는 우리 "조직"의 No.2인 아저씨가 예상과는 달리 불참하는 바람에.... 간략 버전으로 진행되었다. 준비해간 피치를 그냥 쭉 넘기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일찍 미팅이 끝나고 회의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에 불이 들어 올 즈음 사진을 찍었다. 회의실 유리창을 통해 찍은 것 치고는 그림이 꽤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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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 후에도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호텔로 돌아왔고 곧 저녁을 먹으러 갔다. Broadway 32번가의 한국식당에 갔는데 (왜 하필...;;) 짜기만하고 별 맛없는 양념갈비와 어색한 인테리어에... 서비스도 엉망이었다. 그나마 가격은 서울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했는데... 대략 어느 지방 소도시의 80년대식 식당의 느낌이랄까...;;

다음날이자, 마지막날에는 Stamford에서 미팅을 하기로 했었는데, 일기예보에서는 눈이 온다고 했다. 미국 동부에서 눈이 오면 얼마나 황당해질 수 있는지는 잘 알고 있긴 하지만... 이 조심성이 과다하게 많은 사람들은... 결국 그날 미팅을 모두 취소하고는 call로 대체하기로 결정을 해버렸다. 모두들 그날 아침에 또는 전날 저녁에 Stamford로 돌아가 버렸고, 우리들만 City에 남았다. 그 날 오후까지 미팅스케줄을 잡았던 나는 새벽까지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결정을 못해서 맘고생을 좀 했다. 갔다가 눈 때문에 못 돌아올 경우를 대비해서 항공사에 다음날 좌석이 있는지도 체크해보고.... 어쨌거나, 결국은 호텔방에서 call을 했다. (결국 맨하튼에서는 눈이 아닌 비가 주륵주륵 내렸다.. 아마 Stamford에 갔다가도 충분히 제 시간에 돌아 올 수 있었을 듯 하다. 하긴 점심때쯤 통화에서는 그 윗동네에는 3인치쯤 눈이 왔다고는 하더만.. )

2-3시까지 밥도 못먹고 진 빠지게 call을 하고... 늦은 점심을 먹고는 잠시 쉬고 있었는데... MSN에 접속을 해보니 바로 어제 뉴욕에 도착한 옛 동료가 온라인이었다. 그는 이제 1년-1년반의 뉴욕 생활을 막 시작했으니, 오늘 보지 않으면 한동안은 얼굴 보기가 어려울 듯... 저녁에 잠시 보기로 했다.

로비에서 만나서, 다시 30 Rock으로 갔다. 시간이 얼마 없기 때문에 가까운 곳을 찾고 싶었고 32번가의 한국골목은 별로 땡기질 않았으며... 어제 미팅 후에 자세히 보려고 했던 트리를 이런 저런 이유로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찍은 GE Buildng과 크리스마스 트리. Saks Fifth Avenue앞에서 길 건너편을 찍었다. Saks Fifth에서는 귀여운 장난감 인형들이 전시중이었는데 사람도 많고 귀차니즘도 발동하여 사진은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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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의 나팔부는 모양의 장식물들. 사진찍기 좋은 스팟이었는데... 역시 대충 찍었더니 좀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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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 앞의 아이스링크. 비가 조금씩 오고 있어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후에 밥먹고 나오니 꽤 많은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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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센터의 지하에서 대충 저녁을 먹고 (늦은 점심을 먹었으니 배가 고플리가 없다...) 호텔과 30 Rock 중간에 있는 Au Bon Pain에서 커피를 마셨다. 헌츠만홀에서 늘 먹었던 프렌치로스트다.  오봉뺑에 들어서자 죽 늘어서 있는 커피포트들이 옛날 헌츠만홀의 오봉뺑을 연상시켰다. 서울에 있는 오봉뺑도 이런 시스템인가? 안가봐서 모르겠다...

거기 앉아서 약간 수다를 떨고... 그에게 뉴욕생활 잘 하라고 이야기 하고는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우리 팀 사람들은 모두 저녁을 먹으러 나간 듯, 연락이 되질 않았고... 이메일 한 통 써놓고는 체크아웃.

액체류가 반입금지였던 것을 까먹어서 공항 검색대에서 치약을 압수당하고... JFK 라운지로 갔더니... 헐... 아이들이 바글바글하다. 유학생들이 방학이 되어서 귀국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애들이 다 비즈니스를...;;; 이코노미에 열 몇시간을 시달리며 다녔던 내 고달픈 유학시절이 또 생각난다...ㅡㅜ

그다지 부담스럽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출장이었는데.... 워낙 별로 가고싶지 않아서 그런지 엄청나게 부담스러웠다. Corporate쪽 사람들과 Business쪽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눈치를 보고 있었기 때문인지... 가서도 이렇게 하는 일 없이 Manhattan에 죽치고 있으면 안될 것 같고... Stamford에 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마구 들었었는데, 눈온다고 오지도 말라고 하고...;;; 돈은 많이 썼는데, 얻은 것도 없고, 즐겁지고 않고... 마음도 편하지 않은 출장이다. 게다가 당장 다음주에 돌아가서는 할 일도 산더미....;;

이번 출장은 이렇게 마무리... 담에 비행기 타는 일은 즐거운 목적이길...
(그나저나.. 고작 며칠 갔다왔는데 시간감각이 망가지다니... 새벽 3시에 잠도 안오고... 큰일이다... ㅜㅜ)

2007년 12월 2일 일요일

그녀, 파트리샤 쁘띠봉

아마존 프랑스에 주문했던 하모니아문디 50주년 기념 박스가 도착했다. 배송비를 생각하여 이런 저런 프랑스 음반들도 같이 주문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쁘띠봉의 음반이다. 쁘띠봉의 음반은 국내에서도 그럭저럭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이제 실컷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 50주년 기념 박스만큼이나 맘에 든다^^

그녀의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이 여자 뭐하는 거지? 성악가가 맞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노래를 듣고는 더 충격을 받았다. 애니메이션이나 아이들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외모인데, 목소리는 파워풀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왔다. 인지 부조화라고나 할까... 하지만 계속 보고 들으니, 정말 매력적인 가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쁘띠봉은 나보다 이틀 먼저 태어났다. 1970년 2월27일생. 물론 프랑스 출신. 많아야 삼십대 초반일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나이는 많다. 주로 프랑스 바로크 음악을 녹음한 음반을 내고 있지만, 모차르트, 하이든의 오페라 작업도 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그녀의 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 영상도 너무 좋다) 원래는 플라스틱 아트를 공부하다가 음악을 했는데, 그런 미술적인 백그라운드가 그녀의 독특한 꾸밈새와 관련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작곡가 남편과 아들 하나가 있다고 한다.

유튜브에는 나름 다양한 그녀의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좀 충격적인 것은 오펜바흐의 호프만이야기에서 올림피아로 나온 영상 두 개이다. 하나는 아래에 스크랩되어 있고, 나머지 하나는 누드씬인 것 처럼 꾸며놓은 의상을 입고 노래하는 것이다. 올림피아라는 캐릭터가 그녀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유니버설뮤직에서 만들어준 그녀의 홈페이지는 다 불어라서 이해가 쉽지 않다.
http://patriciapetibon.artistes.universalmusic.fr/

쁘띠봉이라는 재미있는 이름과, 특이한 헤어스타일, 멋진 연기력과 귀여운 마스크.... 그리고 무엇보다 부드럽고 강하고 아름다운 완벽한 목소리!! 언젠가는 멋진 그녀를 만날 수 있으려나...